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상위 문서, top1=오아시스(밴드))] [include(틀:오아시스(밴드))] [목차] == 개요 == 영국의 브릿팝 밴드 [[../|오아시스]]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 오아시스의 전신, 《The Rain》 == 오아시스는 더 레인이란 밴드에서 출발하였다.[* 비틀즈의 곡인 <[[Rain(비틀즈)|Rain]]>에서 따왔다고 한다.] 보컬에 크리스 휴턴, 기타에 [[폴 본헤드 아서스]], 베이스에 [[폴 귁시 맥기건]], 드럼에 [[토니 맥캐롤]]이 창립멤버이다. 1991년 기타리스트였던 본헤드가 당시 보컬이었던 크리스 휴턴 대신 자신의 학교 친구였던 [[리암 갤러거]]를 밴드의 보컬로 영입하고, 리암의 제안으로 밴드의 이름을 [[오아시스]]로 바꾸게 되었다.[* 이 이름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상당히 많은데, 당시 갤러거 형제의 침실에 붙어 있던 인디 록 밴드 [[인스파이럴 카페츠]](유명한 매드체스터 밴드로 노엘이 로디(락밴드의 지방공연 매니저)로 일했던 밴드라고 한다. 포스터에는 개최지 중 하나였던 스윈든의 '''오아시스''' 레저 센터가 기재되어 있었다고.)의 투어 포스터에서 유래했다는 설과, 갤러거 형제의 우상 비틀즈가 맨체스터에서 처음으로 공연했던 클럽의 이름이 오아시스여서 그 곳에서 따왔다는 설이 있다. 갤러거 형제의 말에 따르면 그 당시 오아시스라는 이름은 가게 이름 같은 곳에 매우 흔하게 쓰였다고 한다. 그래서 정확히 어디에서 따왔는지는 기억이 안난다고. 다만 사막에 혼자 있는 오아시스처럼 자신들도 홀로 서 있어서 오아시스라고 지었다는 발언을 한 적도 있었기에 어디서 따왔다기보단 뜻이 마음에 들어서 선택했을 수도 있다.] '''이렇게 오아시스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 데뷔 전(1991년 - 1993년) == === [[노엘 갤러거|노엘]]의 밴드 가입 === 한편 리암이 밴드에 가입하기 전부터 [[노엘 갤러거]]는 인스파이럴 카펫츠에서 로드 매니저로 일하고 있었다.[* 원래 보컬을 하고 싶어 오디션을 봤다가 떨어졌다고 한다.] 그러던 중 오아시스는 1991년 8월 맨체스터의 보드워크라는 클럽에서 첫 공연을 가지게 되는데, 그 당시 투어에 동행 중이었던 [[노엘 갤러거]]는 리암이 밴드에서 공연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완전 악마의 보컬이겠구만-- 동생의 공연을 보러 왔고, 동생이 --사고치는 것 이외에 다른--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게 된다. 형이 평소에 작곡을 하고, 기타를 치는 걸 알고 있던 리암은 노엘에게 밴드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지만, 노엘은 매니저 일을 계속 하겠다며 그 제안을 거절한다. 그러나 --운 좋게도-- 노엘이 프로 답지 않다는 이유로 매니저 역할에서 해고 되었고, 리암은 노엘에게 이왕 할 일도 없는데, 자기 연습하는거나 보러오라고 제안한다. 리암은 노엘에게 '형이 썼다는 곡 한번 연주해보자' 제안했고, 노엘은 그 경험을 잊지 못해 -- 밴드의 모든 지휘권과 작곡을 넘겨 받는다는 조건으로--[* 사실 이건 잘못 알려진 소문이라고 한다. 2009년 5월 Q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노엘은 "그건 잘못 알려진 소문이다. 물론 초창기에는 내가 일부러 그런 식으로 인터뷰하기는 했었다" 라고 말한바 있다.][* 리암이 말하기를 --네 발로 기어 들어오며-- '''노엘이 밴드에 가입할 때 거의 리암에게 빌다시피 했다고 한다.'''][* 사실 이전까지 노엘은 다른 밴드에서 기타리프를 조율하는 등의 잡일을 했다고. 이 시기엔 수입이 괜찮았는지 리암이 같이 밴드를 하자고 제안을 했으나 거절했다고. 그러나 해고당한 후 갈 곳 없어지자 리암한테 빌고 빌어서 밴드에 가입했다고 한다.]기타리스트로 밴드에 가입하게 되면서 초기 오아시스 라인업이 완성 되었다. === [[크리에이션 레코드]]사와의 계약 === [[파일:early oasis.jpg|width=full]] 이렇게 맴버가 꾸려지고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지만 1991~3년 사이에는 사실상 동네 펍이나 술집 등에서 가끔식 노래하면서 근근히 생활하는 무명밴드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밴드의 다큐멘터리 영화 슈퍼소닉에서 "잡지에는 우리 이야기 따위 한 줄도 실리지 않았어. 심지어 구리단 말까지!" 라고 언급하는 걸 보면 정말 우리나라 학교 동아리 수준의 밴드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를 회상하며 갤러거 형제의 어머니 페기 갤러거가 말하길, 매일같이 밴드 관련으로 취직이 됐네 안 됐네 가지고 다투기도 하면서도 속으로는 걱정을 많이 했다고. ] 이렇게 점점 연습을 하며 실력을 키워가던 1993년 5월의 어느날, 같이 녹음실을 쓰던 밴드 시스터 러버스(Sister Lovers)가 글로코스로 공연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시스터 러버스의 데비가 오아시스에게 같이 공연을 하러 가자고 제안했고, 오아시스는 시스터 러버스를 따라 처음으로 타지 공연을 하게 된다. 문제는 계획에 없던 동행이었던 터라 오아시스에게 배정된 공연시간이 없었다. 뭐 당시에는 초청밴드 형식으로 공연 중간중간에 다른 밴드들이 올라와 공연하는 경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당연히 공연관계자는 오아시스가 공연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지만, 시스터 러버스가 ''''오아시스가 공연 안하면 우리도 안해'''' 라고 배째자는 식으로 나온 덕분에 결국 공연을 하게 된다. 그리고 오아시스가 공연을 하던 그 자리엔 데비의 전 남친, 바로 당시 최고의 인디 레이블이였던 [[크리에이션 레코드]]의 [[앨런 맥기]]가 있었다. 어디 전 여친의 공연도 볼 겸 여동생과 함께 놀러 왔다가 오아시스 공연을 보게 되었고 공연이 끝난 '''그날 밤에 바로 오아시스와 계약하게 된다'''. 앨런 맥기가 그 때를 회상하면서 말하길, 첫 번째 곡을 들었을 땐 한 곡 더 들어보고 생각해보려 했으나, 두 번째 곡을 들었을땐 '계약 해야겠다.' 세 번째 곡[* 세번째 곡이 바로 오아시스의 대표곡중 하나인 [[Live Forever]]이다.]을 듣고 나서는 ''''진짜 해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이후 [[U2]]의 레코드사였던 마더 레코드에서 크리에이션보다 더 나은 계약 조건과 계약금을 제시했으나, 오아시스는 당시 앨런 맥기가 자신들을 굳게 믿고 있으며, 자신들을 정말로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푼돈에 크리에이션과 계약했다고 한다. 몇몇 사람들이 오아시스가 그 공연장에 찾아가서 행패를 부린 끝에 공연을 따냈다던가, 사람들을 협박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무근.[* 크리에이션 레코드 소속 밴드인 18 wheeler의 앨런 호크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은 그런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아무튼, 이후 오아시스의 싱글과 정규 앨범이 대성공을 거두어, 레이블도 구사일생한다. 그러나 정규 3집 발매 이후 밴드는 Big Brother라는 자체 레이블을 설립했고, 결국 [[크리에이션 레코드]]는 문을 닫는다. 자세한 것은 해당 항목 참조.[* 처음 계약 당시 노엘은 써놓은 곡이 얼마 없음에도 불구하고 곡이 무척 많은 척을 했고, 회사 측은 '''그 악명높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Loveless]]'''를 발매하느라 재정난에 허덕였음에도 돈이 무척 많은 척을 했다. --불꽃튀는 연기대결-- 노엘은 계약을 하고 난 뒤 기차를 타면서 "지금부터 미친듯이 곡을 써야겠다."라 생각했다고. 물론 노엘은 많은 곡을 완성하고 회사는 많은 돈을 벌게 되었으니 윈윈.] 이렇게 오아시스는 [[크리에이션 레코드]] 아래에서 열심히 데뷔앨범 준비를 하게 된다. [youtube(2Nw61DijiKU)] 1993년 8월 11일, 오아시스는 영국 최고의 음악 라디오인 '''BBC RADIO 1'''의 전파를 타게 된다. 그 이유는 새로 취임한 매튜 메디스 PD가 경쾌하고 낙관적인 영국음악, 즉 [[브릿팝]] 음악들을 소개하게 되었는데, 이때 [[오아시스]]도 운 좋게 전파를 타게 된 것. 1993년 12월, 그들은 첫번째 싱글인 bring it down on을 녹음하러 리버풀에 있는 녹음실에 방문한다. 그렇게 파이팅 넘치게 녹음을 시작했으나, 예상치 못한 문제에 직면한다. 다름 아닌 그 당시 '''드러머였던 토니 맥캐롤이 제대로 박자를 맞추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녹음이 중단된 상황에서 본헤드와 토니가 즉흥적으로 잼을 했고, 노엘은 거기에 영감을 받아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었다. 이후 밥을 먹고나서 다시 Bring it on down의 녹음을 재개하려고 했는데, 당시 오아시스의 작업을 도와주던 리얼 피플의 멤버가 노엘이 흥얼거린 새로운 멜로디를 곡으로 써볼 것을 제안했고, 구석에서 멤버들이 밥먹고 정리하는동안--뭔갈 휘갈기며-- 새로운 곡을 만들었는데, 바로 그 곡이 오아시스의 명곡중 하나로 손꼽히는 '''[[Supersonic(오아시스)|Supersonic]]'''[* 다만 이때 기본적인 기타리프 정도는 가지고 있었던 걸로 추정된다.]이였다. 이후 곧바로 녹음을 진행했고, 그 데모 버전이 그대로 앨범으로 쓰였다.[* 이후 Definitely Maybe 10주년 다큐에서 노엘은 "그 버전은 존X 훌륭해, 그러니... 천재적인 작품에 뭐하러 또 손을 대겠어"라고 발언하였다.] [youtube(81Z-WRuQe2w)] 1994년 3월 18일, Live The Word라는 쇼에 출연해 곧 발매될 곡 [[Supersonic(오아시스)|Supersonic]]을 불렀다. 오아시스의 TV 데뷔이다. 리암이 데뷔 극초반기에는 마이크를 잡고(!!!) 노래를 불렀다는것을 알 수 있다. == 초창기 (1993년 - 1994년) == === 혜성 같은 등장 === [youtube(BJKpUH2kJQg)] 그리고 4월 11일, 첫 싱글 [[Supersonic(오아시스)|Supersonic]]을 발매하고, '''오아시스는 공식적으로 데뷔'''한다. 슈퍼소닉은 UK차트 31위까지 들어가며, 록밴드의 첫 싱글이란점을 감안하면 매우 높은 순위에 들어간다. 이후 이 기록은 [[오아시스]]의 싱글중 가장 낮은 순위지만, 꾸준하게 팔려 현재 오아시스의 싱글중 13번째로 많이 판 싱글이 되고, 이후 오아시스 다큐멘터리의 이름으로 쓰이게 된다. [youtube(3FpNw3286y8)] 6월 13일엔 그다음 싱글인 [[Shakermaker]]를 발매하고 싱글 차트에서 11위에 오르게 된다, 이 싱글은 코카콜라 광고곡을 표절한 곡이었고 이로 인해 오아시스는 호주달러 50만 달러, 한화 약 5억을 물게 된다. ~~노엘: 자 이제부터 펩시를 마시자.~~[* 실제로 공연에서 즉홍적으로 이렇게 가사를 바꿔서 불렀다.] [youtube(n_Zhk-U8Jaw)] 6월 26일, 이렇게 연달아 싱글차트에서 선방하고 있던 오아시스는 [[글라스톤베리]] 페스티벌에 참가해 약 40분 동안 공연을 한다.[* 데뷔한지 두달 조금 지난 락밴드가 최고의 락 페스티벌이라 불리는 [[글라스톤베리]]에 참가한것은 상당히 대단한 일이다.] 이 때 이미 발매한 두 싱글과 Live Forever 등 아직 발매하지 않은 1집에 수록될 곡들도 불렀다. [youtube(Ud88GCgwMZ0)] 이전 싱글이었던 Supersonic과 shakermaker이 각각 싱글차트 31위, 11위에 오르는 등, 꾸준히 좋은 차트 성적을 기록한 오아시스는 8월 8일,'''[[Live Forever]]'''를 발매한다. 이후 영국차트에서 2주 연속으로 차트 TOP 10에 오르는 등 상당한 인기를 얻는다. 이 곡은 노엘 갤러거가 [[롤링 스톤즈]]의 Shine A Light에서 영향을 받은 곡이라고 했으며, 오아시스의 곡들 중에서도 단연코'''최고의 명곡'''으로 뽑히는 곡이다. 대중성이나 킬러트랙이라면 대부분 2집 시절의 [[Wonderwall]]이나 [[Don't Look Back In Anger]]을 뽑지만, 이 곡의 아름답고 낙관적인 가사와 멜로디 때문에 대부분의 잡지나 평론가들은 이 곡을 당연하다는 듯이 최고로 뽑는다. 싱글로 4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 [[Definitely Maybe| 《Definitely Maybe》]] === ||<#000000> ''' Definitely Maybe의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NME/올해의 앨범(1990~1999))] ---- [include(틀:NME 선정 500대 명반 (1위~10위))] ---- [include(틀:NME 선정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음반)] ---- [include(틀: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연도=2020,순위=217)] ---- [Include(틀:어클레임드 뮤직 선정, 항목=올타임 명반,순위=111)] ---- [include(틀:100BEAT 선정 90년대 베스트 앨범, 순위=57)] ---- [include(틀:스핀 선정 1985 - 2014 300대 명반, 순위=160)] ---- [include(틀: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장)] ---- }}} || [[파일:23101303_125986271401777_1900228737320878080_n.jpg|width=full]] [[Supersonic(오아시스)|]], [[Shakermaker|]], [[Live Forever|]]는 각각 31위, 11위, 10위를 기록하는 등 싱글차트에서 꾸준히 좋은 성적을 거두던 오아시스는 1994년 8월 29일, 드디어 데뷔 앨범 [[Definitely Maybe]]를 발매하게 된다. 이 앨범은 발매 직후 신드롬을 일으키며 단숨에 영국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고, 일주일 만에 8만 6000장을 팔아치우며 당시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데뷔 앨범[* 이 기록은 2006년 [[악틱 몽키스]]의 1집에 의해 깨진다.]이란 타이틀을 얻게 된다. 미국에서도 초반엔 빌보드 200에서 랭크되지 못했으나 1995년 낮은 순위에서 시작해 58위까지 기록했다. 그 후에도 롱런해 미국에서 1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앨범에 대한 평단의 평은 이보다 좋을 수 없을 정도로 최고다. 올뮤직, Q, 롤링 스톤에서는 만점을 받았으며, NME에서도 9/10의 평가를 받는 등 명불허전 90년대 최고의 락 앨범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한 오아시스의 정규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와 함께 오아시스 최고 걸작이자 90년대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손꼽히며, '''락 음악 역사상 최고의 데뷔앨범을 논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앨범이다.'''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판매량 또한 우수하다. Definitely Maybe는 1994년 영국 앨범 차트 통산 판매량 순위에서 21위에 오르며 현재까지 영국에서 210만, 미국에선 100만, 전 세계적으로 1500만 장 이상이 팔렸다. [youtube(SaeLKhRnkhQ)] 첫 앨범 [[Definitely Maybe]] 발매 이후, 오아시스는 10월 10일에 1집 8번 트랙이자 통산 다섯 번째 싱글인 [[Cigarettes & Alcohol]]을 발표하게 된다. 가사에 술과 담배가 노골적으로 드러난 곡인데도 불구하고 싱글차트 7위를 기록한다. 이 곡이 히트하게 되면서 오아시스는 명실상부하게 인기 밴드로 떠올랐다. [[티렉스]]의 Get It On의 기타 리프를 따온 걸로도 유명한 곡. 실제로 1집 작업때 본헤드가 이거 표절 아니냐고 태클을 걸었지만, 노엘은 "우리가 티렉스를 유명하게 해줬잖아?"라며 신경쓰지 않았다. [youtube(bb6e2Brz9Nw)] 이렇듯 신인 밴드로선 최고의 한 해였지만 밴드 내부 사정은 마냥 좋지만은 않았다. 쉴 틈없는 라이브 공연과 녹음 스케줄, 방탕한 생활은 밴드를 점점 지치게 만들었고, 결국 1994년 9월 로스앤젤레스 공연에서 필로폰에 취한 리암이 미국 관중들에게 무례한 발언을 하고 노엘에게 탬버린을 던지는 일이 벌어졌다. [* 오아시스 멤버 전원이 공연 전에 코카인인줄 알고 빨았던 것이 알고보니 필로폰이었고, 다들 똑같이 맛이 가있던 상태였다.] 이 사건으로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노엘은 잠시 밴드를 그만두고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가 겨우 마음을 추스린 후 그해 10월에 밴드로 돌아온다.[* 이 때 노엘이 만든 노래가 바로 그 이다.] [youtube(EHfx9LXzxpw)] 12월 18일에는 1집에 수록되지 않은 스탠더 얼론 싱글 [[Whatever(오아시스)|Whatever]]를 발매하였다.[* 노엘이 이 곡은 [[Definitely Maybe|1집]]의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 판단하여 넣지 않았다.] 영국 싱글 차트에서 무려 3위로 진입하였으며 차트에서 총 50주동안 머물렀다. 이는 오아시스 모든 싱글들 중 최장 기록이다. 오아시스 특유의 낙관주의가 잘 나타나는 곡으로, 특히 일본과 한국에서 상당히 인기 있는 곡이며 한국에서는 삼성생명의 CF곡으로 쓰여 더 큰 유명해졌다. 총 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 전성기 (1995년 - 1997년) == === [[블러(밴드)|블러]]와의 [[브릿팝 전쟁]] === 오아시스는 이듬 해인 1995년 2월에 열린 1995브릿 어워드에서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신인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싱글상([[Live Forever]])’ 노미네이트 되었지만 '최고의 신인상'만을 수상한다. 이유는 당시 브릿팝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받던 [[Parklife]]를 발매한 [[블러(밴드)|블러]]가 ‘최고의 신인상’외에 나머지 3개의 상을 수상하고, 최고의 뮤직비디오상까지 받아 브릿어워드 4관왕을 차지하며 말 그대로 상들을 싹쓸이했다. 블러의 프론트맨인 [[데이먼 알반]]은 우승소감으로 '''"이 상은 오아시스랑 같이 탔어야 했었어요."'''라는 훈훈한 미담을 남기고, 이 후 데이먼은 이 말을 한 걸 평생 후회하게 된다.[* [[파일:external/66.media.tumblr.com/tumblr_m6lzxzhnfi1qal8hpo1_500.gif|width=500]]] [[파일:external/nme.assets.ipccdn.co.uk/1995BritpopNMESpread180815.jpg|width=500]] 그 뒤로 각종 미디어에서는 계속 블러와 오아시스를 엮기 시작한다. 사실 두 그룹은 결코 사이가 나쁘지 않았지만 브릿어워즈에서의 발언 이후 서로를 음악적 라이벌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 먼 훗날 블러의 다큐멘터리에서 알렉스가 말하길 "우리가 뭘하던 언제나 오아시스의 이름이 나왔다"라고 회상했다. [youtube(oxOjIj18I9E)][* Supersonic의 미국버전 뮤비와 Cigarettes & Alcohol의 뮤비를 짜집기한 영상이다. 이유는 원래 촬영하기로 한 날에 리암이 안와서 그랬다고 한다.] 1995년 4월 24일, 정규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7번째 트랙이자, 첫 선공개 싱글 [[Some Might Say]]를 선보이게 된다, 이 곡을 통해 오아시스는 처음으로 차트 1위를 경험해본다.Lock the Box에서 노엘은 이 곡이 자신들에게는 비틀스의 [[We Can Work It Out]]과 같은 곡이라면서, '오아시스를 정의하는 곡(defines what Oasis is)'이라고 했다. 이 무렵 드러머 토니 맥캐롤은 노엘과의 불화 끝에 밴드에서 퇴출된다. 이후 오아시스의 드러머는 [[앨런 화이트]]가 담당한다. [youtube(DrARl0dzd-0)] 그 이후 두 번째 싱글인 [[Roll With It]]을 통해 [[브릿팝 전쟁]]이 본격화 되었다. 블러의 싱글 '[[Country House]]'과 오아시스의 싱글 'Roll With It'이 같은 날 발매된 것. 블러가 이미 예정 됐던 자신들의 싱글 발매일을 오아시스와 싱글 발매일과 같은 날로 바꾸었고, 오아시스는 이에 격분한다.[* 그러나 블러의 기타리스트 [[그레이엄 콕슨]]은 2009년 블러의 다큐멘터리 필름에서 "아직도 누가 우리의 싱글 발매일을 다른 사람의 싱글 발매일과 겹치게 한 건지 몰라요." 라고 밝혔다. 블러 멤버들의 의사보다는 소속사와 [[NME]]의 입김이 있었다고 하며 '장단맞춰주기' 정도로 생각했던 블러의 리더 [[데이먼 알반]]이 승인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음악잡지 [[NME]]를 비롯한 여러 매체들은 본격적으로 브릿팝 전쟁을 들먹이며 이러한 사건을 보도 하였고, 그로 인해 사람들의 관심이 블러와 오아시스에게 쏠리게 된다. 두 싱글 발매 일주일 후, 싱글차트에서는 [[Country House]]가 27만 4천장을 팔아 1위, Roll With It이 21만 6천장을 팔아 2위에 랭크 되어 결국 블러의 승리로 끝났다. 여담으로 Roll With It은 현재까지 6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중이다. 이에 분노한 노엘은 [[데이먼 알반]]에게 '''에이즈에 걸려 뒈져버렸으면 좋겠다'''라는 발언을 한다. --그 뒤 바로 사과했다. 물론 에이즈 환자들만-- 또한 [[비틀즈]]의 [[Strawberry Fields Forever]]도 차트 2등을 했었다며 [[정신승리]]했다. 이렇게 2연패를 하게 된 오아시스는 브릿팝 전쟁에서 열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 이후 95년 9월 11일, 블러의 4집인 [[The Great Escape(음반)|The Great Escape]]가 발매 되고, 역시나 호평을 받으며 UK차트에 2주간 1위를 차지한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때 즈음 귁시가 신경쇠약으로 잠시 탈퇴했다.[* 물론 몇 주 뒤 돌아온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이 계속 일어나고, 복수의 칼을 갈며 오아시스는 3주 뒤, 2집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발매 하게 되는데...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What's The Story) Morning Glory?》]] === ||<#000000> '''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영국 내 앨범 판매량 순위)] ---- [include(틀: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연도=2012,순위=378,연도2=2020,순위2=157)] ---- ||<#FFFFFF,#1F2023><:>[[NME 선정 500대 명반|[[파일:NME500.jpg|width=70]]]]||<:><#FFFFFF,#1F2023>[[NME 선정 500대 명반|{{{#000000,#fff '''NME 선정 500대 명반'''}}}]][br]{{{+5 '''67위'''}}}|| ---- [include(틀:죽기 전에 꼭 들어야 할 앨범 1001장)] ---- [include(틀:로큰롤 명예의 전당 선정 200대 앨범, 순위=124)] ---- }}} || [[파일:external/www.aolcdn.com/2nd.jpg|width=full]] 1995년 10월 2일 발매된 오아시스의 2집 정규 앨범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는 '''브릿팝의 절정을 보여준 전설적인 앨범'''이며' '''발매 첫주에만 무려 36만장 이상이 판매'''되고 영국에서 무려 '''10주 동안 1위'''를 차지했으며, 현재까지 '''영국 내에서만 490만 장 이상'''의 판매량을 기록해 '''90년대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이자 '''역대 영국 앨범 판매량 순위에서 5위'''에 오른다.[* '''(What's The Story) Morning Glory?의 일주일 판매량이 The Great Escape의 한 달 판매량'''보다 높다.] 이렇게 전설적인 앨범인만큼 평론가들에게도 엄청난 호평을 받았는데, 올뮤직, 롤링스톤, Q, 뮤직하운드, 버진, 스푸트닉에서 10점 만점을 받았으며, 90년대 최고의 락 앨범을 뽑을 때 너바나의 [[Nevermind]], 라디오헤드의 [[OK Computer]] 와 같이 빠지지 않는 명반으로 손꼽힌다. 미국에선 초반에는 80위에도 들지 못하다가 롱런해 1996년 결국 4위까지 랭크 되었다. 또한 미국 내에서만 4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하고, 2018년까지 영국 490만 장. 전세계에서 27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한다. 오아시스의 가장 유명한 곡들인 Woderwall, Don't Look Back in Anger 등이 모두 이 앨범에 수록되어 있다. 갤러거 형제는 당시 '''노동 계급의 영웅(Working Class Hero)'''[* 그 덕분에 [[블러]]는 중산층 날라리 밴드라 불리며 서민들에게 미움을 사는 일이 빈번했다. 원래 영국자체가 산업화 시대부터 계급층을 나눠 차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처럼 단순히 돈을 많이 번다가 아니라 정말로 계층마다 갈등이 거의 우리나라 지역감정 수준이다. 거기다 서민층을 대표하는 [[노동당(영국)|노동당]]의 [[토니 블레어]]가 노엘 겔러거(특히 노엘은 공개적으로 노동당과 토니 블레어를 지지한 것으로 유명하다)의 지지를 받아냄으로써 이런 이미지가 더욱 강해졌다. 다만 블러의 프론트맨인 데이먼 알반도 노동당을 지지했으며 위에서 말한 parklife와 같이 중산층, 즉 미들클래스를 비꼬는 곡도 많이 발매했음에도 미움받은 거 보면 당시 브릿팝을 가지고 장난치던 언론들의 탓도 큰 듯 하다. 자세한 내용은 [[브릿팝]] 문서 참조]라는 별명을 얻으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한다. 이 앨범을 계기로 [[브릿팝 전쟁]]에서 완벽하게 승리하게 되면서, 오아시스의 독주가 시작된다. [* 브릿팝 전쟁 이후로 블러는 브릿팝에서 벗어나 인디적인 사운드를 보여주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Blur(음반)]]] [youtube(vU05Eksc_iM)] 당시 '영국에서는 거지도 오아시스 노래는 부를 줄 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10월 30일에 앨범의 세번째 트랙이자, 세 번째 싱글인 [[Wonderwall]]이 발매되었다. UK차트 2위를 기록했다. 이후 명실상부 오아시스 최고의 히트곡이 되었으며, 싱글로만 270만 장을 넘게 팔아 오아시스 싱글 종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렸다. 심지어 영국 초등교과서에도 수록되었으며, 영국 제 2의 국가라는 별명까지 얻게 된다. 또 런던올림픽 폐막식 당시 비디아이가 이 노래를 [[https://youtu.be/HXEJD4XJePY|불렀다.]] [youtube(YZG7z4FOn0g)] 1996년 2월 19일 발매된 2집의 네번째 트랙이자 네 번째 싱글 [[Don't Look Back In Anger]]는 오아시스에게 두 번째로 차트 1위를 안겨주었다. 국내에서도 Whatever와 더불어 가장 인기가 많은 곡. BPI 더블 플래티넘으로 13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기록중이며, 이는 오아시스 싱글 중 두번째로 많은 판매량이다. 기존의 싱글과는 달리 노엘이 보컬을 맡았는데, 이후 노엘 갤러거의 인기가 급상승을 하게 된 계기가 된 곡이기도 하다. [youtube(tI-5uv4wryI)] 이후 1996년 5월 13일 [[Champagne Supernova]]가 발매된다. 어쿠스틱 기타와 파도 소리로 시작하여 폭발하는 듯한 기타 솔로로 마무리 되는 대곡이자 그들의 낙관주의, 당시의 시대정신을 함축한 곡으로서 미국에서 빌보드 모던 락 차트 1위, 메인 스트림 Top 40 차트 10위를 기록하며 미국에서 50만 장 이상의 싱글 판매고를 올렸다. 영국에선 싱글로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40만장 이상이 팔려, 총 90만 장 이상의 세일즈를 기록하고 있다. 이 곡에는 폴 웰러가 리드 기타와 백보컬로 참가했다. 또 평론가들로부터 리암의 보컬 능력이 가장 빛나는 곡으로 뽑히기도 했다. 초기 밴드의 기타리스트였던 본헤드는 이 노래를 듣고 노엘에게 "이 노래 진짜로 네가 쓴거야?"라며 울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expressandstar.com/32829127.jpg|width=500]] 오아시스는 이듬 해 1996년 열린 1996 브릿 어워드에서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싱글상[* Wonderwall]', '최고의 비디오[* Wonderwall]'에 후보 노미네이트되어 '최고의 그룹상', '최고의 앨범상', '최고의 비디오상'을 받아 3관왕에 오른다.[* 1996년 브릿어워드 기자 회견에서 한 기자가 브릿어워드를 싹쓸이한 기분에 대해서 노엘에게 묻자, '''6개 정돈 받아야 하는데 3개밖에 받지 못했다'''고 [[https://youtu.be/qVTZv0pyaKE?t=0m50s|말 한 바있다]] ] [[파일:external/ichef.bbci.co.uk/p01x201y.jpg|width=full]] 그리고 수상 소감은 큰 이슈를 불러 오는데, 앨범상 수상 당시 먼저 올라가서 감사하다고 대충 말한 리암이 뒤따라 올라온 노엘과 함께 노래를 불렀다. 그게 블러의 [[Parklife(싱글)|Parklife]]의 한 부분. >All the people >So many people >And they all go hand in hand >Hand in hand through their '''Shitelife''' 원래 가사는 Parklife인데, Shitelife--ㅈ 같은 삶--라고 바꿔서 불렀다. 이 사건은 Shitelife 사건이라 불린다. [[파일:external/cdn.oasisinet.com/Poster_Knebworth_1996_August_10th.jpg|width=full]] 전 세계를 강타한 오아시스 신드롬은 96년 중반에 절정에 이르렀다. 메인 로드, 얼스코트 등의 대형 콘서트장을 매진시킨 오아시스는 96년 8월 10일부터 11일까지 넵워스(Knebworth)에서 공연을 열었다. 하루에 12만 5천 명씩 양일간 약 25만 관객을 끌어모아 당시 영국 역대 최다 관객 동원 기록을 세웠다. [* 후에 이 기록은 [[로비 윌리엄스]]에게 깨지고 만다. 3일간 37만 5천 명으로 로비 역시 넵워스에서 공연했다.] [[파일:JS43585974.jpg]] 참고로 '''285만 명'''이 공연 예매를 시도하였는데 퍼센트로 환산할 경우 당시 영국 인구의 5%가 예매를 시도한 것. 그 당시 어마무시했던 오아시스의 인기를 체감하게 해 준다. [* 게다가 그 당시에는 온라인 예매가 없었음으로. 오프라인으로만 거진 300만명이 예매를 시도한 것] 이후 2010년에 나온 오아시스의 베스트 앨범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