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오인식}}}'''[br]'''吳寅植'''}}}}}}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오인식.jpg|width=100%]]}}} || || '''이명''' ||오병길(吳丙吉) || || '''본관''' ||[[오(성씨)|군위 오씨]][* 말파 17세 식(植) 항렬.] || ||<|2> '''출생''' ||[[1896년]] [[9월 9일]] || ||[[제주시|제주목]] [[대정군]] 좌면 [[하원동|하원리]][br](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 || || '''사망''' ||[[1938년]] [[6월 7일]][* 음력 5월 10일.] || || '''상훈''' ||대통령표창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201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오병윤(독립운동가)|오병윤]]은 그의 8촌 삼종제(三從弟)이다. == 생애 == 1896년 9월 9일 제주목 대정군 좌면 하원리(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하원동)에서 아버지 오영화(吳永花, 1865 ~ 1957. 12. 27)와 어머니 [[진주 강씨]] 강갑생(姜甲生, 1864 ~ 1957. 4. 6) 사이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오영화는 대정군 유향소(留鄕所)의 별감(別監)을 지냈다. 그는 1918년 10월 7일 좌면 도순리(현 [[서귀포시]] [[도순동]])에 살던 이종창(李宗昌) 등이 하원리로 들어와 하원리 주민들에게 [[법정사항일운동]]에 참여할 것을 독려하자, 이웃 주민인 양봉(梁鳳) 등과 함께 가담하였다. 그를 비롯한 사람들은 일제히 [[화승총]]과 [[곤봉]] 등을 휴대하고 승려 [[강창규(독립운동가)|강창규]]의 지휘 아래 전선과 전신주를 절단하였으며, 중문면에 있던 경찰관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인을 구타하였다. 얼마 뒤 이로 인해 체포되었고, 그해 11월 27일 65명의 동지들과 함께 기소되어 목포형무소에 구금되었다. 그러다가 1919년 2월 4일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벌금 30엔을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704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46680&actionType=det&flag=4&search_region=|선고받았다]]. 이때 벌금을 완납할 수 없을 시에는 30일간 노역장에 유치한다는 조항이 걸려 있었는데, 그는 벌금을 납부치 않아 결국 노역장에 유치되었다. 유치 기간이 끝난 뒤에는 은거하다가 1938년 6월 7일 별세하였다. 2018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을 추서받았다.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군위 오씨]][[분류:서귀포시 출신 인물]][[분류:1896년 출생]][[분류:1938년 사망]][[분류:대통령표창(독립유공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