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92년 출생]][[분류:1951년 사망]][[분류:뒤스부르크 출신 인물]][[분류:제1차 세계 대전/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독일 제국의 군인]][[분류:슈투름압타일룽/인물]][[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분류:나치당원]][[분류:독일의 정치인]][[분류:교수형된 인물]] [include(틀: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include(틀:슈츠슈타펠/장성급 지휘관)] ||||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오스발트 폴 대장.jpg|width=100%]]}}}|||| ||<#666> {{{#FFF 이름}}} ||<(>'''Oswald Ludwig Pohl'''[br] 오스발트 루트비히 폴|| ||<#666> {{{#FFF 출생}}} ||<(>[[1892년]] [[6월 30일]], [[독일 제국|독일국]] [[프로이센 왕국]] [[뒤스부르크]] || ||<#666> {{{#FFF 사망}}} ||<(>[[1951년]] [[6월 7일]], [[서독]] [[바이에른]]주 란츠베르크 형무소 || ||<#666> {{{#FFF 복무}}} ||<(>[[슈츠슈타펠]] (1933년 ~ 1945년) || ||<#666> {{{#FFF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무장친위대]] [[대장(계급)|대장]] (상급집단지도자) || ||<#666> {{{#FFF 주요 참전}}} ||<(>[[제1차 세계 대전]] [br] [[제2차 세계 대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포흘3.jpg|width=100%]] || || '''오스발트 루트비히 폴 (Oswald Ludwig Pohl)''' || || [[파일:포흘과 베어.jpg|width=100%]] || || 왼쪽이 '''오스발트 폴''', 오른쪽은 [[리하르트 베어]]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사령관이다. || [[나치 독일]]의 [[정치인]]이자 [[슈츠슈타펠]] [[대장(계급)|대장]] 및 [[무장친위대]] [[대장(계급)|대장]] == 초기 행적 == [[뒤스부르크]]에서 대장장이의 5번째 아들로 태어난 폴은 [[1912년]]에 학교를 졸업한 후 독일 해군에 입대했다. == [[제1차 세계 대전]] == 킬과 빌헬름스하펜에서 근무하면서 [[서인도 제도]]와 동남아시아 식민지까지도 갔던 그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발트해와 플랑드르에서 종군하다가 [[1918년]] [[4월]]에 회계장교가 되어 해군 회계대위 계급으로 패전을 맞이했다. == [[나치당]]에서의 행적 == 전후 킬 대학에서 법률과 국학을 공부한 후 재건된 [[바이마르 공화국]] 치하의 해군에 들어갔는데 [[1924년]]부터 스비네뮌데(현재의 폴란드령)에서 근무하다가 [[1934년]] [[1월 31일]]에 해군대령으로 제대했는데, 그 전인 [[1923년]]에 [[나치당]]에 입당한 후 [[1926년]]부터 돌격대 대원이 되었다가 이후 킬 시의 시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나치당]]이 정권을 잡은 후인 [[1933년]] [[5월]]에 [[하인리히 힘러]]와 폴은 서로 만났는데, 힘러는 폴의 경제학 지식을 높이 평가하여 친위대 상급대령의 계급을 주어 그를 친위대로 끌어들였다. 친위대본부 관리국 소속으로 [[1934년]] [[2월 1일]]에 관리국 국장으로 취임한 폴은 산하에 친위대 특무부대와 강제수용소가 있었기에 경제담당의 입장에서 이들을 감독했다. [[1939년]] [[4월 30일]]에 폴의 경제부분은 친위대 본부에서 독립하여 <관리 및 경제본부>로서 폴이 그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미 내무성 차관자리에도 올랐던 폴은 내무성 내의 <예산 및 건설본부>장관도 겸임했다. 그리고 친위대의 기업을 이끌며 그 경영에도 관여해 강제수용소의 인력을 동원하기도 했다. == [[제2차 세계 대전]] == || [[파일:폴과 장군들.jpg|width=100%]] || || 폴과 고위장교들[* 왼쪽부터 [[리하르트 글뤽스]] [[슈츠슈타펠|SS]][[중장]], [[아우구스트 프랑크]] [[슈츠슈타펠|SS]][[대장(계급)|대장]], 오스발트 폴 [[슈츠슈타펠|SS]][[대장(계급)|대장]], [[게오르크 뢰르너]] [[슈츠슈타펠|SS]][[중장]], [[한스 캄러]] [[슈츠슈타펠|SS]][[대장(계급)|대장]]이다.] ||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던 [[1942년]] [[2월 1일]]에 <예산 및 건설본부>와 <경제 및 행정본부>가 통합되면서 <경제관리본부>로 만들어지자 폴은 그 본부장에 취임했다. [[1942년]] [[3월 16일]]에 강제수용소 감독부대가 SS 작전본부 배속에서 폴의 WVHA로 배속되면서 이후 강제수용소는 WVHA의 D국이 되어 정식으로 폴의 산하기관이 되었다. 이것은 강제수용소의 관리 및 총력전 체제구축을 위한 노동력의 공급원 감시라는 면에서 중요시되었다. 폴 이하 친위대 경제반은 강제수용소 인력과 유대인 인력을 중시하여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노동력이 없는 유대인과 수용인은 절멸대상이었다. 폴의 관리하에 있던 아우슈비츠 및 마이다네크 강제수용소엔 가스실이 설치되어 노동력이 없는 자를 살해했다. 노동력이 있는 자는 별도의 수용소에 수감되어 철저하게 군수산업에 동원되었는데 폴은 강제수용소의 유대인들로부터 빼앗은 돈과 시계, 보석, 심지어 금니까지 모조리 뽑아 독일 제국은행에 예치했다. [[1942년]] [[4월 20일]]에 폴은 친위대 대장으로 승진했는데 [[12월]]엔 첫 아내와 이혼한 후 IG 파르벤 사의 하부기업인 헤키스트 사의 창설자 미망인인 엘레오노레 폰 브뤼닝과 재혼했다. == 전후 재판과 최후 == || [[파일:오스발트 폴.jpg|width=100%]] || || 법정에서의 '''오스발트 폴''' || 독일의 패전후, 폴은 브레멘 근교의 농장에 작업부로서 몸을 숨기고 있다가 [[1946년]] [[5월 27일]]에 [[영국군]]에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뉘른베르크 폴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된 폴은 [[1947년]] [[11월 3일]]에 <인도에 반한 죄>와 <[[전쟁 범죄]]> 혐의로 유죄가 입증되면서 사형이 선고되었다. 3년 반 동안 란츠베르크 형무소에 수감되었던 폴은 수감중이던 [[1950년]]에 <신조, 나의 길은 신으로 가는 길>을 카톨릭 교회의 허가를 얻어 출판했다. 하지만 그는 [[1951년]] [[6월 7일]]에 [[교수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