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947년 출생]][[분류:북한의 인물]][[분류:실종된 인물]][[분류:일본계 한국인]][[분류:교토대학 출신]][[분류:구마모토현 출신 인물]][[분류:북한으로 귀화한 인물]] [목차] == 개요 == [[파일:external/oriharu.net/rati-OkamotoTakesi.jpg]] [ruby(岡本 武, ruby=おかもと たけし)] [[1947년]] [[7월 17일]] [[일본]] [[구마모토현]]~ 1988년? [[일본항공 351편 공중 납치 사건]] (일명 [[요도호 사건]])을 일으킨 '[[적군파]]'의 멤버이자 [[텔아비브]] 공항 테러의 용의자 중 한 명인 오카모토 고조[* 岡本公三, 2명의 공범과 함께 26명을 살해했다. 오카모토의 아버지는 이스라엘 대사에 극형에 처해달라 했고 가석방되어 무슬림이 되었다. 유난히 둘째형 타케시를 존경했다고 한다.]의 형. == 상세 == 교토대학 출신이며 1968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사건[* 신좌파 학생들이 폭력을 동원하여 도쿄대 혼고 캠퍼스를 점거한 사건]에 참가한 적이 있다. [[전공투]] 시대부터 일본 공산주의자 동맹의 [[간사이]] 분트를 이르기까지 활동했고 [[적군파]] 결성에 기여한 바 있는 인물로 극좌 성향이 강했다. 1970년 [[요도호 사건|북한에 망명하여]] 1976년에 결혼했다. 결혼 상대는 [[북한]] 여성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고치현]]의 [[일본]]인 여성인 후쿠토메 키미코[* 福留貴美子. [[하네다 공항]]을 출발하여 [[홍콩]], 북경을 경유하여 [[북한]]에 온 것으로 보인다. 야오 메구미의 저서에 따르면 "[[몽골]]을 동경해서 그쪽으로 가려고 했는데 여기까지 오게 돼 버렸다"고 후쿠토메 자신이 얘기하였다고 한다. 하네다 공항에서 친구에게 전화로 '몽골에 간다'는 말을 남겼다는데 같은 해 8월 후쿠토메의 본가로 '어느 공산국에 와있다, 외국에 좀 더 체제해야 되겠다는 말과 함께 동생의 결혼을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결혼식에 갈 수 없어서 미안하다는 편지가 도착했는데 어째선지 동생의 결혼식 날짜를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이상한 것은 1980년 입국에 요코하마의 친구 집에 2일 머물다가 오사카에 들렸다 고향 고치현으로 간다고 해 놓고 오사카 국제공항에서 재출국해 버렸다는 점이다.]임이 밝혀졌다. 그룹의 멤버들과 결혼한 여성들은 전부 일본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이었지만 [[북한]]의 사상에 대해 공감하고 받아들이는 반면 후쿠토메만 친북 사상에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납북]]되어 왔다는 설이 많다. 1980년 초 적군파의 리더인 [[타미야 타카마로]]와 방침을 둘러싸고 대립했디. 1983년 이후 방조한 지원자들 앞에서도 모습을 감추고 살았다. 1996년 산사태에 휘말려 부인과 함께 사망했다고 발표되었지만 1980년대 말에 어선을 훔쳐 [[탈북]]을 시도했고 붙잡혀 '''[[정치범수용소/북한|강제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정보가 [[북한]]을 취재한 저널리스트들에 의해 나왔다. 요도호 멤버 시바타 야스히로의 아내 야오 메구미의 저서에서 '''"제가 아는 한, 오카모토씨와 그 부인은 망명 후 요도호 그룹이 [[주체사상]]을 따르는 것에 반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세뇌 교정을 위해 격리되었고 결국 죽음이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고 얘기했다. 부부가 모두 [[북한]]의 체제에 녹아들 수 없었던 듯. ~~그러게 왜 갔냐?~~ 하지만 일본 경찰 측은 오카모토의 죽음이 미확인이기 때문에 아직까지도 국제 지명수배자로 수배되어 있다. 30살이 넘은 오카모토의 두 자녀들은 [[일본]]으로 귀국했다. 중학교 동창생인 마츠키 카오루의 누나가 [[납북]]된 사실이 확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