[[분류:낙랑태수]][[분류:30년 사망]] ||성씨||왕(王)|| ||이름||조(調)|| ||생몰년도||? ~ 기원후 30년|| ||자칭||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 [목차] == 개요 == [[낙랑군]] 출신의 토착 호족[* [[후한서]] 원문에는 토인(土人)으로 기록되어 있다.]이자 반란자. [[신나라]] - [[후한]] 교체기에 자립을 꾀하였다. == 생애 == [[경시제]]가 패망할 무렵인 25년 낙랑태수 유헌(劉憲)을 살해하고 '''대장군낙랑태수(大將軍樂浪太守)'''를 자칭했다. 당시 중국은 [[신나라]]가 막 멸망하고 [[후한]]이 들어서는 시기였기 때문에, 당시 [[광무제]]는 머나먼 낙랑군까지 신경을 쓸 틈이 없는 상황이었다. 30년, 광무제는 낙랑태수 왕준(王遵)을 파견했고 왕준은 [[요동]]에 이르게 된다. 이때 왕조에게 협력했던 군삼로 [[왕굉(낙랑군)]]과 군결조리 양읍(楊邑)이 왕조를 배신하고 그를 살해하면서 반란은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 기타 == 왕조가 낙랑군에 끼친 영향은 적지 않았다. [[낙랑군]]의 동부도위가 폐지되면서 직접 지배가 아닌 [[옥저]], [[동예]]의 군장들이 다스리는 형식으로 바뀌게 되었다. [[삼국사기]]에만 언급되는 [[최씨낙랑국]]과 [[최리]]가 이러한 낙랑군의 혼란[* 왕조의 난 시기에 자립했거나, 낙랑군의 동부도위, 남부도위가 폐지되면서 해당 지역에는 낙랑군의 통제력이 약화된 것을 노려서 할거했을 수도 있다.]과 연관된 것으로 보이나 확실히 밝혀진 바는 없다. == 관련 연구 == 권오중, 樂浪 王調政權 成立의 國際的 環境,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