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동명이인]][[분류:1831년 출생]][[분류:1879년 사망]][[분류:개화파]][[분류:해주 오씨]][[분류:서울특별시 출신 인물]][[분류:조선의 역관]] [목차] == 조선 말기 개화 사상가 ==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6050200631_1.jpg]] 吳慶錫 1831년 3월 5일(음력 1월 21일) ~ 1879년 10월 7일(음력 8월 22일) [[조선]] 말기의 개화 사상가. [[역관]] 출신으로, 본관은 [[해주 오씨|해주]](海州)다.[[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38085|#]] 자는 원거(元秬). 호는 역매(亦梅), 진재(鎭齋), 천죽재(天竹齋).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허준]]과 함께 [[중인]] 신분으로 당상관에 오른 둘 뿐인 인물이다. 1831년 3월 5일 [[한성부]]에서 사역원 교수를 지낸 아버지 오응현(吳應賢)과 어머니 [[전주 이씨]] 이의무(李義懋)의 딸 사이의 5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866년에 [[고종(대한제국)|고종]]이 [[명성황후]]와 결혼하자 [[왕비]] 책봉을 위해 주청사가 [[베이징시|베이징]]으로 갔다. 정사 유후조(柳厚祚), 부사 서당보(徐堂輔), 서장관 홍순학(洪淳學)[* 서장관 홍순학이 남긴 <연행가>는 조선의 대표적인 강편 기행 가사이다.]으로 이뤄진 일행인데 역관 오경석은 [[프랑스]] 정보 수집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아 곧 닥쳐올 [[병인양요]]에서 프랑스군은 [[돈]]이 없어 외상으로 3개월분 물자만 확보한 상태여서 장기전을 못한다는 결정적인 보고를 [[흥선대원군]]에게 급행으로 올렸다.[* 프랑스군은 3개월분의 물자밖에 없고 국내 사정상 장기전할 의지도 없었지만 조선군은 그조차도 없었으며 조선군이 부족해 사냥꾼 [[의병]]을 동원했다.] 오경석은 주청사 귀국 이후 병인양요가 끝날 때까지도 남아 정보 활동을 계속하여 <양요기록>을 남기는데 오경석 [[사진]]도 주청사 때 찍을 수 있었다. 조선 말기 [[박규수]](朴珪壽)의 개화 사상에 영향을 주었는데 1870년 초부터는 [[유홍기]](劉鴻基)와 함께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김옥균]](金玉均), [[박영효]](朴泳孝) 등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 사상을 [[교육]]하였으며 [[강화도 조약]] 체결 과정에도 일정 부분 관여하였다. 1879년 [[사망]]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유공자]]로 [[민족대표 33인]]의 1명인 [[오세창]]이 그의 아들이다. 한때 조선 최초로 사진을 찍은 사람으로 알려지기도 했지만 조선 후기의 청나라 사절단인 연행사 사절단원들의 사진이 1863년 철종때 찍힌 것으로 밝혀져 조선 사람을 [[모델]]로 찍힌 사진들 중 가장 오래된 사진의 [[주인공]]을 넘겨주었다. 해당 사진도 그의 아들 오세창이 [[일본]] [[도쿄시|도쿄]]에서 만든 복사본이고 [[원본]]은 소실되었다.[* 이 사진들 중 독사진을 찍은 사람이 있는데 조선 후기 [[이조판서]]에 [[경기도]] 관찰사까지 지냈던 이의익으로 사진을 찍을 당시 70대 초반의 [[나이]]였으며 1794년([[정조(조선)|정조]] 18년) 태어난 사람이다. 사진이 우리나라에 늦게 들어온걸 생각하면 정말 신기한 사실이다.] == [[대원방송]]의 [[애니메이션]] [[더빙]] [[PD(방송)|PD]] [[오경석(PD)|오경석]]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오경석(PD))] == [[대한민국]]의 [[정치인]]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오경석(1965))] == [[북한]]의 [[정치인]] == 현 [[함경북도]] 인민위원장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