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115deg, #cd313a 50%, #0047a0 50%)" '''[[독립유공자|{{{#ffffff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br] {{{#ffffff '''{{{+1 오기수}}}'''[br]'''吳麒洙'''}}}}}}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오기수.jpg|width=100%]]}}} || || '''이명''' ||오인수(吳麟洙)·오훈(吳薰)·오육파(吳陸波)[br]오능파(吳陵波)·오영훈(吳永薰)·오일영(吳一英) || || '''호''' ||남파(湳波) || || '''본관''' ||[[해주 오씨]] || ||<|2> '''출생''' ||[[1892년]] [[9월 25일]] || ||[[경상도]] [[의성군|의성현]] 북부면 후죽동[br](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5201084|#]][* [[http://e-gonghun.mpva.go.kr/user/ContribuReportDetail.do?goTocode=20001&mngNo=3173|독립유공자 공적조서]]에는 중리리로 기재되어 있다.]] || ||<|2> '''사망''' ||[[1959년]] [[2월 20일]] ||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구|수성면]] [[신천동(대구)|신천동]][br](현 [[대구광역시]] [[동구(대구)|동구]] 신천동) || ||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112호 || ||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정치인.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오기수는 1892년 9월 25일 경상도 의성현 북부면 후죽동(현 경상북도 의성군 의성읍 후죽리)의 양반가에서 오학순(吳鶴淳)[* 일명 오병소(吳秉韶). 1924년 3월 17일, 자기 소유 토지나 일정한 직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대서업(代書業)으로 조금씩 저축한 돈 100원을 경비곤란을 겪던 사립 의성학원에 의연금으로 [[http://db.history.go.kr/id/npda_1924_03_17_v0003_0770|기부한 바 있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2년 12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경성관립공업전습소]]를 졸업하고 1911년 1월 18일부터[[http://db.history.go.kr/id/gb_1911_01_19_a01150_0040|#]] 1913년까지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 측량과 기수(技手), 1914년에 제도과 기수로 [[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4&totalCount=4&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5%90%B3%E9%BA%92%E6%B4%99&brokerPagingInfo=&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5%90%B3%E9%BA%92%E6%B4%99&searchKeywordConjunction=AND|근무하다가]], 그해 7월 28일 [[http://db.history.go.kr/id/gb_1914_07_31_a05990_0120|사직했다]]. 한때 의성경찰서 순사보로 근무하기도 했으며, 의성군에서 형평사(衡平社)를 조직하여 [[형평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19년 6월경 그는 의성군 의성면에서 마춘성(馬春成)에게 중국 [[만주]]로 가서 만주 및 [[상하이]]의 조선인들과 연락하여 곧 열릴 [[파리 강화 회의]]에 조선독립을 청원하여 참가국의 승인을 얻을 계획을 말하여 이에 가담할 것을 권유하여 그의 허락을 얻어냈다. 그후 기수는 실제로 만주로 건너가 조선독립단에 가입한 후 귀향하였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그해 11월 2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01&evntId=0034988562&evntdowngbn=Y&indpnId=0000019788&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 후 [[형집행정지]]로 출옥한 후 다시 독립운동을 계속하여 1920년 3월 19일에는 경상북도 [[영천시|영천군]] 영천면 완산동(현 [[영천시]] [[완산동(영천)|완산동]]) 소재 [[영천역]] 앞에서 [[양한위]]와 만나 [[경기도]] [[경성부]]에서 수집한 『[[독립신문]]』과 독립에 관한 경고문을 대구시내에 배포하였다. 또한 그해 10월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양한위·권태일(權泰鎰) 등과 독립운동 자금 8천여원을 [[허병률]]로 하여금 상해로 송금하게 하였다. 그 후 그는 일제 관서를 폭파하고 대구 내의 친일 한인 관리들을 처단하기 위해 폭탄 입수에 힘쓰던 중 경상북도 경찰부에 체포되었고 1920년 7월 24일 대구지방법원 검사국에 [[http://db.history.go.kr/id/su_005_1920_07_24_1020|송치되었다]]. 그해 8월 2일 앞선 마춘성 관련 사건에 대해선 [[증거불충분]]으로 [[불기소처분]]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12&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2128&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받았으나]], 독립신문 배포 및 군자금 모금 건에 대해서는 9월 27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제령 7호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01&evntId=0034988675&evntdowngbn=Y&indpnId=000001989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인 1923년 4월 10일 [[오진문]] 등과 함께 북풍회(北風會)와 연결된 사회 운동 단체로서의 정의사(正義社)를 조직하였다. 1924년 1월 만주로 건너가 한족노동당(韓族勞動黨)에 가입하였고, 1925년 11월 5일 한족노동당 중앙위원 및 교육선전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2월 [[상하이]]로 갔다가 그해 6월 모스크바 공산 대학 속성과에 입학하여 1929년 5월 졸업하였다. 그해 6월 만주로 돌아왔다가 8월 5일경 [[창춘]]경찰서 고등계에 [[http://db.history.go.kr/id/npda_1929_08_17_v0005_0950|검거되어]] 1930년 1월 1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815&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08436&actionType=det&flag=2&search_region=|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귀향하여 의성군 지역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였다. 1932년 10월 10일 의성면 도서동(현 의성읍 도서리)에 있는 [[김규복]]의 양돈장에서 [[오병수]]·김규복 등과 비밀리에 만나 사회주의 보급을 위한 지도 기관으로서 의성적색독서회(義城赤色讀書會)를 조직하였고, 그 부서를 지도 겸 조직, 청년, 농민 등 3부로 나눈 후 그는 이 기관의 지도 겸 조직부 책임자를 맡았다. 이어 10월 28일 같은 곳에서 그는 동지인 김진봉(金鎭鳳) 등과 비밀리에 회합을 가지면서 의성체육회에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고 독서회원인 김두칠(金斗七)과 문소준(文小俊)으로 하여금 의성노동친목계의 조직을 맡게 하면서 의성 지역 각 관공서 경비원 및 지방의 근로자, 청소년 등을 모아 의성 적색 독서회의 지도하에 두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오기수는 1933년 12월 4일 검사국에 [[http://db.history.go.kr/id/su_010_1933_12_04_0110|송치되었고]], 1934년 5월 26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예심이 종결되어 유죄로 [[http://db.history.go.kr/id/su_010_1934_05_26_1310|공판에 회부되었으며]], 그해 10월 26일 대구지방법원 형사부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미결 구류 180일 산입)을 [[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232&evntId=0034988972&evntdowngbn=Y&indpnId=0000020170&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이 사이 구류갱신결정이 세 차례에 걸쳐 이뤄지기도 했다.[[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3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3198&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1934.3.3]][[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3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3220&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1934.6.1]][[http://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165930&evntId=&evntdowngbn=N&indpnId=0000123225&actionType=det&flag=3&search_region=|1934.9.3]]] 1935년 7월 20일 대구복심법원에서 1933년 의성공산당사건에 대해 경찰의 고문에 의해 조작된 것이 드러나 무죄를 선고받고 출옥하였다.[[http://db.history.go.kr/id/hdsr_013_0730|#]][[http://db.history.go.kr/id/su_011_1935_07_20_0780|#2]] 출옥 후에는 고향 의성군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조용히 지내다가 해방을 맞았다.[[https://blog.naver.com/ohsan803/221778602057|#]] [[8.15 광복]] 후에는 우익으로 전향하여 1945년 11월 5일 [[미군정청]]에 의해 경상북도 고문에 선임되었으며 12월 20일 경상북도고문회 서기에 선출되었다. 1946년 3월 9일에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경상북도지부에 가담하였다. 1949년 대구부 [[동인동]](현 대구광역시 [[중구(대구)|중구]] [[동인동]])에서 신흥공업주식회사를 경영하기도 했다.[[http://db.history.go.kr/id/hs_003_1949_00_17_0650|#]] 1950년 1월 31일 [[대한청년단]] 경상북도단부 단장에 출마하였으나 [[장택상]]에 밀려 낙선하였지만, 그해 4월 13일에는 경상북도단부 단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되었다. 그해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청년당 후보로 경상북도 의성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대한국민당]] [[박영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6.25 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전시대책위원회 위원, 구국총력도연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경상북도 달성군 수성면 [[만촌동]](현 대구광역시 [[수성구]] 만촌동)에 거주하다가 신천동으로 이주한 후 1959년 2월 20일 그곳에서 별세하였다.[[https://blog.naver.com/ohsan803/221778608195|#]]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유해는 1989년 8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이장되었다. == 여담 == * 아들 오상균이 현재 [[광복회]] 대구광역시지부 지부장으로 [[https://m.yeongnam.com/view.php?key=20150228.010030743450001|재직하고 있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종류 || 소속정당 || 득표수(득표율) || 당선여부 || 비고 || || 1950 ||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경북 제8선거구(의성군 갑)) || 대한청년당 || 3,995표 (11.13%) || 낙선 (5위) || || [[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대한민국의 남성 정치인]][[분류:해주 오씨]][[분류:의성군 출신 인물]][[분류:1892년 출생]][[분류:1959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족장]][[분류:국립대전현충원 안장자]][[분류:서울대학교 출신/전신 학교/공과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