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다른 뜻1, other1=삼국지의 가공인물, rd1=왕관(삼국지연의))] [include(틀:위서)] [include(틀:조위의 사공)]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8b 0%, #00008b 0%, #00008b 80%, #00008b)" '''{{{#fecd21 {{{+1 王觀[br]왕관}}}}}}'''}}} || ||<:> '''[[시호|{{{#FEDC21 시호}}}]]''' ||<(> 숙후^^(肅侯)^^ || ||<:> '''[[작위|{{{#FEDC21 작위}}}]]''' ||<(> 관내후^^(關內侯)^^ → 중향정후^^(中鄕亭侯)^^ → 양향후^^(陽鄕侯)^^ || ||<:> '''[[직위|{{{#FEDC21 최종직위}}}]]''' ||<(> 사공^^(司空)^^ || ||<:> '''[[성씨|{{{#FEDC21 성씨}}}]]''' ||<(> 왕^^(王)^^ || ||<:> '''[[휘|{{{#FEDC21 휘}}}]]''' ||<(> 관^^(觀)^^ || ||<:> '''[[자(이름)|{{{#FEDC21 자}}}]]''' ||<(> 위대^^(偉臺)^^ || ||<:> '''{{{#FEDC21 생몰기간}}}''' ||<(> ?년 ~ 260년 10월 || ||<:> '''{{{#FEDC21 고향}}}''' ||<(> 연주^^(兗州)^^ 동군^^(東郡)^^ 늠구현^^(廪丘縣)^^ || ||<:> '''{{{#FEDC21 사공 재임기간}}}''' ||<(><#ffffff> 260년 6월 11일 ~ 260년 10월 || [목차] [clearfix] == 개요 == [[고대]] [[중국]] [[삼국시대(중국)|삼국시대]]의 [[위(삼국시대)|조위]]의 관료로 자는 위대(偉臺). == 생애 == [[연주(중국)|연주]] 동군 늠구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가난했지만 지기가 있어 [[조조]]가 그를 불러 [[승상]]문학연으로 삼았으며, 그 후 지방으로 나가 고당, 양천, 찬, 임의 [[현령]]으로 임명되어 치적을 쌓는다. 220년 [[조비]]가 즉위하자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랑 [[정위]][[감]]이 되고 다시 지방으로 나가 [[남양군]], [[탁군]] [[태수]]가 되었는데, 당시 탁군은 [[선비족]]의 침범이 잦은 곳으로 왕관은 이에 대항해 백성들에게 열 집 이상이 모여서 거주하게 하고 멀리 볼 수 있는 누대를 건축한다. 당시에는 이것을 원하지 않는 자도 있었지만 왕관은 [[군(행정구역)|군]]의 관리까지 파견해서 시간 제한은 두지 않고 그냥 건축만 완성하면 돌아오라고 했으며, 파견된 관리들 또한 시간 제한이 없으니 [[감독]]을 하지 않고 서로 격려해 활동하니 '''열흘 안'''에 모두 완성해 적이 그런 대비에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 226년 [[조예]]가 즉위하자 [[칙서|조서]]를 내려 각 군의 치안상황을 극(劇 : 낮음), 중(中 : 중간), 평(平 : 높음)으로 나눠 보고하도록 했는데, 담당 관리가 평이라고 보고하자 이걸 본 왕관이 선비족의 침입으로 피해를 입고 있는데, 왜 극이라고 보고를 안하냐고 한다. 관리는 외부 관계 때문에 극이라고 보고하면 아들이 볼모로 수도로 끌려온다는 말을 했지만 왕관은 >무릇 관리는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하오. 지금 군은 외부와의 관계로 인해 극하니 백성들의 [[노역]]을 감소해야만 하오. 어찌 태수의 사사로움을 위해 한 군의 백성을 불행하게 할 수 있겠소? 그런데 이 왕관의 아들은 외동아들인데다가 나이도 어리고 몸마저 골골거렸는데, 왕관의 이러한 결정으로 [[업성]]으로 가게 되니 그가 공적인 일을 위하는 마음이 어떤 지를 알 만했다. 조예가 [[허창]]을 순시할 때 치서시어사가 되어 [[조정]] 고관의 재판을 담당했으며, 사람들을 대할 때 기분에 따라 대하던 조예와는 관계없이 뜻을 굽히지 않고 법에 따라 집행한다. 이 때 [[사마의]]가 그를 종사중상으로 임명할 것을 요청해 [[상서(관직)|상서]]로 승진했으며, 밖에 나가 [[하남]][[윤]]이 되고 [[소부]]로 전임된다. 239년 조예가 죽고 [[조방]]이 즉위한 후에는 [[조상(삼국지)|조상]] 일파가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해 [[약탈|집의 목재와 사람들의 물품을 마음대로 가져오게 하는데]], 왕관은 그러한 상황을 보고 빼앗은 것을 모두 몰수하고 관에 보고한다. 당시 소부는 사치품이나 공예품을 관리하는 곳이었는데, 이런 자리에 왕관이 있었기에 조상 일파에게는 ~~함부로 뺏아올 수 없어서~~ 눈엣가시였는데, 조상 일파는 그를 [[태복]]으로 전임시킨다. 249년 [[사마의]]가 [[고평릉 사변|조상 일파를 주살하자]] 왕관은 중령군의 직을 대행해 [[조희]]의 영을 관장하면서 이어 [[제후|관내후]]의 직위를 받고 상서와 [[부마도위]]에 임명된다. 254년 [[조모(삼국지)|조모]]가 즉위하자 중향정후로 봉해지고 [[광록훈|광록대부]], [[우복야]]로 봉해졌으며, 256년에는 와병하던 [[노육]]이 광록대부로 있던 왕관을 추천한다. 260년 [[조환]]이 즉위하자 양향후로 봉해지고 [[식읍]]이 천호 증가해 2천 5백호가 되었다. 260년 6월 11일에 상서우복야에서 [[사공(관직)|사공]]으로 승진하지만 [[황희(조선)|왕관은 이를 거절하면서 사퇴를 요청하나 거부되어 강제로 파견된 사자에게 인수를 받고]] [[삼공]]의 지위에 오른다. 관직에 취임한 지 며칠 후 수레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 260년 10월 세상을 떠나면서 묘지는 관이 들어가면 충분하고 명기[* 明器 : 죽은 자와 함께 묻는 물건이다.]는 두지 말며, 흙으로 쌓지 말고 나무도 심지 말라고 유언했다. [[시호]]를 숙후라고 하고 아들 왕리가 후사를 이었으며, [[함희]] 연간에 왕관의 공으로 왕리는 교동자에 임명된다. 청아하고 소박하며 그 자신을 엄하게 하고, 부하를 통솔하는 것도 검소해 관리들마저 그의 풍모를 이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또 [[진수(역사가)|진수]]는 청렴하고 정직하며 품행이 고결해 [[재상]]의 자리에 오를만 했다고 평했다. == 창작물에서의 등장 == || [[파일:왕관(위나라).jpg|width=400]] || || [[삼국지 14]] 일러스트 ||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14]]부터 등장하고 능력치는 통솔 59, 무력 12, 지력 66, 정치 78, 매력 75이며 일러스트는 노인의 모습으로 등장하면서 [[홀]]을 들고 있다. 개성은 진흥, 법률, 친선, 소욕, 주의는 왕도, 정책은 지역순회 Lv 3, 진형은 방원, 정란, 전법은 정란, 친애무장과 혐오무장은 모두 없다. 생년은 177년, 몰년은 263년까지 설정되어 있는데 사망년도가 260년이 아닌 263년이라는 것은 명백히 고증오류다.~~3년 더 수명 연장~~ [각주][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왕관, version=150)] [[분류:조위의 사공]][[분류:260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