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12년 출생]] [[분류:1939년 사망]] [[분류:독일의 축구선수]] [[분류:SV 발트호프 만하임/은퇴, 이적]] [[분류:독일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 [[분류: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 [[분류: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 [[분류:독일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 [[파일:Otto Siffling.jpg]] || 이름 || 오토 시플링[br](Otto Siffling) || || 생년월일 || [[1912년]] [[8월 3일]] || || 사망년월일 || [[1939년]] [[10월 20일]] || || 국적 || [[파일:독일 국기.png|width=28]] [[독일]] || || 출신지 || 발트호프 || || 포지션 || 센터 포워드, 인사이드 포워드 || || 신체조건 || 176cm / 74kg || || 등번호 ||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 '''[[SV 발트호프 만하임]] (1930-1938)''' || || 국가대표 || 31경기 / 17골 (1934-1938) || [목차]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http://otto-siffling.de/]]] == 시플링은 18세에 학생 신분으로 새로 창단된[* [[핸드볼]]팀이 더 먼저 창단되었다.] 고향 축구팀인 [[SV 발트호프 만하임]]에 입단했다. 지금이야 발트호프 만하임이 [[레기오날리가|독일 지역 리그]]에서나 노는 신세이지만 [[리즈 시절|30년대의 발트호프 만하임]]은 라인 지구와 가울리가 바덴에서 4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독일 축구 챔피언십에도 참가할 정도의 강팀이었다. 이 중 하이라이트는 1933-34 시즌이었는데 독일 축구 챔피언십 득점왕에까지 오른 시플링의 활약을 바탕으로 독일 축구 챔피언십 준결승에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하지만 상대가 당대 독일 축구계 최강팀이었던 [[FC 샬케 04]]였고, 샬케에 2대5로 패배하며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DFB-포칼]]의 전신인 참메르포칼에도 발트호프 만하임은 준결승에 2번 진출했지만 각각 [[1. FC 뉘른베르크]]와 샬케에 밀려 결승에까지 올라가지는 못했다. 시플링은 이런 활약을 바탕으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 대표팀]]에도 발탁되어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2번의]]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월드컵]]과 한번의 [[1936 베를린 올림픽|올림픽]]에 참가했다. 1934년 월드컵에서는 인사이드 포워드로 전경기에 출전하여 독일을 대회 3위에 올려놓는 활약을 보였다. 올림픽에서는 2라운드 [[노르웨이 축구 국가대표팀|노르웨이]]전에 출전했지만 시플링을 포함한 공격진 전원이 무득점으로 침묵하였고, 독일은 0대2로 패배하였다. 1937년 5월 16일. 독일은 [[덴마크 축구 국가대표팀|덴마크]]를 상대로 브레슬라우 엘프[* 브레슬라우는 현재 [[폴란드]]의 도시 이름이고 엘프는 숫자 11을 뜻한다. 중립경기장은 아니고 당시 브레슬라우는 독일 영토였고 [[제2차 세계 대전]]때 잃은 영토를 모두 포기해서 지금은 브로츠와프라는 폴란드 도시로 남아있다.]라는 역사에 남을 시합을 펼쳤다. [[프리츠 슈체판]], [[에른스트 레너]], [[파울 야네스]], [[라인홀트 뮌첸베르크]], [[한스 야콥]] 등 많은 레전드들이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단연 [[백미]]이자 1등 공신은 시플링이었다. 덴마크의 골문에 무려 5골을 폭파시키며 독일의 8대0의 대승을 이끌었고 이 시합은 지금까지도 덴마크 대표팀 역사상 최다점수차 패배 기록으로 남아있다. 시플링의 마지막 A매치는 1938년 4월의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전이었으며 1938년 월드컵에는 실제로 경기를 뛰지는 않았다. 4년의 대표팀 생활을 통해 총 31경기 출전 17골의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이 빛나던 공격수는 1939년 27세의 나이로 [[흉막염]]으로 쓰러졌다. 친정팀 발트호프에서는 이런 그를 잊지 않고 있으며 1977년 그의 고향 만하임 인근의 길 이름을 그의 이름을 따 오토 시플링 거리로, 2012년에는 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여 홈구장의 동쪽 스탠드에도 그의 이름을 붙였다. 그 외에도 발트호프 만하임의 홈구장 카를-벤츠 슈타디온에 가면 그래피티와 그의 활약을 기린 동판 등 여러 기념물을 볼 수 있다. || [[파일:otto-siffling-tribuene.jpg]] || || 오토 시플링 트리뷴 || || [[파일:otto_siffling_graffiti.jpg]] || || 슈타디온 근처의 그래피티 중 하나 ||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재능 있는 30년대의 센터 포워드. 특히 번뜩이는 천재성으로도 이름을 날렸는데 이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시합이 상술된 브레슬라우 엘프였다. 이 시합에서 시플링은 단순한 골 스코어러가 아니라 뒤쪽으로 물러나는 [[폴스 나인]] 역할도 하며 상대 풀백들을 끌어내었고 양 아웃사이드 포워드들에게 양질의 패스까지 공급하며 말 그대로 덴마크 수비진을 찢어놓는 활약을 펼쳤다. > 센터 포워드로서 탱크같은 선수는 아니었지만 골문 앞에서는 아주 위험했다. 브레슬라우 엘프에서 그는 골을 만들기도 했고, 득점도 해냈다. >---- > [[헬무트 쇤]](1978, Fußball 중에서) == 수상 == === 클럽[* 시플링은 [[SV 발트호프 만하임]] 원 클럽 플레이어이므로 팀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 === * 베치르크스리가 라인-자르 우승 4회: 1930, 1931, 1932, 1933 * 가울리가 바덴 우승 3회: 1934, 1936, 1937 === 국가대표 === * [[FIFA 월드컵]] 3위 1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 === 개인 === * 독일 축구 챔피언십 득점왕 1회: 1934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