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나치 독일의 국가판무관부)] ||<-3><#000> {{{#f00 {{{+1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br]'''Reichskommissariat Ostland'''[*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오스트란트]}}} || ||<-2>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75%]] || [[파일:나치 독일 국장.svg|width=60%]] || ||<-2><#000> '''{{{#f00 국기}}}''' ||<#000> '''{{{#f00 국장}}}''' || ||<-3> [[파일:동방 국가판무관부.svg|width=100%]] || ||<-3><:> '''{{{#f00 1941년 ~ 1945년}}}''' || ||<-2><:> '''{{{#f00 성립 이전}}}''' || '''{{{#f00 해체 이후}}}''' || ||<-2><:> '''[[에스토니아 SSR|{{{#0072ce 에스토니아 SSR}}}]]''' || '''[[에스토니아 SSR|{{{#0072ce 에스토니아 SSR}}}]]''' || ||<-2><:> '''[[라트비아 SSR|{{{#ffd700 라트비아 SSR}}}]]''' || '''[[라트비아 SSR|{{{#ffd700 라트비아 SSR}}}]]''' || ||<-2><:> '''[[리투아니아 임시 정부|{{{#ffd700 리투아니아 임시 정부}}}]]''' || '''[[리투아니아 SSR|{{{#ffd700 리투아니아 SSR}}}]]''' || ||<-2><:> '''[[벨라루스 SSR|{{{#FFD700 벨라루스 SSR 일부}}}]]''' || '''[[벨라루스 SSR|{{{#FFD700 벨라루스 SSR 일부}}}]]''' || ||<#000> '''{{{#f00 정치 체제}}}''' ||<-2>[[전체주의]]|| ||<#000> {{{#f00 '''국가판무관'''}}} ||<-2>하인리히 로제^^(1941~1944)^^ [br] [[에리히 코흐]]^^(1944~1945)^^|| ||<#000> {{{#f00 '''수도'''}}} ||<-2>[[리가]] || ||<#000> {{{#f00 '''위치'''}}} ||<-2>[[발트 3국]]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발트 3국|발트 지역]]과 벨로루시(벨라루스) 북부에 세워졌던 [[나치 독일]]의 [[국가판무관부]]. [[독소전쟁|동부전선]] 중 유일하게 계획 영토를 모두 얻은 국가판무관부이다. 처음엔 발트 국가판무관부(Reichskommissariat Baltenland, 略 RKO)[* 라이히스코미사리아트 발텐란트]라 불렸다. 임명된 국가판무관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대관구지휘자인 하인리히 로제, 1944년부턴 [[동프로이센]] 대관구지휘자 에리히 코흐가 계승했다. == 역사 == 독일군은 이 지역에선 [[유대인]]이나 [[슬라브인]]을 제외한 인종, 즉 [[에스토니아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에겐 학살을 저지르지 않았다. 이는 [[동방식민운동]] 등 오랜 역사로 인해 독일인과 가깝다고 인식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친나치 인사들도 나중에 전향하거나 소수를 제외하고는 숙청당한 러시아나 우크라이나 점령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좀 더 자치를 누린 것은 사실이다. 독일 점령당국은 [[파르티잔]]이나 반나치세력을 토벌하기 위해 각국에 보안 경찰을 설립했으며, 많은 현지인들이 보안 경찰에 지원했고 [[발트 3국]] 주민들은 [[나치 독일]]을 해방자로 여겼으며 나치 독일을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독일이 승전 이후 동유럽 식민화를 하려고 세운 계획인 동방계획(게네랄플란 오스트)에 의하면 다른 민족들을 지배할 계획으로 [[에스토니아인]]과 [[라트비아인]]의 50% 학살 및 추방 나머지 50% 독일화, [[벨라루스인]]의 75% 학살 및 추방 나머지 25% 독일화였지만 [[리투아니아인]]은 85% 학살 및 추방 및 나머지 인구의 독일화를 구상하였다고 한다. 발트 지역이 [[레벤스라움]]의 일부로 편입된 이상 이들 역시 독일인으로의 동화는 피할 수 없는 길이었지만 소련의 억압으로 인해 적극적으로 독일에 부역한 [[크로아티아 독립국|몇 안 되는 지역]] 중 하나이다. 현대에도 발트 3국에서는 반소, 반러 감정이 너무나 사무친 나머지 친독, 친서방 성향인 것에 더해 나치 독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매우 좋은 편이다. 한 다큐멘터리 방송에서는 발트 지역 노인들이 인터뷰에서 독일은 동방 국가판무관부 시절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고 자랑스러워해야 마땅하다고 목소리를 높였을 정도. 이에 대해 발트 3국 현지의 유대인 공동체와 러시아인 공동체가 난색을 표하기도 했다.[* 실제로 발트 3국에서는 무장친위대에 입대해 소련군에 맞서 싸운 자국민을 나치 전범이 아닌 독립투사로 대우해야 한다는 시각 또한 존재한다.] 그렇다고 모든 에스토니아인, 리투아니아인, 라트비아인들이 나치에 협력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며, 다른 나치 점령지와 마찬가지로 나치에 맞서 싸운 빨치산도 존재했다. 또한 유대인이나 슬라브족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큰 탄압을 받았다. 지금의 [[벨라루스]] 지역에는 [[자치 국가]]이자 [[괴뢰 정부]]인 [[벨라루스 중앙 라다]]가 들어선다. 벨라루스 지역은 발트 3국과 별개로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심각한 탄압]]을 받았다. 벨라루스의 경우 최서단은 [[나치 독일]] 본토에 편입되었으며 동쪽은 [[소련 군정청]]에 편입되었다.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와 달리 1944년 7월까지만 해도 독일군이 모든 영토를 장악하고 있었고 1944년 7월 부터 소련이 대부분 지역을 점령했음에도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는 [[나치 독일]]이 멸망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북부집단군의 일부가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라트비아]]의 [[쿠르제메]](쿠를란트)에 갇혀 버렸기 때문이다. 쿠를란트 집단군이라고 불리는 이들의 규모는 20만 명이나 되었고 소련도 포위만 하고 대대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물론 이들도 본국이 항복하고 이틀 뒤에 항복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벨라루스의 역사)] [Include(틀:리투아니아의 역사)] [Include(틀:라트비아의 역사)] [Include(틀:에스토니아의 역사)] [[분류:나치 독일의 국가판무관부]][[분류:1941년 설립]][[분류:1945년 멸망]][[분류:독소전쟁]][[분류:리투아니아의 역사]][[분류:에스토니아의 역사]][[분류:라트비아의 역사]][[분류:벨라루스의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