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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00 40%, #a09e90)" '''{{{#!html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주요 수상 이력}}}''' }}} || ||<-1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베니스 국제 영화제 명예 황금사자상)]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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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예지_스콜리모프스키.jpg|width=100%]]}}} || ||<|2> '''출생''' ||[[1938년]] [[5월 5일]] ([age(1938-05-05)]세) || ||[[폴란드 제2공화국]] 우치키에 주 [[우치(폴란드)|우치]] || || '''국적''' ||[[파일:폴란드 국기.svg|width=28]] [[폴란드]] || || '''직업''' ||[[영화 감독]], [[극작가]], [[각본가]], [[배우]], [[시인(문학)|시인]], [[화가]]|| || '''학력''' ||바르샤바 대학교 {{{-2 (민족학, 문학, 사학)}}} [br] 우치 국립 영화 학교 {{{-2 (연출 전공)}}} || [목차] [clearfix] == 개요 == [[폴란드]]의 [[영화 감독]], [[극작가]], [[각본가]], [[배우]], [[시인(문학)|시인]], [[화가]]. 정치적인 불만족과 욕망, 망명자로서의 불안 등의 주제를 초현실적인 이미지, 그리고 조각난 숏과 편집을 통해 난해하게 투영한 영화 세계가 특징인 영화 감독으로 평가 받으며, [[철의 장막]]시절 [[폴란드 영화]]사에서 [[안제이 바이다]] 이후 [[로만 폴란스키]][* 세 사람 모두 절친 사이이기도 하다.]와 함께 '폴란드 학파' 세대를 대표하던 [* 정확히는 2세대에 속한다. 스콜리모프스키는 1세대 말기~2세대 초기에 두각을 보여 데뷔했다.] 폴란드의 영화 감독이다. == 생애 및 작품 활동 == 1938년 [[폴란드]] [[우치(폴란드)|우치]]에서 태어나 [* 전쟁 때문에 저항군이었던 아버지가 처형되고 어머니는 유대인들을 숨겨주는 등 상당한 고생을 했다. 전후 어머니가 주 체코 폴란드 대사관에서 일해 체코에서 살았는데 이때 [[바츨라프 하벨]]이나 [[밀로스 포먼]] 같은 체코 뉴웨이브 인사들이랑 알고 지냈다고.] 1959년에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민족학, 문학, 사학을 전공한 이후 단편소설을 쓰며 두 권의 시집을 낸 작가가 되었고, 재즈 음악가와 권투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엔 상당한 말썽쟁이였다고 한다. 1960년에 [[안제이 바이다]] 감독을 만난 뒤 그의 영화 <순진한 마법사>의 각본을 쓰고 조연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입문했다. 이때 그의 격려로 우치 국립 영화 학교에 입학했으며, 평생지기 친구 [[로만 폴란스키]]를 만나게 된다. 1962년에는 친구 [[로만 폴란스키]]의 장편 연출 데뷔작인 <[[물속의 칼]]>각본을 공동으로 집필했으며, 해당 작품이 호평을 들으며 스콜리모프스키도 덩달아 이름을 알리게 된다. [* 등장인물들이 한 공간에 고립된 채 감정적인 분투를 벌인다는 면에서는 폴란스키 감독의 테이스트가 느껴지지만, '구세대와 신세대의 갈등과 반목'이라는 플롯의 줄기는 스콜리모프키 감독의 테이스트가 느껴진다는 평을 받는다.] 이후 1964년에 우치 영화학교에서 실습용으로 찍고 남았던 필름 조각을 모아 제각각 장면들을 촬영한 장면들을 이어붙여 만든 <신원미상>을 통해 감독으로 데뷔하게 된다. 해당 작품이 1960년대 공산주의 치하의 폴란드를 살아가는 한 똑똑한 청년의 단절감과 소외감을 묘사하고 있었기에, 폴란드 정부에서는 해당 작품을 좋게 보지 않아 <물속의 칼>의 각본을 썼다는 점과 더불어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이 폴란드 정부의 눈밖에 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65년에는 30살의 노쇠한 권투선수가 늙어가는 육체에 느끼는 강박감을 다룬 두번째 영화 <[[부전승(영화)|부전승]]>을 연출했는데, 주인공을 끈질기게 따라가는 정교한 [[롱테이크]]로 찍어 77분이라는 분량 동안 영화 전체의 샷 개수가 35개 밖에 되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하고, 1966년 프랑스의 저명한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 선정한 그해 베스트 10편 중 2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1966년작 <장벽>은 [[장뤽 고다르]]의 [[미치광이 피에로]]의 시각적 표현법에 영감을 받아 찍었다는 작품으로, 갑작스러운 장면 전환과 기괴한 사건의 병렬로 초현실적인 느낌을 선사하는 등 지나친 형식미를 추구한 탓에 평단에서는 호평을 받았지만[* 전작 [[부전승(영화)|부전승]]에 이어 카이에 뒤 시네마에서는 1968년 베스트 10편중 7위로 선정하는 등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을 지지해주었다.], 흥행에서는 크게 실패했다. 1967년, <장벽>의 흥행 실패로 인해 차기작 <[[출발(영화)|출발]]>은 벨기에에서 촬영하고 [[누벨바그]]를 대표하는 배우인 [[장피에르 레오]]를 출연시키는 등 처음으로 폴란드를 떠나 서유럽 측의 자본으로 제작했으며, 그해 1967년 [[베를린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인 [[베를린 국제 영화제/황금곰상|황금곰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고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나 마찬가지로 흥행은 실패하고 만다. 때문에 같은 해에 제작한 <손들어!>는 다시 폴란드로 돌아와 촬영했으나, 작품속에 담긴 반스탈린주의적 메시지 때문에 상영을 금지당하고 만다.[* 결국 이 작품은 14년뒤인 1981년이 되어서야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이 재편집을 한 후 1981년 [[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이에 낙담한 스콜리모프스키는 결국 고국 폴란드를 떠나 망명자로서 해외에서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으나, 친구인 폴란스키와 달리 서유럽 측의 영화시장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게 제작비를 조달하며 작품활동을 이어나가야 했다. <[[출발(영화)|출발]]>의 비평적 성공으로 인해 서유럽 측의 초대를 받아 영국으로 망명한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은 1970년에 영국과 스위스 공동 제작으로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한 영화 <제라드의 모험>을 만들었지만, 불행히도 이 영화는 감독의 재능도 발휘되지 못했고, 흥행면에서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나마 같은 해에 제작한 <[[딥 엔드]]>는 다행히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 [[데이비드 린치]]가 훌륭한 컬러 영화라 칭찬했을 정도다.],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의 호평 이후 배급상의 문제로 많은 관객들을 동원하지 못한채 컬트작으로만 남고 말았다. 한동안 [[유실 영화]]로 꼽힐 정도였는데 2011년 새로 복원되면서 그나마 보기 쉬워졌을 정도. 1972년에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 <킹, 퀸 그리고 잭> (1928)을 각색한 <왕, 여왕, 불량배>를 제작했으나, 역시나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처참하게 실패하면서 스콜리모프스키는 한동안 제작비를 투자받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 영미권에서 제작한 작품 중 한편도 흥행에 성공한 작품이 없었기에, 이 시절 제작자들에게 전화를 걸 때마다 첫마디로 “저는 스콜리모프스키라고 하는데 혹시 제 이름을 들어보셨나요?”라고 물어보는 게 일상이었다고 한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1978년작 <[[외침(영화)|외침]]>이 [[쳐다보지 마라]], [[위커맨(영화)|위커맨]] 등과 함께 1970년대 영국식 기괴한 공포 영화로 주목받고 [[칸 영화제]]에서 [[칸 영화제/그랑프리|심사위원대상]]을 타면서였는데, 이때의 비평적 주목을 탄력으로 삼아 [[제러미 아이언스]]를 주연으로 만든 차기작 <[[달빛 아래서(영화)|달빛 아래서]]>가 비평과 흥행 모두 성공하면서 스콜리모프스키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달빛 아래서(영화)|달빛 아래서]]>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1984년작 <성공은 최고의 복수>[* 여담으로 [[한스 짐머]]의 영화 음악 감독 데뷔작이기도 한데, <[[달빛 아래서(영화)|달빛 아래서]]>에서 한스 짐머가 일렉트로닉 음악 일부를 담당하던 인연으로 그를 발탁했다.]과 1985년작 <[[등대선(영화)|등대선]]>[* 그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서 특별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은 일반적인 배급 루트를 구하지 못해 일부에서만 상영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그 후에도 <[[백야(미국 영화)|백야]]>에 출연하는 등 배우 활동과 감독 활동을 겸하며 [[이반 투르게네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봄의 급류> (1989), [[비톨트 곰브로비치]]의 소설 '페르디두르케'를 원작으로 한 <30 도어 키>[* 고국 폴란드의 소설임에도 영국에서 제작하느라 영어 영화가 되었는데, 본인의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507021009|인터뷰]]에 따르면 그 점 때문에 매우 싫어하는 영화라고 한다.] (1991)를 감독했지만 호평에도 불구하고 역시 반향을 얻지 못한다. 결국 계속되는 침체로 인해 스콜리모프스키는 한동안 감독생활을 접고 2000년대 말까지 영화를 만들지 않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전업 화가로 전향해 활동을 하며 지낸다. [* 감독 활동을 쉬는 와중에도 제작비를 벌기 위함인지 [[팀 버튼]] 감독의 [[화성침공]],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이스턴 프라미스]] 등 배우로 출연한 작품들은 알음알음 있다.] 그러던 도중 로스앤젤레스에서 폴란드로 귀국해 2008년 <[[안나와의 나흘밤]]>을 찍으며 17년만의 신작을 내서 주목을 받았고, 이어 찍은 2010년작 <[[이센셜 킬링]]>은 당해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해 특별 심사위원상을 수상하고 감독의 오랜 지지자였던 [[카예 뒤 시네마]]에서도 <[[달빛 아래서(영화)|달빛 아래서]]> 이후 29년만에 그해 베스트 10으로 선정하는 등 감독의 성공적인 귀환을 알렸다. 2015년에는 계속해서 폴란드에서 촬영한 '[[11분(영화)|11분]]'이라는 영화를 내놓아 [[제7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았다. 2022년, '[[당나귀 EO]]'를 통해 자그마치 '''33년'''만에 [[제7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받아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2008년 <[[안나와의 나흘밤]]>으로 17년만에 복귀했을 당시 [[제61회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받긴 했으나, 그 이후로 낸 두 작품은 모두 [[베니스 국제 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했었다.] 참고로 초청 감독 중 최고령자다. 그리고 당나귀 EO는 국내에서 최초로 극장에 정식 개봉하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 감독의 작품이 되었다. == 필모그래피 == ||
'''{{{#white 연도}}}''' || '''{{{#white 제목}}}''' || '''{{{#white 연출}}}''' || '''{{{#white 각본}}}''' || '''{{{#white 출연}}}''' || '''{{{#white 비고}}}''' || || 1960 || 순진한 마법사[br]''Niewinni czarodzieje'' || || O || O || [[안제이 바이다]] 감독작 || || 1962 || [[물속의 칼]][br]''Nóz w wodzie'' || || O || || [[로만 폴란스키]] 감독작, 공동 각본 || || 1964 || 신원미상[br]''Rysopis'' || O || O || O || 장편 연출 데뷔작 || || 1965 || [[부전승(영화)|부전승]][br]''Walkower'' || O || O || O || || || 1966 || 장벽[br]''Bariera'' || O || O || || || || 1967 || [[출발(영화)|출발]][br]''Le départ'' || O || O || || 제17회 [[베를린 국제 영화제]] [[베를린 국제 영화제/황금곰상|황금곰상]] 수상작 || || 1970 || 제라드의 모험[br]''The Adventures of Gerard'' || O || O || || || || 1970 || [[딥 엔드]][br]''Deep End'' || O || O || O || || || 1972 || 왕, 여왕, 불량배[br]''King, Queen, Knave'' || O || || O || 제25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 || 1978 || [[외침(영화)|외침]][br]''The Shout'' || O || O || || 제31회 [[칸 영화제]] [[칸 영화제/그랑프리|심사위원특별그랑프리]] 수상작 || || 1981[* 제작은 1967년에 했으나, 폴란드 당국의 상영금지로 인해 1981년이 되어서야 재편집 한 후 칸 영화제에서 처음으로 공개했다.] || 손들어![br]''Rece do góry'' || O || O || O || || || 1982 || [[달빛 아래서(영화)|달빛 아래서]][* 원제를 음독한 '문라이팅', 혹은 '야근'이라는 제목으로도 불린다.][br]''moonlighting'' || O || O || O || 제35회 칸 영화제 [[칸 영화제/각본상|각본상]] 수상작 || || 1984 || 성공은 최고의 복수[br]''Success Is the Best Revenge'' || O || O || || 제37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 || 1985 || [[등대선(영화)|등대선]][br]''The Lightship'' || O || O || || 제4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 || 1985 || [[백야(미국 영화)|백야]][br]''white nights'' || || || O || || || 1986 || 심취[br]''Mesmerized'' || || O || || || || 1987 || 빅 샷[br]''Big Shots'' || || || O || || || 1989 || 봄의 급류[br]''Torrents of Spring'' || O || O || O || 제42회 칸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 || 1991 || 30 도어 키[br]''30 Door Key'' || O || O || O || 제48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 || 1996 || [[화성침공]][br]''Mars Attacks!'' || || || O || || || 2000 || 비포 나잇 폴스[br]''Before Night Falls'' || || || O || || || 2007 || [[이스턴 프라미스]][br]''Eastern Promises'' || || || O || || || 2008 || [[안나와의 나흘밤]][br]''Cztery noce z Anna'' || O || O || || || || 2010 || [[이센셜 킬링]][* '특급 살인'이라는 제목으로 불리기도 한다.][br]''Essential Killing'' || O || O || || 제67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베니스 국제 영화제/심사위원대상|특별 심사위원상]] 수상작 || || 2012 || [[어벤져스(영화)|어벤져스]][br]''Marvel's The Avengers'' || || || O || || || 2012 || 비엔나전투 1683[br]''11 settembre 1683'' || || || O || || || 2015 || [[11분(영화)|11분]][br]''11 minut'' || O || O || || [[제7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 || || 2022 || [[당나귀 EO]][br]''EO'' || O || O || || [[제75회 칸 영화제]] [[칸 영화제/심사위원상|심사위원상]] 수상작, 첫 국내 극장 공식 개봉작. || == 기타 == * 상술했듯 힘들게 제작비를 조달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던데다가, 배급망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했고, 감독작들도 그리 유명한 편이 아니다.[* 심지어 국내의 경우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 감독작이 '''단 한 편도 없었다.''' 홈 비디오로는 [[등대선(영화)|등대선]]이 VHS로, [[달빛 아래서(영화)|달빛 아래서]]가 DVD로 나온 적이 있다. [[당나귀 EO]]가 국내에서 [[2023년]] [[10월 3일]] 정식 개봉이 확정되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일본은 그나마 사정이 낫긴 한데 [[딥 엔드]]가 조춘早春이라는 이름으로 개봉해 예전부터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었고 복귀 후 회고전을 가지고 꾸준히 정식 개봉해 DVD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는 [[당나귀 EO]]의 모티브가 된 [[당나귀 발타자르]]를 만든 [[로베르 브레송]]과 별반 다르지 않다. 실제로 [[로베르 브레송]]도 은퇴작이었던 [[돈(1983)]]를 MK2 설립자인 마린 카미츠와 프랑스 정부에서 지원을 받아서야 겨우 만들 수 있었다. 그 바람에 '[[달빛 아래서(영화)|달빛 아래서]] 감독'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어벤져스(영화)|어벤져스]]에서 초반에 [[블랙 위도우(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블랙 위도우]]한테 두들겨맞은 러시아 악당 할아버지'로 설명하는 게 빠를 거라는 슬픈 농담도 있다. 국내에서 [[당나귀 EO]]가 개봉하는 [[2023년]] [[10월 3일]] 이후에는 이 농담도 조금씩 사라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 그리고 크지 않은 인지도 탓에 작품들의 복원이나 회고전 [* 그나마 회고전은 간간히 하는 편인데, 가장 최근에는 2021년쯤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서 전작 회고전을 가졌다. 한국에서는 2009년 하술한 회고전이 처음 열렸고, 2023년 당나귀 EO 개봉 전 10편 정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회고전이 열렸다.], 혹은 DVD/블루레이 출시도 요원했던 편이어서, 감독 본인도 2011년 영국판 <[[딥 엔드]]> 블루레이 발매를 알리는 [[이용철(평론가)]]가 쓴 [[씨네21]] 기사에서 "내 영화를 접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다"고 말한 바가 있다. 하지만 동시에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작품이 푸대접만 받고 있다는 사실에 약간은 실망한 듯이 '''"자신이 만들었던 작품을 단 한 작품이라도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터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나마 [[이용철(평론가)]]는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일부 작품을 미리 봤기 때문에 예지 스콜리모프스키의 매우 예리한 질문[* 예를 들어서 해당 영화를 어떤 경로로 볼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 등이었다고 한다.]에 답한 끝에 인터뷰에 성공할 수가 있었다. [* 상당히 자존심 강한 성격인지, 인터뷰 하러 온 기자들에게 어떻게 봤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제대로 대답 못하면 면박까지 줬다고 한다. 심지어 [[달빛 아래서(영화)|달빛 아래서]]는 성공을 거뒀음에도 이용철이 기획해서 한국에서 발매된 DVD가 최초 DVD였다고. 2023년 기준으로는 그래도 많이 보기 쉬운 축에 내려온 편이다. [[당나귀 EO]]가 성공을 거두자 기존작들이 MUBI나 크라이테리온 채널에서 스트리밍하고 블루레이 발매가 잡힐 정도. 다만 197-80년대 영어 영화는 여전히 보기 힘든 게 많다.] [[http://m.cine21.com/news/view/?mag_id=66933|#]] 실제로 친구인 [[안제이 바이다]]나 [[로만 폴란스키]]는 물론이고 같은 폴란드 출신 영화 감독들인 [[안드레이 줄랍스키]]나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에 비교해봐도 관심도가 적은 편. 해외에서도 상황이 크게 다르지 않아,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펴낸 스콜리모프스키 총서에서도 참조할 최근 비평을 찾는게 힘들어 196-70년대 자료를 찾아야 했다는 얘기가 나온다. * 한국에서는 2009년 [[전주국제영화제]] 회고전 당시 내한한 적이 있다.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90507021009|인터뷰 링크]] * 젊었을 적 재즈 뮤지션으로 활동한 전적 때문인지 영화 음악에 일가견이 있는 감독으로도 유명했는데, 전술했듯 그 [[한스 짐머]]를 처음으로 영화 음악가로 발탁해서 자신의 80년대 영화 음악을 담당하게 하는 등 탁월한 안목을 자랑했다. 이외 뮤지션들하고 친했는데, [[캣 스티븐스]]와 친교가 있어서 그에게 '[[딥 엔드]]'에 실릴 곡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게 바로 [[Tea For The Tillerman]]에 실린 'But I Might Die Tonight'. 의외로 업계에서 발이 넓은 사람이라서 [[잭 니콜슨]], [[마르그리트 뒤라스]]랑 안면이 있었다고 한다. * 데뷔 전 사라고사 매뉴스크립트 및 폴란드 시절 초기작에 출연한 배우 엘주비에타 치제프스카(Elżbieta Czyżewska)와 결혼했으나 [[부전승(영화)|부전승]] 찍을 당시 이혼했다. 이후 배우 요안나 슈체르비츠(Joanna Szczerbic) [* 폴란드 현지에서는 섹스 심벌 이미지를 내세워 유망주로 꼽혔던 배우였다. 예지가 엘주비에타랑 사귀기 전에도 어느 정도 썸이 있었으나 당시에 거부했고, 이후 이혼을 거친 후 결혼했다. 결혼 후에는 활동을 줄이더니 폴란드를 떠난 후로는 배우 활동을 그만두고 육아에 전념했다. 성공은 최고의 복수에서 아들들과 함께 출연했다.]와 결혼해서 아들 둘을 두었다. 두 아들 모두 시나리오 작업 등 아버지의 영화 작업에 참여했으나, 차남 유제프는 2012년 인도에 체류하는 도중 패혈증으로 사망했다. 2014년 아내 슈체르비츠와 사별한 이후, 스콜리모프스키와 수년간 함께 일해온 (편집,각본,제작) 1973년생 에바 피아스코프스카(Ewa Piaskowska)와 살고 있다. * 정치적으로는 [[브로니스와프 코모로프스키]]를 지지해 선거 활동을 돕는 등, [[시민연단]] 쪽 리버럴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분류:폴란드 영화 감독]][[분류:폴란드 남성 작가]][[분류:폴란드 남배우]][[분류:폴란드의 화가]][[분류:1938년 출생]][[분류:우치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