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몽골계 민족)] [include(틀:몽골의 역사/중세)] [include(틀:명사)] {{{#!wiki style="margin:0 0 1em 1em;float:right;font-size:.95em;text-align:center;width:450px;max-width:100%;min-width:45%;" [[파일:북로(오이라트와 타타르)의 영역 지도.png|width=100%]]{{{#!wiki style="margin:0 0 5px 0;" {{{#a021cc ■}}} {{{-1 '''15세기경 오이라트의 판도'''}}}[br]{{{#0030a1 ■}}} {{{-1 16세기경 [[몽골]]의 판도}}}}}}}}} [목차] [clearfix] == 개요 == '''오이라트'''(Ойрад, Oirats) 또는 '''두르븡 오이라트'''(Дөрвөн Ойрад, Dörben Oirad)[* 몽골어 'н'은 단어 앞에 나오면 'ㄴ'으로 발음되지만 뒤에 나오면 'ㅇ'에 가깝게 발음된다.]는 [[몽골]] 북부의 훕스굴 호수(Хөвсгөл нуур) 일대에서 기원하여 서북 지역으로 세력을 넓힌 '''초로스''', '''도르베트''', '''토르구트''', '''호쇼트''' 부족의 연맹체를 말한다. [[한자문화권]]에선 달달(達達)이나 달단(韃靼) 등으로 표기한 기록이 있다.[* '타타르'의 음역어로 보인다.] == 계통 == 본래 오이라트(Oirad)는 삼림을 중심으로 한 채집경제를 영위하던 부족들의 집단으로 그 이름 역시 [[몽골어]]로 '''숲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였다. 한자 병음은 '''와라'''나 '''와라부'''였다. 이들은 점차 규모가 커지며 채집경제에서 유목경제로 전환했으나, 그 시기는 [[칭기즈 칸]]이 몽골 초원을 통일할 무렵이었으며, 오이라트는 이때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들은 칭기즈 칸이 몽골을 통일하던 막바지에 칸에게 항복하면서 [[몽골 제국]]에 편입되었다. 오이라트를 몽골계라고 통칭하나 [[일 칸국]]의 재상이었던 라시드 앗 딘의 《집사》(集史)에서는 몽골화한 [[튀르크]]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언어학적으로 [[몽골어족]]이기에 엄밀히 말하면 튀르크화된 몽골족이라고 봐야 한다. 종족 계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이지만 문제는 《집사》에서 튀르크의 정의가 불명확하다는 것이다. 중앙아시아에 사는 튀르크인이었는지, 몽골 서부의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를 위시한 튀르크계 유목민족이었는지는 현재 확정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언어는 몽골어의 방언에 속하는 오이라트어이다. [[알타이]] 산맥 동쪽이라는 절묘한 위치 덕에 동아시아사에 중요한 변수가 된 유목민족들이고, 아이러니하게도 넓은 의미에서는 몽골계 유목민 최후의 세력이면서도 역사적으로는 몽골 최대의 숙적이 되었다. 때문에 북원의 몽골인들은 이들을 '''카리 다이순'''(qari daisun)이라 불렀는데, 직역하면 '''외적'''(外敵)이었다. 즉, 몽골인들은 오이라트인들을 동족으로 보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는 [[여진족]]의 건주여진과 해서여진의 관계와 비슷하다.[* 둘 다 광의로는 여진족에 속하지만, 해서여진은 여진 통일 전까지 건주여진 최대의 적이었다.] 한편 세조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에 반기를 들어 [[몽골 고원]]에서 독자적인 반란 세력을 구축했던 [[오고타이 칸국]]의 [[카이두]]가 오이라트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위치부터가 오고타이 칸국의 위치와 겹치기 때문이다. 오이라트 가운데 일부는 [[훌라구]]가 [[페르시아]](이란)에 세운 나라인 [[일 칸국]]의 군대에 [[용병]]으로 복무했는데, [[1281년]] 10월 29일 [[시리아]] 서부 홈스에서 벌어진 제2차 홈스 전투에서 [[일 칸국]] 군대에 포함된 오이라트 부대가 [[이집트]] [[맘루크 왕조]] 군대의 왼쪽 측면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힌 일이 있었다.[* 출처: 《신의전쟁》/ 도현신 지음/ 이다북스/ 303쪽] 오늘날 러시아 칼미키야 공화국의 '''칼미크인''', 몽골의 '''도르베트인''',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거주하는 '''토르구트인'''들이 오이라트의 직계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 역사 == === 오이라트 연맹 === 오이라트가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몽골보다 늦지만, 하필이면 몽골의 4칸국의 경계선에 진출했었기에 [[몽골 제국]] 시대에 중요한 변수로 떠올랐고, 주로 원나라의 반대편에 서서 싸웠으며, 태조 [[홍무제]]가 [[명나라]]를 세우고 북진하면서 북원, 즉 몽골의 세력이 약해지자 몽골에 대항해 싸웠다. 성조 [[영락제]]의 5차에 걸친 북벌이 있었으나 오이라트는 도망쳐서 무사할 수 있었고, 영락제 사후 [[몽골 고원]]을 제패했다. [[1449년]] 오이라트의 군주였던 [[에센 타이시]]는 [[토목의 변]]을 일으켜 영종 [[정통제]]를 부획하면서 악명을 떨쳤다. 자세한 점은 [[토목의 변]] 항목 참조. 이렇게 몽골과 맞서 싸우면서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 서쪽의 유목민족들을 흡수했다. [[케레이트]], [[나이만]], [[메르키트]]를 위시해 칭기즈 칸의 몽골 통일 전쟁 당시 가장 거세게 [[카마그 몽골]]에 대항했던 부족들로, 이들은 워낙 덩치가 큰지라 말이 오이라트지, 실제로는 흡수된 부족 출신들이 원 오이라트계보다 훨신 많아졌다. 즉 이즈음에는 오이라트를 중심으로 서몽골의 유목부족들이 뭉쳤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오이라트의 최대 부족 순위는 준가르와 토르구트부터 나이만, 케레이트 계열이 되었다. 오늘날 [[알타이인]]의 기원이 되는 원 오이라트계 부족은 쩌리로 전락했다. 이렇게 세력을 키우고 있었던 에센 타이시는 당시 몽골의 카안(대칸)이자 매부였던 타이슨 카안에게 누이의 아들, 즉 외조카를 후계자로 정할 것을 요구했지만 당시 에센의 오이라트 세력을 두려워한 타이슨 카안은 에센의 요구를 거절했다. 분노한 에센은 타이슨 카안과 싸워 그를 패사시키고, 오이라트 여자와 혼인한 자를 제외한 칭기즈 칸의 [[황금씨족]] 전부를 학살했다. 당장, 훗날 [[다얀 칸]]이 되는 보르지긴 바트뭉흐가 살아남은 이유가 오이라트의 혈통을 가지고 있어서였다. 이때 칭기즈 칸 후손들이 가지고 있었던 기록과 문서 및 족보까지 소실되고 말았다. 그 다음 [[1453년]], 에센은 직접 대칸(카안)의 지위에 올라 연호를 '첨원'이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칭기즈 칸의 후손인 황금씨족만이 카안이 될 수 있다는 정통성을 깬 무리수를 둔 데다가 몽골 출신의 보르지긴 오복 키야트 황족들을 학살한 것 때문에 몽골인들이 좋게 볼 리가 없는지라 카안에 오른 지 2년 만인 [[1455년]]에 그의 자리를 노리던 부하 족장인 지원(知院) 알라크(Alag, 阿剌)에게 살해당했다. 오이라트 역시 에센의 시해 이후 혼란에 빠지고 약화되어 몽골 부족들의 공격을 받아 서쪽 자신들의 본거지로 후퇴했다. 이 후유증으로 몽골 고원은 동쪽의 몽골과 서쪽의 오이라트로 분열했다. 몽골도 이후 [[차하르]]와 [[할하]]로 분열했다. 그 할하도 할하 좌익, 할하 우익으로 나누어졌다. 현재 외몽골은 할하부 중심이고, 중화인민공화국령 내몽골은 차하르부 거주지이다. 몽골과 중국의 기록에서는 몽골에게 수시로 털린다고 나와 있으나 오이라트는 16세기 초반 [[알탄 칸]][* 알탄 칸은 몽골의 영웅 다얀 칸의 손자였지만 몽골의 대칸은 아니었다. 알탄 칸은 몽골 6부 중 투메드부의 칸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러 차례 명나라를 침공하고('''북로남왜''' 중의 '''북로'''), [[1550년]]에는 북경을 포위 공격하는 '''[[경술의 변]]'''을 일으키는 등 그 명성과 영향력이 몽골 전 부족에 퍼졌다. 그래서 당시 몽골의 대칸이었던 다라이손 구덴 칸은 알탄 칸에게 '게게엔 칸'이라는 직위를 주어 타협할 수 밖에 없었다. 결과적으로 다라이손 구덴 칸은 차하르로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으며, 대칸의 권력은 점차 쇠락하기 시작했다.]의 시대까지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을 유지했고, 이슬람측 기록에서는 [[모굴리스탄 칸국]]과 카자흐족을 수시로 털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 탓에 모굴리스탄 칸국은 북쪽의 준가르 분지를 상실했고, 준가르 분지는 오이라트족의 새로운 본거지가 되었지만, 알탄 칸의 등장으로 오이라트는 몽골 고원을 결국 상실하고 몽골에 복속되었다. 알탄 칸의 시대에는 [[티베트 불교]]가 오이라트를 포함한 전 몽골에 퍼져 오이라트도 티베트 불교를 받아들였고, 이것은 몽골 고원 유목민들이 티베트의 내정에 개입하는 시초가 되었다. 오이라트나 몽골 양자에게 티베트 불교가 중요해져 [[달라이 라마]]의 상징성이 높아졌다. 오이라트는 그전에는 이슬람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추정된다. 실제로 14세기 말 오이라트 수령의 이름부터 마흐무드였다. 알탄 칸의 치세 이후 몽골이 티베트 불교를 밀자 오이라트계 준가르부도 이에 영향을 받아 결국 티베트를 드나들게 되었고, 티베트 불교로 집단 개종했다. 알탄 칸 치세 이전에 이슬람화했던 오이라트 부족의 무슬림들은 대개 텡그리 신앙 전통이 강한 무늬만 무슬림이었던 관계로 티베트 불교로 배교하거나 [[튀르크]]계인 [[위구르]]나 [[카자흐]]에 섞였으리라 추정된다.[* 카자흐인들 역시 러시아 제국의 지배 이후 [[타타르인]] 상인들과 접촉하기 전에는 이슬람에 대해 매우 단편적인 지식만 가졌었으며, 제사와 결혼을 전부 토속신앙 관습대로 진행했었다.] === [[준가르]] === 1600년대 초반부터 [[중가리아]]에서 오이라트는 부활하기 시작하여 일시적으로나마 카자흐스탄 북쪽을 거의 점령하고,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의 국가들을 수시로 털고 다녔으며, 심지어 카스피해 북쪽까지 원정했고, [[1623년]] 몽골의 할하부를 격파하여 다시 완전한 독립에 성공했다. 그 직후 내분을 겪어 케레이트 칸국의 후예인 '''토르구트부'''가 서쪽으로 이주해 카스피해 북부의 [[노가이 칸국]]를 멸망시키고, 그곳을 중심으로 삼아 지금의 '''칼미크'''가 되었다. 이는 이웃 튀르크계 부족들이 부르던 호칭을 받아들인 것으로, 본래 준가르 일대의 오이라트인은 경멸스럽다고 거부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남은 오이라트의 부족들 중 '''호쇼트부'''는 티베트 내전에 개입한 후 티베트 방면으로 남진해 떨어져 나갔다. [[1640년]] [[만주족]]의 [[청나라]]가 성장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몽골과 화의한 후 '''준가르부'''를 중심으로 통합하여 최후의 유목제국이라고 불리는 '''준가르 칸국'''을 세웠다. 이후 준가르의 흥망성쇠에 관해서는 [[준가르]] 항목 참조. [[예니세이 강]]에 살던 [[키르기즈]]족 중 일부가 현재의 키르기즈스탄에 거주하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준가르와 러시아 사이의 협정 때문이었다. 그리고 남은 키르기즈족은 [[하카스인]]이 되었다. 준가르가 청나라와 격렬한 공방전을 벌일 때, 서쪽으로 이주한 토르구트부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코사크]]와 비슷한 대우를 받았고,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오이라트를 지칭하던 명칭을 받아들여 '칼미크'라고 칭했다. 그들은 유럽에 있었던 유일한 불교 민족으로서 러시아와 함께 이웃 이슬람계 국가들과 싸웠으나, 대제 [[예카테리나 2세]]가 이들을 토사구팽했다. 예카테리나 대제는 [[칼미크인]]들이 거주하는 [[칼미키야 공화국|칼미크 칸국]]이 비옥한 토지에 자리잡은 것을 보고받은 후 [[독일계 러시아인|독일계 이주민]]과 코사크들을 데려와 식민시켰고, 칼미크인들이 왜 자신들의 목초지를 남에게 주냐고 항의를 하면 목초지는 안 돌려주고, 대신 병역만 늘려 생계를 더 어렵게 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이에 생존에 위협을 느낀 칼미크족은 준가르가 멸망하여 빈 땅이 된 준가르 분지로의 귀환을 결정하여 [[1771년]] 270,000여 명의 칼미크 중 170,000여 명이 볼가 강을 건너 귀환을 시작했다. 당연히 러시아 정부는 경악했고, [[예카테리나 2세]]의 지시로 러시아, 카자흐, 키르기즈가 칼미크의 귀환을 막으면서 서로 충돌하여 칼미크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었다. 그렇게 갖은 시련을 겪으며 6개월 만에 청나라의 서부 국경으로의 진입에 성공했으나 남은 인원은 귀환 시작시의 절반도 안 되는 80,000여 명에 불과했고, 그중 10,000여 명이 급격한 포식과 전염병으로 죽어 70,000여 명만이 생존에 성공했다. 그 이전 오이라트의 인구가 준가르 600,000명, 칼미크 270,000명이었으나 이후 청군에 의한 준가르 대학살과 토르구트, 즉 칼미크의 귀환 동안에 벌어진 전쟁과 기아로 인해 칼미크를 중심으로 고작 200,000명에서 250,000명만이 생존하게 되었다. === 근대 === 그 후 준가르 분지에서는 토르구트부(칼미크)를 중심으로 청나라에 순응하는 몽골계 민족으로서 살아가게 되었고, 러시아에서는 [[코사크]]에 편입되어 직접 통치의 대상이 되었으나 근대사의 소용돌이로 그 사람들은 또 다시 크나큰 시련을 겪게 되었다. [[1864년]] 신장의 무슬림 봉기를 시작으로 당시 친청파 주둔군 중 하나였던 오이라트인들은 후이족과 위구르인 무슬림 봉기군의 공격으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신해혁명]]으로 인한 청나라의 멸망과 외몽골의 독립 당시, 몽골에 반발하여 일부는 싸우고 일부는 순응하는 등 시련을 겪은 결과, 몽골에 밀리지 않았던 오이라트의 인구는 몽골인들과 위구르인들에게 압도당하게 되었다. 그나마 신강이 반독립된 상태였을 때는 나름대로 군벌 세력 중 하나로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제2차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최종적으로 승리하고, 신강으로 진격하자 오이라트인들은 여타 신강의 세력과 함께 항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공산주의식 개혁으로 사회는 또다시 해체되었다. 그 와중에 일부는 몽골로 도주했고, 몽골에서는 또 일부가 몽골인들에게 반발하여 신강으로 도주하는 등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러시아에서는 상술했던 것처럼 [[칼미크인]]들에게 무리한 군역을 강요해서 유목을 방해한 후, 칼미크인의 영토에 [[코사크]]와 [[독일인]] 농부들을 정착시키는 방법으로 이들의 영토를 크게 축소시켰다. [[푸가초프]]가 봉기하자 많은 칼미크인들이 참여했다가 [[수보로프]] 장군에게 진압당했고, 결국 칼미크인은 힘없는 소수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참고로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시켰던 [[블라디미르 레닌]]의 할머니가 칼미크인이었다고 한다. 로마노프 황조 제정 러시아가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으로 멸망하고, 격렬한 [[적백내전]]이 일어나자 칼미크인들은 또다시 시련의 시기를 겪게 되었다. 제정파인 백군의 편을 들려고 했었던 칼미크는 볼셰비키파 적군의 재빠른 진격으로 대다수가 적군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적군은 칼미크 자치구를 만들어 주면서 칼미크인들을 대우하려는 듯 했으나 실제로는 동화정책의 연속이었고, 레닌 사후 [[스탈린]]이 집권하자 이 사람들은 또다시 고난의 역사를 겪게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부터가 과거 칼미크인들이 정복했던 [[노가이 칸국]]의 영역권에 있었던 도시였다. 근본적으론 유목민족들을 감시하고자 세워진 도시였지만 말이다.] 이후, 스탈린은 [[칼미크인]]을 강제로 이주시켜 그 과정 중에 칼미크인은 절반에 가까운 희생자를 냈다. [[솔제니친]]의 기록을 보면 칼미크인들은 여타 민족과 달리 적응에 실패하여 무력하게 죽어갈 뿐이었다. 이렇게 고난의 시기를 겪은 칼미크는 스탈린 사후 귀환이 허용되었으나 계속된 동화정책으로 자신들의 언어를 잃어가다가 1990년대 소비에트 연방이 붕괴한 후에 몽골 및 티베트와 연락해 자신들의 문화를 복원하려고 했다. 이는 몽골 민족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키르산 일륨지노프 초대 칼미키아 공화국 대통령의 영향으로, 덕분에 칼미키아의 불교세는 부랴트는 물론이고, 투바보다도 높다. 현재 남은 오이라트인의 수는 630,000명으로써 몽골과 러시아 [[칼미키아]] 등지에 200,000명과 180,000명씩, 중화인민공화국에 250,000명이 거주하고 있다. 몽골의 오이라트인들은 서부 호브드 주와 오브스 주에 집중적으로 거주하고 있으며, 오브스 주의 경우 인구의 60%가 오이라트계로 집계되고 있다. 몽골의 독재자 [[욤자깅 체뎅발]]이 오브스 주에 거주하는 오이라트계 도르베트[* 에센 타이시가 이끌었던 오이라트 4부족 연맹 중 하나였다.] 부족 출신이었다! 현재는 몽골 칭기스칸 대학교의 총장 카바수렌이 오이라트인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의 오이라트인들은 주로 간쑤성과 칭하이성에 거주하고 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신장 지역]] 북부에도 오이라트인들이 거주하고 있다. == 오이라트 민족의 기원 == 오이라트는 원나라의 멸망 이후 몽골 민족에서 분화한 서부의 몽골계 민족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소수설로는 튀르크계라는 설도 있다.[* 일부 역덕이나 튀르크권 네티즌들이 오이라트가 몽골계가 아닌 튀르크계라고 주장하나 이는 정설이 아니며, 학계에서는 대부분 몽골계 민족으로 본다. 즉, 위키피디아나 브리태니커 백과, 그리고 중앙아시아사의 권위자인 서울대 김호동 교수도 몽골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라시드 앗 딘이 쓴 《집사》<부족지>에 나오는 내용을 근거로 두고 있다. <부족지>에서는 오이라트를 '예전에는 몽골족이 아니었으나, 14세기인 지금은 몽골족이 된 부족'으로 서술하고 있다.] 《[[원조비사]]》에서 오이라트인들을 '''숲의 민족'''(Oy-yin irgen)이라고 지칭하여 [[카마그 몽골]]인과 구별했으며,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오이라트의 조상인 케레이트, 나이만, 타타르, 잘라이르는 현재는 몽골인이라고 불리지만, 과거에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가진 튀르크계 유목집단들이었다.[* 나이만의 옛 영역에 사는 도르베트의 경우, 튀르크계 [[위구르 제국|고대 위구르족]]와 동일한 기원 설화를 가지고 있다.] 17세기의 몽골 역사서인 《[[황금사|알탄 톱치]]》와 《몽골원류》에서도 오이라트를 몽골의 선조인 알란 코아의 후예로 보지 않고 있으며, 몽골 역사서 《알탄 칸전》(Erdeni Tunumal Neretü Sudur)에서도 몽골과 오이라트를 각각 '40투멘 몽골'(Döcin tümen Mongγol)과 '오이라드 민족'(Oyirad-un Irgen)으로 구별하고 있다. [[1623년]] 몽골과 오이라트 간의 전투를 기록한 17세기의 오이라트 사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80,000명의 몽골군과 그 동맹군은 외인 4오이라드(Qari Dörbön Oyirad)를 공격했다..(중략)..이렇게 4오이라드는 몽골을 격파했다. 준가르의 통치자 갈단은 [[1691년]] 러시아의 차르에게 >'''몽골은 러시아와 준가르의 적''' 이라는 식의 서신을 보냈으며, 그의 조카인 갈단 체렝은 [[외몽골|할하 몽골]]에 보내는 서신에서 >"오이라트와 할하는 원래 한 곳에 살았고, 같은 종교를 믿었다." 라고 언급하면서 청나라를 상대로 동맹을 맺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민족이라는 동류의식은 전혀 내세우지 않았다. (출처 : 이주엽, 《몽골제국의 후예들》, 책과 함께, 2020, p.264-267.) 그러나 이는 계보도가 아닌 DNA에 따른 순수 오이라트인의 기원을 기준으로 삼은 연구였다. 위에 언급된 책의 저자도 추후 [[https://akaroot.co.kr/bbs/board.php?bo_table=b0501&wr_id=128&sca=%EB%85%BC%EB%AC%B8%EB%B2%88%EC%97%AD|논문]]에서 그렇게 지적한 바 있다. 좀 더 복잡하게 들어가자면, 칭기스 칸과 그의 부인인 [[보르테 우진]] 사이에는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 [[툴루이]]의 네 아들이 있었는데 13세기 오이라트는 그들의 자손 모두와 혼인을 맺었다. 특히 툴루이의 네 아들인 [[몽케]], [[쿠빌라이]], [[훌레구]], [[아리크부카]]와 모두 인척이었다. 《집사》 <부족지>에 의하면 오이라트 연맹의 왕 중 한 명인 [[쿠투카 베키]]에게는 두 아들인 이날치와 토렐치, 그리고 딸 오굴 카이미슈가 있었다. 칭기스 칸은 보르테 푸진과의 사이에서 낳은 둘째 딸 보르지긴 치체겐을 토렐치에게 시집보냈고, 그녀는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또한 토렐치의 딸들은 모두 칭기스 칸의 황금씨족에게 시집갔다. 이렇게 13세기 내내 오이라트는 대대로 칭기스 칸 일족과 혼인관계를 맺었다.[* 가장 큰 이유는 그 거주지가 전략상의 요충지였기 때문이었다. 즉 오이라트는 툴루이, 오고타이, 차가타이, 주치의 봉지와 면했다.] 그렇기에 그들이 서몽골로 불리게 된 15세기에는 이미 몽골계와 오이라트계가 혼합되어 있었다고 봐도 된다. == 매체 == 무협작가 [[양우생]]의 작품인 《[[평종협영록]]》에 오이라트가 등장한다. [[토목의 변]]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에센 타이시]]가 중요인물로 등장한다. [각주] [[분류:몽골의 역사]] [[분류:동아시아의 민족]] [[분류:명나라의 조공국]] [[분류:중가리아의 역사]] [[분류:몽골의 민족]] [[분류:몽골계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