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1198년 출생]][[분류:1264년 사망]] [목차] == 개요 == 王堅, 1198 ~ 1264 [[남송]]의 무장. [[맹종정]]의 수하에서 경력을 쌓았고, 이후 [[맹공]]의 부장으로 활약했다. 이후 [[조세웅(남송)|조세웅]]과 함께 [[여개(남송)|여개]]의 휘하에서 몽골군을 격파하고 흥원을 수복한 뒤, [[조어성 전투]]에서 [[장각(남송)|장각]]과 함께 몽골군을 격파한다. == 생애 == 남송(南宋) 영종(寧宗) 시기인 경원(慶元) 4년(1198년)에 태어났다. 가정 12년(1219년) 완안와가가 송을 침략했을 때 [[맹종정]]이 장사 2만여 명을 모집하였는데, 이들은 충순군(忠順軍)으로 불렀으며, 왕견은 이 곳에서 둔전을 일구었고 군사를 훈련시켰다. 소정 원년(1228년), 충순군과 민둔전, 10만 경을 관개하고 그해 15만 섬의 곡식을 거두어 충순군의 각 집에서 말을 기르고, 관가에서 여물을 주고, 충순군 병사는 말을 강하게 하여, 침입하는 몽골 군대에 항상 심한 타격을 주었다. 왕견은 충순군 내 유능한 장수가 되어 강군통제로 승격되었고 이후 [[맹공]]의 수하로 활약한다. 가희 4년(1240년), 몽골군은 순양단강 연안에 주둔해 남침에 필요한 배를 제조할 준비를 했다. 강잠병(强潛兵)은 그 선재(船材)를 불태워 두각을 나타내 남송의 명장(名將)이 되었다. 몽골군이 사천을 공격하자, 왕견은 맹공을 따라 사천에 들어가 적을 막았다. 순우 10년(1250년), 사천 방면 항몽전쟁의 총지휘자인 [[여개(남송)|여개]][* 남송의 항몽명장 중 하나로, 사천 지역의 산성방어체계 성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나 무고를 믿은 조정으로 인해 급사했다.]의 밑에서 몽골군의 총수 [[왕덕신]](汪德臣)[* [[왕세현]]의 아들로, 남송의 사천방어 체계에 맞섰고 또 제2차 [[몽송전쟁]] 때 몽케 칸의 선봉에서 활약했으나 이후 조어성 전투에서 죽고 만다.]과 흥원(興元)[* 오늘날 섬서 성 한중 시]에서 대치하였다. 이듬해, 명령대로 흥원을 수복한 뒤 군을 이끌고 합주에 주둔하였다. 보우 2년(1254년), 흥원부도통(興元府都統) 겸 지합주(知合州)를 겸하여 조어성(釣魚城)[* 여개가 염진, 염박형제의 건의를 듣고 성을 쌓게 되었다. 이후 나오듯 왕견에 의해 수비가 강화된다.] 방무를 주관하였다. 그 뒤 조어성(釣魚城)을 견고히 하여 관할 5현의 군민 수만 명을 모아놓고, 조어성(釣魚城)에 큰 '천지'를 파서 물고기를 기르고, 우물 92개를 파서 성에서 남북의 강변 선착장까지 일자성벽을 쌓고, 성벽과 강물 밖으로 적을 막고, 병사를 훈련시켰다.[* [[조어성 전투]] 때 조어성의 군민들이 물고기를 던지면서 오래 버틸 수 있다며 몽골군을 조롱했다.] 조어성은 사천 등 각지의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보우 6년(1258년), 몽케와 그의 동생 쿠빌라이 등이 3개 노선으로 출병[* 몽케는 사천 방면, 쿠빌라이는 양양 방면, 우량카다이는 대리국 지역을 거쳐 광서를 거치는 등 북쪽으로 진격했다.]하여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몽케가 이끄는 군대는 성도를 비롯한 사천 지역 대부분을 점령하고,[* 왕덕신이 이끄는 군대가 선봉으로 활약하였다.] 조어성 동5리의 자갈산에 직접 주둔했다. 몽케는 투항한 진국보를 왕견에게 보내 항복하라고 했으나 왕견은 진국보를 죽이고, 부장인 [[장각(남송)|장각]][* 장각은 조어성 전투 이후 중경 지역에서 몽골군을 모두 막아내나, 1279년 조어성이 함락된 데 이어 중경이 함락되자 강에 뛰어들어 자살하려 하지만 주위의 만류로 실패하고, 이후 대도로 압송되던 와중 변소에서 목을 매 자살한다. 이를 들은 [[문천상]]이 이를 칭찬했다고 한다.]과 함께 몽골군과 싸웠다. 왕견이 다섯 달 동안 위험을 무릅쓰고 성을 지키니 몽고군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여문덕]]이 이끄는 지원군이 조어성을 지원하려 했으나 [[사천택]]의 군대에 가로막혀 중경으로 돌아갔음에도 불구하고, 왕견 휘하의 송군은 몽골군을 모두 막아내었다. 몽케 휘하의 몽골군은 조어성 동문 고지에 축대를 쌓고 성 안의 정세를 탐지하여 결전을 도모하도록 명하였다. 몽고군이 축대를 쌓는 것을 지켜본 왕견은 몽케가 축대에 오른 것을 보고, 망을 보았을 때 왕견은 명하여 포를 쏘아 중상을 입혔다. 다음날 또 연못의 두 개를 길렀다. 30근 무게의 생선과 밀가루 반죽을 만들어 성 아래 몽골군에 투척하는 등 몽골군을 조롱하였다. 몽케가 조어성에서 부상당한 뒤 아픔이 분출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금건산 온탕협에서 사망하였다.[* 몽케는 죽을 때 조어성을 함락하는 즉시 성 내의 군민을 몰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쿠빌라이가 가한 자리에 오르고 1279년 성을 함락하지만 성내의 군민을 죽이지 않았다.] 몽골군은 북쪽으로 돌아갔고, 합주의 포위가 풀리게 되었다. 9월, 조정에서는 왕견을 견녕원군절도사, 의전좌령군위장군, 흥원에 봉했다. 부(府)가 주둔하고, 어전 제군(御前)이 지합주(知合州, 3품)를 통치하며, 병마를 절제하고, 청수현 개국백(淸水縣開國伯)으로 진봉하였다. 경정 원년(1260년)에 [[악주 전투]]의 공로로 재상이 된 [[가사도]]가 왕견의 공을 시기하여 임안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그는 가사도의 질시를 받으며 우울한 나날을 보냈다. 경정(景定) 5년(1264)에 죽었고, '충장(忠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