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673년 출생]][[분류:1728년 사망]][[분류:경기도 출신 인물]][[분류:해주 오씨]][[분류:조선의 공신]][[분류:조선의 문관]][[분류:우의정]][[분류:이조판서]][[분류:병조판서]][[분류:이조전랑]][[분류:소론]] [include(틀:역대 조선 정승(영조-정조))] || '''{{{#f0ad73 오명항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include(틀:조선 분무공신)] ---- [include(틀:소론)]}}} || ||<-2> '''[[정승|{{{#f0ad73 조선 정승}}}]][br]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 충효공(忠孝公)[br]{{{+1 오명항}}}[br]吳命恒'''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오명항 양무공신도상.jpg|width=100%]]{{{-2 [[대한민국의 보물|보물]] 1177호 〈오명항 초상 및 양무공신교서〉 중 초상화}}}}}} || || '''출생''' ||[[1673년]] [[5월 29일]][br](음력 [[현종(조선)|현종]] 14년 4월 14일)|| || '''사망''' ||[[1728년]] [[10월 11일]] (향년 55세)[br](음력 [[영조]] 4년 9월 9일)|| || '''[[봉호|{{{#f0ad73 봉호}}}]]'''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 || '''[[시호|{{{#f0ad73 시호}}}]]''' ||충효(忠孝)|| || '''[[본관|{{{#f0ad73 본관}}}]]''' ||[[해주 오씨]]|| || '''[[자(이름)|{{{#f0ad73 자}}}]]''' ||사상(士常)|| || '''[[아호|{{{#f0ad73 호}}}]]''' ||모암(慕菴)|| || '''[[붕당|{{{#f0ad73 붕당}}}]]''' ||[[소론]]|| || '''부모''' ||부친 - 오수량(吳遂良, {{{-3 1644 ~ 1692}}})[br]모친 - 함양 여씨(咸陽呂氏) 여성제(呂聖齊, {{{-3 1625 ~ 1691}}})의 딸|| || '''형제자매''' ||형 - 오명준(吳命峻, {{{-3 1662 ~ 1723}}})[br]남동생 - 오명신(吳命新)|| || '''부인''' ||[[해주 최씨]] - 최기창(崔起昌)의 딸|| || '''자녀''' ||장남 - 오언구(吳彦耇)[br]장녀 - 한덕길(韓德吉)의 처|| [목차] [clearfix] == 소개 ==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공신#분무공신(奮武功臣)|분무공신]], [[우의정]]에 올랐다. 붕당은 [[소론]]이며, [[영조]] 집권초기 '''[[이인좌의 난]]을 진압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의 마지막 1등 공신이다. [[오윤겸]]의 현손이자 소론계 중진인 대제학 오도일의 종손이다. 해주 오씨 경파의 시조 묘역인 용인 처인구 모현면 오산리에 묘소가 있다. == 생애 == 1673년([[현종(조선)|현종]] 14) 태어나 1705년([[숙종(조선)|숙종]] 31) [[과거 제도#문과|문과]] 급제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숙종(조선)|숙종]]이 [[소론]]을 여당으로 삼으면서 1715년 [[이조(조선)|이조]] 좌랑이 된다. 이듬해 [[경상도]], [[강원도]], [[평안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다가, 1724년 [[영조]] 즉위 후 소론이 실각하자 사직서를 낸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다시 여당이 되면서 오명항도 [[이조판서]], [[병조판서]]에 잇달아 오른다. 1728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영조는 오명항을 4도 도순무사 겸 판[[의금부]]사로 임명하고 난을 진압하게 한다. [[이인좌]] 역시 [[소론]]으로, 소론이 스스로 진압케 하려는 궁리도 있었다. 본인도 병조판서를 역임한 적이 있고 전략·전술에 능했다. [[이인좌]]의 첩자와 자객을 모두 잡아냈고, [[안성시|안성·죽산]]에서 반군을 격퇴해 이인좌를 생포했다. 파죽지세로 [[추풍령]]을 넘어 [[영남]]의 반란군을 조기에 분쇄하면서 [[호남]]의 역도들과 합세하지 못하게 해 한 달 여만에 난을 평정했다. 결국 반란군의 핵심이었던 [[충청]]의 이인좌군을 조기에 격파한 것이 반란 진압의 열쇠가 된 셈. 상당히 [[덕장]] 스타일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발걸음을 숨기고 산 뒤쪽을 점거하기로 한 부대가 군령을 어기고 깃발을 세우고 북소리까지 울리며 진군한 바람에 이인좌가 남은 군을 이끌고 미리 산을 올라가버려 전략이 크게 꼬일뻔했음에도 나무라기만 했을뿐 벌을 내리지 않았으며 이후 종사관 [[조현명]]이 군법은 엄격해야 한다고 지적하자, "국가가 태평한 지 1백 년이어서 군기가 느슨해졌으니, 갑자기 엄격한 군율을 들이대면 원망만 늘 것 아니겠나"라고 답했다. 또한 군영에서 잠을 잘 때 부하들이 볼 때는 일부러 크게 코를 골면서 잠을 자는척 했는데, 얼마나 자신이 있으면 저렇게 편안하게 자겠냐면서 사기가 올랐다고 한다. 이인좌의 난 진압 후 [[공신#분무공신(奮武功臣)|분무공신]] 1등에 봉해졌고 우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돼 해은부원군의 작위를 받았다. 얼마 안돼 사망했는데 [[영조]]가 직접 제문을 짓고 아들을 중용하게 했다. 그가 장수했으면 [[영의정]]은 따놓은 당상이었고 소론도 더 집권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이인좌 때문에 숙청되고 세가 약해진 소론은 곧 권좌를 놓는다. 영조는 이후 [[노론]]을 여당으로 삼고 [[순조]] 때의 [[세도정치]] 전까지 조선 조정은 노론 일색이 됐다. 항목 위에 있는 오명항 초상화는 보물 1177호로, [[장만]]의 초상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실주의]] 기법을 잘 보여준다. 얼룩같은 검은 점들은 [[천연두|마마 자국]]을 묘사한 것이다. 얼굴이 검어 간질환이 상당히 진행된 상태이며 사인이 [[간경변]]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오명항의 초상은 두 점이 더 남아 있는데 모두 같은 특징을 띈다. 그의 집안은 선조인 오도일부터 오명항 본인을 거쳐 후손인 오태증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애주가로 유명했는데 이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다. ||[[파일:1680190360367.jpg|width=345]]|| 위 초상화와 같은 해에 그려진 초상화인데, 병세가 심각하게 악화되어 [[황달|흑색황달]]이 일어난 나머지 얼굴이 완전히 갈색으로 변해버린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초상화는 덴리대학 도서관에 소장되어있다. == 관련 문서 == * [[이인좌의 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