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오성술}}}'''[br]'''吳成述'''}}}}}}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오성술.jpg|width=100%]]}}} || || '''본명''' ||오인수(吳仁洙) || || '''자 / 호''' ||성술(聖述) / 죽파(竹坡) || || '''본관''' ||[[나주 오씨]][* 19세 수(洙) 항렬.] || ||<|2> '''출생''' ||[[1884년]] [[5월 15일]] || ||[[전라도]] [[나주시|나주목]] 삼가면 죽산리[br](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죽산마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25121|#]]. 인근의 도덕동·명도동·오운동·지평동과 함께 [[나주 오씨]] 집성촌이다.] || ||<|2> '''사망''' ||[[1910년]] [[9월 15일]] (향년 26세) || ||대구형무소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215호 || ||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구한말의 [[의병장]]으로 활약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 생애 == 1884년 5월 15일 [[전라도]] [[나주시|나주목]] 삼가면 죽산리(現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산동 죽산마을)의 양반가에서 [[참봉]]을 지낸 아버지 오영선(吳榮善)과 어머니 [[나주 임씨]][* 절도공파(節度公派)-강계공계(江界公系) 임홍수(林弘洙, 1826 ~ 1861. 2. 10)의 차녀이다.]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 [[최익현]]의 창의연설[* [[의병]]을 일으키자는 내용의 연설.]을 보고 감동을 받은 오성술은 그의 강론에도 참석하고 최익현에게 의병활동을 결심하는 말을 하였다. 이에 최익현은 대견해하며 아래와 같이 말했다. >나는 이미 늙은 몸. 그대와 같은 열혈 청년들이 나서겠다고 하니 마음이 든든하네. 천하대세와 국세민계[* 직역하면 나라의 세력과 백성의 꾀. 전반적인 나라의 상태를 이르는 말인 듯.]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마땅히 일사보국[* 한 목숨 바쳐 나라에 보답하다.]할 기회가 온 것 아니겠는가. 한시도 지체하지 말기 바란다. 이 말을 듣고 오성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병서를 익히며 의병부대를 만들 계획을 세운다. 1906년에는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고, 이에 더욱 박차를 가해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국가 흥망이 경각[* 아주 짧은 시간. 나라를 살리기에는 이제 시간이 얼마 없다는 의미.]에 달려 있습니다. 소자 비록 [[백면서생]]이오나 혈기방장[* 혈기가 아주 씩씩함.]하온데 썩은 [[선비]]들처럼 글만 읽고 앉아 있겠습니까. 최익현 선생의 뒤를 따라 국적[* 국가의 적]을 몰아내고자 하오니 의병부대를 창립하는데 필요한 자금을 승낙해주십시오. 오성술의 아버지는 이 말을 듣고 [[군자금]]을 마련해주었다. 오성술은 이 자금을 토대로 [[동료]]들을 모을 수 있었고, [[1907년]] 2월에 마침내 격문을 띄우고 창의한다. 우선 자신이 수학했던 용진산을 근거지로 삼아 200명의 의병들을 이끌게 되었다. 그 다음 농민 출신이 많았던 의병들을 이끌고 경제 침탈을 하던 [[일본인]] 소유의 [[농장]]을 공격했다. 하지만 [[일본 제국|일본]]은 끓어오르기 시작하는 의병 운동에 대대적인 소탕 작전을 실시한다. 최익현을 비롯한 의병장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고 사기가 꺾였고, 오성술과 같이 창의한 김태원도 붙잡혀 죽고 만다. 거기에 오성술이 이끄는 의병도 [[친일파]]의 밀고로 근거지가 탄로나고 만다. 이에 오성술은 친일파를 처단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꾼다. [[1909년]]까지 [[일본군]]을 피해 근처에 활동하던 밀고자 및 친일파들을 잡아 죽이는데에 성공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일제가 [[남한 대토벌 작전]]을 실시해 전국을 뒤지기 시작, 오성술과 30명의 의병부대도 일본군에게 공격받는다. 의병들은 끝까지 저항했지만 결국 오성술을 제외한 모두가 전사하고 그도 체포당한다. 오성술도 다른 의병장들과 마찬가지로 [[사형]]을 판결받고 [[1910년]] 9월 15일에 대구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되어 26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사후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다. 유해는 2010년 4월 23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 참고 자료 == * 정상규 저. <잊혀진 영웅들, 독립운동가>. 휴먼큐브. 2017년. 172~174p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조선 의병장]][[분류:광산구 출신 인물]][[분류:나주 오씨]][[분류:1884년 출생]][[분류:1910년 사망]][[분류:건국훈장 독립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