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2> {{{#ece5b6 '''{{{+1 남송의 장군[br]{{{+1 王淵 | 왕연}}}}}}'''}}} || || '''[[시호|{{{#fff 시호}}}]]''' ||양민(襄愍) || || '''{{{#fff 이름}}}''' ||왕연(王淵) || || '''{{{#fff 자}}}''' ||기도(幾道) || || '''{{{#fff 생몰}}}''' ||1077년 ~ 1129년 || || '''{{{#fff 출신}}}''' ||희주(熙州) || || '''[[주군|{{{#fff 주군}}}]]''' ||[[휘종(송)|송휘종]][br][[흠종(송)|송흠종]][br][[고종(송)|송고종]] || || '''[[국적|{{{#fff 국적}}}]]''' ||남송(南宋)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송]]의 장군으로 자는 기도(幾道)이다. == 생애 == 본래는 희주(熙州) 출신이었다가 이후에 환주(環州)로 옮겨살았다. 왕연은 [[휘종(송)|휘종]] 시기에 군에 입대하여 [[서하]]와의 전투에서 많은 공적을 세웠으며, 희하난황로(熙河蘭湟路) 제3장부장, 공주(鞏州) 영원채(寧遠砦) 권지(權知)까지 승진하였다. 이후 [[방랍의 난]]이 일어나자, 왕연은 선봉이 되어 방랍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다. 왕연은 이후 1125년 유연경의 휘하에서 [[요나라]]와의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로잡혔다. 왕연은 단신으로 달아나 무공대부(武功大夫), 과주(果州) 단련사(團練使)로 승진하였다. 또한 양유충(楊惟忠)과 신흥종(辛興宗)을 따라 송나라에 반란을 일으킨 도적 고탁산(高托山) 등을 물리치고, 공위대부(拱衛大夫), 영주(寧州) 관찰사로 승진하였다. 1126년, 왕연은 진정부(眞定府) 총관(總管)이 되었다가 도통제(都統制)로 옮겼다. 이때 오담(吳湛)이 조주(趙州)를 점거하고 반란을 일으키자, 왕연은 이를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금나라가 개봉을 공격하자, 하동로(河東路)·하북로(河北路) 선무사(宣撫使)로 있던 범눌(范訥)이 근왕병을 이끌고 옹구(雍丘)에 주둔하면서 왕연을 선봉으로 삼았다. 왕연은 이윽고 강왕 조구에게로 갔다. 1127년 개봉이 함락된 이후, [[금나라]]에서 [[장방창]]을 괴뢰 황제로 세운다. 강왕 조구는 왕연에게 3천 군대를 이끌고 종묘를 지키도록 명한다. 왕연은 개봉에 당도하여 조복을 입고 장방창을 회견하여 제호를 칭하지 말도록 설득하였다. 이후 왕연은 강왕 조구를 황제로 옹립하였고, 강왕 조구는 [[남송|강남에서 간신히 송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간다.]] 이가 송나라의 제10대 황제인 [[고종(송)|고종]]이다. 왕연은 어영사 도통제가 되었고, 양주(揚州)에 이르러 용신위4상도지휘사(龍神衛四廂都指揮使)로 제수되었으며, 봉일천무4상도지휘사(捧日天武四廂都指揮使)로 전임되고 보대군(保大軍) 승선사(承宣使)로 진위되었다. 이후 남송에서 도적들이 봉기하자 왕연은 제치사가 되어 도적들을 진압하고 향덕군(嚮德軍) 절도사로 승진하였다. 1129년 2월, 금나라가 양주를 침공하자, 남송 조정은 혼돈에 빠졌고, 왕연은 내시 강리와 함께 고종을 진강부까지 호위한다. 그런데 진강부까지의 피난 과정에서 봉국군 절도사 [[유광세]]는 수하의 기병 2천이 군선이 부족해서 도강하지 못했다고 고종에게 이야기한다. 왕연은 유광세의 보고에 분노하여 휘하의 황보좌(皇甫佐)를 죽여서 이를 변명하였다. 이 일로 인해 왕연은 장수들의 신망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만다. 왕연은 이후 평강부에서 고종이 있는 행재소로 급행하여 첨서추밀원사로 임명되었고 어영사도통제를 겸하였다. 그런데 왕연은 이미 장수들의 신뢰를 완전히 상실하였기에 장수들은 이 명령에 대해 복잡한 입장이었고, 고종은 장수들을 달래고자 왕연을 첨서추밀원사 겸 어영사도통제에서 해임하였다. 여기서 왕연에 대해 불만을 품은 2명의 대표적인 인물이 있었는데, 바로 묘부(苗傅)와 유정언(劉正彦)이었다. 통제관 묘부는 대대로 장수 노릇을 해왔다고 자부하였지만 왕연이 중용되자 그를 질투하여 따르지 않았다. 유정언 또한 도적 정진(丁進)의 반란을 토벌하였음에도 제대로 된 포상을 받지 못한 것 때문에 왕연을 원망하였다. 이들은 왕연이 조정의 대권을 장악한 강리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고, 또한 왕연이 추밀부로 들어간 것에 대해 불만을 품게 된다. 결국 묘부와 유정언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연과 강리는 물론 주변 환관들까지 살해한다. 묘부와 유정언은 쿠데타를 일으킨 직후, 고종의 유일한 아들인 태자 조부를 황제로 내세우고 고종에게 퇴위를 압박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묘유병변(苗劉兵變)이라고 부른다. 묘부와 유정언의 쿠데타가 종식된 이후 왕연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로 추증되었다가 소보(少保)로 추증되었으며 아들 8명에게 관직을 내렸다. 1134년에는 왕연의 자손 2명에게 다시 관직을 하사하였으며, 1170년에는 왕연에게 양민(襄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077년 출생]][[분류:112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