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918년 출생]][[분류:971년 사망]][[분류:타이위안시 출신 인물]] [include(틀:송사)] [include(틀:동도사략)] ||<-2> '''{{{+1 吳廷祚[br]오정조}}}''' || || '''성''' ||오(吳) || || '''이름''' ||정조(廷祚) || || '''자''' ||경지(慶之) || || '''부친''' ||오장(吳璋) || || '''출신''' ||병주(幷州) 태원현(太原縣) || || '''생몰''' ||918년 ~ 971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오대십국시대]], [[북송]]의 장수로 자는 경지(慶之). == 생애 == === 후주 시기 === 병주(幷州) 태원현(太原縣)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여러 가지 책을 읽었다. 오정조는 뒤에 [[곽위]]를 따랐고 곽위의 친교(親校)가 되었다. 951년, 곽위가 [[후주]]를 건국한다. 이때 오정조는 장택부사(莊宅副使)로 제수되었고 군기고사(軍器庫使), 지회주(知懷州)를 역임하였으며, 입조하여 황성사(皇城使)가 되었다. 953년, 곽위가 천웅군절도사(天雄軍節度使) 왕은을 죽이고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 부언경을 대명부(大名府)로 배치하자, 오정조는 지운주(知鄆州)를 대행하였다. 954년, 곽위가 죽고 진왕(晉王) [[시영]]이 유조에 따라 제위에 오르니 이가 제2대 황제 세종이다. 오정조는 우우림장군(右羽林將軍)으로 승진하고 내객성사(內客省使)를 맡았으며, 얼마 안 있어 선휘북원사(宣徽北院使)로 임명되었다. 한편 [[북한(오대십국시대)|북한]]의 [[유민(북한)|유민]]이 [[요나라]]와 연합하여 북한을 침공하자, 오정조는 세종에게 종군하여 북면도순검사(北面都巡檢使)가 되었다. 이 전투가 바로 [[고평 전투]]로, 세종이 승전하여 회군한 뒤 오정조는 판전주(判澶州)로 임명되었으며, 조정으로 복귀한 뒤 우감문위대장군(右監門衛大將軍)이 더해졌다. 뒤에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판하남부(判河南府)·서경유수(西京留守)를 맡았다. 변수(汴水)의 제방이 터지자, 오정조는 조명을 받들어 수만 명의 장정들을 동원하여 제방을 다시 메우고 수도인 개봉에서 임회(臨淮)까지 이르는 제방을 수십 일 만에 완공하였다. 세종이 다시 북한을 정벌할 때 오정조는 동경유수(東京留守)를 대행하였으며, 정주(鄭州) 원무현(原武縣)에서 제방이 터지자 오정조는 다시 가까운 현의 장정 2만여 명을 징발하여 제방을 막았다. 세종이 회군하면서 오정조는 좌효위상장군(左驍衛上將軍), 검교태부(檢校太傅)로 임명되고 추밀사(樞密使)를 맡았다. 같은 해, 세종이 죽고 세종의 어린 아들 [[시종훈]]이 즉위하니 이가 제3대 황제 공제였다. 이때 오정조는 검교태위(檢校太尉)가 더해졌다. === 북송 시기 === 960년, [[진교의 변]]이 일어나 조광윤이 수도로 돌아오고 시종훈으로부터 선양을 받아 제위에 오르니 이가 북송의 초대 황제인 [[태조(송)|태조]]였다. 북송이 건국되자, 오정조는 동중서문하삼품(同中書門下三品)[* 원래 동중서문하평장사지만 아버지의 이름이 장(璋)이었기 때문에 이를 동중서문하삼품이라고 하였다.]이 더해지고 추밀사를 맡았다. 같은 해, 노주(潞州)에 주둔하던 [[이균]]이 조광윤의 즉위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자, 오정조는 태조에게 다음의 계책을 바쳤다. >노주는 험하고 또한 태행산이 가로막고 있는데, 이균이 태행산을 점거하고 있다면 쉽게 무너뜨리기 어렵습니다. 이균은 본디 용맹하지만 경박하니 만약 이균을 재빨리 공격하면 반드시 상당(上黨)을 벗어나 자진해서 우리를 요격할 것이니, 산짐승이 자신의 산림을 잃고 물고기가 못을 벗어난 것처럼 이균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태조가 이균 토벌을 준비할 때 오정조는 동경유수 겸 판개봉부(判開封府)가 되었다. 그리고 오정조의 예측대로 이균은 과연 군대를 이끌고 택주(澤州) 남쪽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여 달아났다. 태조가 다시 [[이중진]]을 토벌할 때 동경 유수를 맡았다. 961년, 태조가 오정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고 웅무군(雄武軍) 절도사로 삼았다. >경이 추밀원의 사무를 관장한지 1년이 지났는데, 경을 진주(秦州)로 보내서 쉬게 하고 싶소. 내일 제서가 나오는데 경이 짐의 좌우를 떠나는 것을 근심할까봐 먼저 경에게 알리는 것이오. 진주의 석양진(夕陽鎭)은 옛 복강현(伏羌縣)으로 목재가 많았다. 오정조가 부임하기 이전에 지진주를 맡았던 고방(高防)은 채조무(采造務)를 설치하도록 건의하고 군졸들을 징발하여 번갈아가며 석양진의 목재를 조정으로 보냈다. 하지만 고방과 소수민족의 추장인 상파우(尙波于)가 서로 목재를 놓고 다투는 상황이 벌어졌는데, 고방은 상파우의 무리를 체포하여 상황을 조정에 알렸다. 고방을 대신하여 진주로 부임한 오정조는 태조의 조서를 가지고 상파우를 사면하였으며, 오정조의 성의에 탄복한 상파우는 복강현을 조정에 바쳤다. 964년 내조하여 다시 경조(京兆)에 진수하였다. 971년 태조의 생일인 장춘절(長春節)에 내조하였고 뒤에 병에 걸렸다. 조광윤이 직접 오정조의 병세를 살폈고 왕계은을 보내 오정조의 치료를 맡도록 명했지만 얼마 안 있어 오정조는 사망하여 시중(侍中)으로 추증되었다. == 기타 == 오정조는 신중하고 독후했으며 말이 적었고 효성이 지극하여 모친의 상중에 음료를 며칠 동안 끊었다. 또한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만여 권이나 모았다. 집안을 엄숙하게 보살펴 다스렸고 더욱이 석씨(釋氏)를 존경하여 제사를 모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