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서진의 외척]][[분류:동해 왕씨]][[분류:린이시 출신 인물]] [include(틀:다른 뜻1, other1=후한 말의 인물, rd1=왕개(삼국지), other2=고려 정종의 4남 왕개(王暟), rd2=왕개(개성후), other3=중국의 배우, rd3=왕카이)] [목차] == 개요 == 王愷 생몰년도 미상 [[서진]] 시대의 인물로 [[자(이름)|자]]는 군부(君夫)다. 서주 동해군 담현 사람으로 [[왕랑#s-1]]의 손자이자 [[왕숙]]의 아들이다. [[사마소]]의 아내이며 [[사마염]]의 어머니인 [[왕원희]]의 남동생으로 [[사마염]]의 외삼촌이다. 젊어서 훌륭한 관료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외척이라 진나라 조정에서 너그럽게 대해주기도 했고 천성이 호사스러웠다. 집안발은 쩔어주는 서진의 대귀족. 하지만 학문과 검소함으로 유명했던 [[누나]] 왕원희와는 달리, 사치와 낭비로 유명했다. 사실 왕개가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면 할아버지 왕랑이 괜히 "내 손녀(왕원희)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게 아쉽다"고 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 생애 == 후장군[* [[사방장군]] 중에 하나인 무관직이다.] 시절 산기상시 [[석숭]]과 사치 경쟁으로 [[라이벌]] 관계였다. 이때의 일화들도 유명하다. 예를 들어 왕개가 당시에는 매우 귀했던 [[밀랍]]을 [[땔감]]으로 사용해 지은 밥을 먹으면 석숭은 오색의 꽃초를 태워서 밥을 지어 먹었고, 석숭이 [[은]]으로 만든 [[요강]]을 쓰면 왕개는 [[황금]]으로 만든 세숫대야를 썼다. 또 왕개가 [[모유|사람의 젖]]을 먹여 기른 [[돼지]]를 잡아 먹으면 석숭은 비단 옷을 입히고 금가루를 먹여서 기른 [[닭]]을 잡아 먹었다. 참고로 세숫대야 뿐 아니라 왕개의 집에 있는 그릇들은 모두 [[황금]]으로 되어 있었는데, 왕개는 하녀들에게 그것을 맥아당(麥芽糖: 꿀물)으로 씻도록 하기까지 했다. 한번은 왕개가 [[비단]]으로 40리에 이르는 담장을 만들자, 석숭은 한술 더 떠서 50리에 이르는 담장을 만들었다. 또 석숭이 값비싼 향료의 열매로 그 담장을 칠하자, 왕개는 피륙의 물감으로 쓰이는 적석지(赤石脂)로 담장을 칠했다. 참고로 그는 석숭과의 재력 대결에서 항상 밀리곤 했다. 그래서 황제 사마염이 왕개를 도와주기 위해 진귀한 [[산호|산호수]]를 선물했고, 곧장 이 산호수를 석숭에게 보여 주었더니 코웃음을 치면서 그 산호수를 몽땅 박살내버렸다. 왕개가 "황제의 하사품을 부수다니, 이게 무슨 짓인가!"[* 다른 사서에서는 사마염이 그 소식을 듣고 처벌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서진의 막장성을 나타내는 사례라고 한다. 위진남북조 시대가 아닌 전한, 후한, 계한 시대에 저런 짓했다가는 황실을 능멸했다고 [[풍비박산]]된다.]라며 깜짝 놀라니, 그 말을 들은 석숭이 "지금 이걸 산호수라고 갖고 왔느냐. 이까짓 것들쯤은 내가 다 보상해주겠다. 내 창고에 이것보다 더 큰 산호수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가져가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왕개가 석숭의 산호수를 보더니 자신의 것과 비슷한 것은 무수히 많고, 더 크고 아름다운 산호수가 6~7개는 더 있는 것을 보고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 사치뿐만 아니라 인간성으로도 [[석숭]]과 호적수가 될 만했는데, 왕개는 악사가 [[음악]]을 좀 잘못 연주했다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 때려죽이고, 석숭의 경우 손님이 시녀가 주는 술을 안 받아먹으면 바로 시녀를 참수했다. 말 위에서 활쏘기를 좋아해, 땅을 사서 울타리를 만들고 땅 한 쪽에 돈을 깔아 당시 사람들이 금전의 제방이라고 불렀다는 등의 석숭과 비슷한 일화가 남아 있다. 앞서 설명한 모유를 먹여키운 돼지에 대한 다른 일화도 있다. [[사마염]]이 왕개의 집에 오자 주연을 베풀었는데, 상에 올려진 여러 음식 중 특히 돼지고기가 맛이 있었다. 사마염이 "돼지고기 요리에 무슨 비결이 있는가?"라고 묻자, 왕개는 "그 돼지는 [[모유|사람의 젖]]으로 키웠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사마염은 불쾌해서 식사를 끝내지도 않고 갔다고 한다. 이 일화는 문헌에 따라 [[왕제(서진)|왕제]]의 일화로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활용되었으며, 작가들이 직접 이 일화를 본딴 것이라고 밝혔다.] 그래도 사마염은 외삼촌인 왕개를 꽤 잘 따랐던 모양이다.[* 애시당초 사치가 좋은 것이라는 인식을 가진 양반이기에 이런 망나니와 의외로 죽이 잘 맞았을 지도 모른다.] 왕개가 석숭과의 돈지랄 경쟁에서 조금 밀린다는 이야기를 듣자 황실의 보물인 [[산호|산호수]]를 떡 하니 내줄 정도였으니. 물론 전술했듯이 왕개가 패배를 인정했다. [[세설신어]]의 태치편에서 석숭과 돈지랄 경쟁하는 여러 가지 일화가 나온다. 또한 왕개는 깃털을 술 속에 담가두면 반드시 사람을 독살할 수 있는, 장강 이북으로 들여오는 것이 금지된 [[짐새]]를 익군을 지낼 때 석숭에게서 얻어 길렀다. 짐새의 크기는 [[거위]]만 했고, 부리의 길이는 1척이 넘고, 오로지 [[독사]]만 먹었다. 왕개는 석숭과 함께 조사받아야 한다고 상주받았고, 사마염은 용서해주면서 도성의 거리에서 짐새를 태우게 했다. 물론 위의 사치 일화는 신빙성이 좀 떨어진다. 진서 자체가 세실신어 같은 일화류를 짜집기한 경우가 많기 때문. 그냥 당시에 엄청난 사치를 부린 인물이었고 그것이 후대에 과장했다고 보는 게 더 가능성 있다.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 꺼리는 바가 없었다. 생전에는 후군장군이 되었으며, 사후에는 추(醜)라는 [[시호]]를 받았다. '더러울 추(醜)'라는 한자에서 보듯이 이 시호는 최악으로 나쁜 시호다. 사기 시법해에 따르면 '''위세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추(醜)라고 한다.'''고 하였다. 당대 사람들 역시 참으로 형편없는 인간으로 보았던 것이다.[* 시호란 한 신하의 생전의 일을 돌아보며 짓는 것이다. 고인에게 내리는 것이기도 한만큼 시호를 내릴 때는 생전의 행적 가운데 최대한 좋은 걸 추려내고 짓는 것인데 추 자를 시호랍시고 받은 것이다. [[조선]]의 예를 보면, [[명종(조선)|명종]] 때 [[박순(조선)|박순]]은 임백령의 시호를 짓는 일을 맡았는데, 박순은 사림 계열이고 임백령은 소윤이면서 [[탐관오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절대 좋은 걸 주고 싶을 리가 없었건만 그래도 '공소(恭昭)'라는 시호를 주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는 과오가 있으나 고칠 수 있다는 의미이고, 공은 풍채나 용모가 수려하다는 의미. 잘못이 있더라도 이렇게 에둘러 선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왕개의 경우 당대인들에게조차 그 정도의 존중도 받지 못할 정도로 악명이 대단했다는 것이다. 어지간히 쓰레기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시호를 추(醜)로 받았던 삼국지 인물이 더 있는데, 바로 [[조비]]의 측근인 [[오질]]이 추후(醜侯)를 받았다. 이 작자도 나쁜 기록이 많은데다 평판도 최악이었는데, 그나마 오질은 아들이 항의해서 위후(威候)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