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한국의 공산주의자]][[분류:해주 오씨]][[분류:의성군 출신 인물]][[분류:1905년 출생]][[분류:1938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 || 성명 ||오병수(吳丙洙) || || 본관 ||[[해주 오씨]] || || 생몰 ||[[1905년]] [[6월 20일]] ~ [[1938년]] [[4월 11일]] || || [[출생지]] ||[[경상북도]] [[의성군]] 남부면 도동동[br](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도동리)[* [[해주 오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오상흠]]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지 ||[[경상북도]] [[의성군]] || ||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 추서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오병수는 1905년 6월 20일 경상북도 의성군 남부면 도동동(현 의성읍 도동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32년 10월 10일 경북 의성군 의성면 도서동에서 [[오기수]], [[김규복]] 등과 함께 조선의 독립과 사회주의 사회의 건설을 위하여 독서회(讀書會)를 조직하고 청년부(靑年部)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이들은 사회과학을 연구하며 동지를 규합하는 한편, 김두칠(金斗七)·문소준(文小俊) 등으로 하여금 계조직을 가장한 의성노동친목계(義城勞動親睦契)를 결성케 하여 각 관공서(官公署)의 소사(小使)와 지방의 청소년들을 포용, 조직을 확대할 것을 계획하고 이의 실행을 위해 활동했다. 그러나 얼마 후 일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34년 10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 1938년 4월 11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오병수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