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원나라의 인물]][[분류:양저우시 출신 인물]] [목차] == 개요 == 王信 (? ~ ?) 왕신은 [[원나라]] 말기의 장군으로, [[양저우시|양주]](揚州) 흥화현(興化縣) 사람이며 [[린이시|기주]](沂州)에서 활동했던 [[군벌]] [[왕선(원나라)|왕선]]의 아들이다. == 생애 == 왕신은 처음에 [[차칸테무르|찰한첩목아]](察罕帖木兒)를 따라 종군하여 [[산둥성|산동]](山東) 지역의 [[홍건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찰한첩목아는 거짓으로 항복했던 홍건적의 장수 전풍(田豊)의 꾀임에 넘어가 그를 만나려 했는데, 그는 왕신의 군영을 시찰한 뒤 곧바로 전풍을 만나러 길을 떠났지만 왕신은 찰한첩목아가 가지 못하도록 만류하지 못했고, 결국 찰한첩목아는 전풍과 암약한 왕사성(王士誠)에게 암살당한다. 찰한첩목아가 죽자 그의 양아들 [[코케테무르|확곽첩목아]](擴廓帖木兒)가 양아버지의 뒤를 이어 군대를 지휘하니 왕신 또한 확곽첩목아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확곽첩목아가 익도(益都)[* 오늘날의 [[산둥성]](山東省) [[칭저우시]](靑州市) 일대]를 무너뜨려서 산동의 홍건적을 모두 평정하게 되자 왕신은 기주로 귀환하여 그곳을 지켰다. 원나라 조정에서 홍건적을 토벌한 장수들에 대하여 논공행상을 할때 왕신은 그의 공을 인정받아 왕선과 함께 나란히 평장정사(平章政事)[* 종1품의 관직으로 오늘날의 [[부총리]]에 해당한다.]의 관직을 받았다. 1367년 겨울, [[명나라]]의 태조(太祖) [[주원장]]은 대장군(大將軍) [[서달]]에게 25만 대군을 내주면서 중원(中原)을 향하여 북벌할 것을 명령하였고, 서달은 왕선에게 편지를 보내서 항복을 권유하니 왕선이 겉으로는 이를 따랐다. 그러나 왕선은 항복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비밀리에 왕신을 기주의 동쪽으로 파견하여 거주(莒州)[* 오늘날의 산둥성 [[르자오시]](日照市) 쥐현(莒縣)], 밀주(密州)[* 오늘날의 산둥성 주청시(諸城市) 일대] 등의 고을들에서 의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왕신이 모병하는 도중에 서달이 왕선의 배신을 알아차리고 기주를 급하게 공격하여 함락시켰으며, 왕선도 서달에게 붙잡히게 되자 왕신은 모병을 포기하고 확곽첩목아가 있는 [[산시성(산서성)|산서]](山西)로 달아나려 하였다. 왕선은 서달의 강압에 못이겨 왕신에게 항복을 권하는 편지를 보내왔으나 왕신은 편지를 가져온 사자를 죽이고 그의 형 왕인(王仁)과 함께 산서로 달아났다. 왕신이 달아나자 거주, 해주(海州)[* 오늘날의 [[장쑤성]](江蘇省) [[롄윈강시]](連雲港市) 하이저우구(海州區) 일대]는 물론이고 술양(沭陽)[* 오늘날의 장쑤성 [[쑤첸시]](宿遷市) 수양현(沭陽縣)], [[르자오시|일조]](日照), 감유(赣榆)[* 오늘날의 장쑤성 롄윈강시 간위구(赣榆區)], 기수(沂水)[* 오늘날의 산둥성 [[린이시]](臨沂市) 이수이현(沂水縣)]의 제현(諸縣)들이 모두 서달에게 투항하게 된다. 한편 왕선의 배신에 이어서 왕신까지 사자를 죽이는 일을 저지르자 매우 분노한 서달은 결국 왕선을 때려죽이고 참수하였으며, 기주의 관료들을 모두 현지 관료에서 명나라의 관료들로 교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