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관련 문서, top1=한민족)] [include(틀:관련 문서, top1=만주 종족 계보)] [include(틀:한국의 역사)] [include(틀:만주의 역사/고대)] [include(틀:위서)] [목차] == 개요 == '''예맥(濊貊)'''이란 [[한반도]] 중북부, [[만주]] 중남부[* 지금의 [[지린성]]과 [[랴오닝성]] 일대 [[동북 3성]] 부근], [[연해주]] 남부 등지에서 거주하던 민족이며, [[한반도]] 중남부에서 거주하던 '''[[삼한|한(韓)족]][* 그러나 [[마한]], [[변한]], [[진한]] 또한 형성 초기부터 이미 [[고조선]] 출신 예맥족들이 상당수 남하하여 살고 있었던게 문헌상, 고고학상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삼한]] 항목 참고.]과 함께 현대 [[한민족]]의 직계 조상이 되는 고대 민족이다.''' '예맥([[濊]][[貊]])족' 자체가 원래부터 하나의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설과, '예(濊)족'과 '맥(貊)족' 두 민족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라는 설이 있다. 만약 후자의 설을 지지할 경우에도 [[고구려]]가 본격적으로 두 민족을 융합시킨게 되니 결론적으로는 두 가지 설이 다 맞을수도 있다. [[http://www.okpedia.kr/Contents/ContentsView?localCode=krcn&contentsId=GC05311885|참고]] [[고구려]]와 [[발해]]가 멸망한 뒤 예맥족 일부는 중원 세력이나 만주 세력으로 동화되기도 했지만[* 주로 고구려와 백제 멸망을 전후로 한 시기에 이민족 국가로의 동화가 이루어졌다. 물론 [[요동 반도]] 및 [[요서]]의 예맥인들은 수백여 년에 걸친 [[발해부흥운동]] 사례와 원간섭기에 고려 왕족을 [[심양왕]]에 임명한 사례,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요동 정벌]] 사례 및 시도, 그리고 [[연개소문]]을 영웅으로 여겼다는 조선 초기의 기록을 보았을 때 조선 초•중기까지는 예맥인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박씨 등 일부와 [[광해군]] 시기 조선으로 이주한 이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한(漢)족과 만주족들에게 동화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은 한반도 세력이 되어[* 마한, 진한, 변한을 흡수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이들을 가리키던 [[삼한#s-2|삼한(三韓)]]이라는 정체성까지 이어받았다.][* 사실 고구려는 마한이나 변한 계통이 아닌 부여 계통이지만, 전근대 시절에는 저 마한이나 변한 중 하나가 이어졌다고 여겨졌다. 그게 아니더라도 부여계인 예맥계와 남부 지방에 있던 한인들은 혈통과 문화적으로도 한 카테고리라, 어떻게 해석하든 결국 같은 문화집단이라고 보는게 옳다.] 지금의 [[한민족]] 계보로 이어졌다. [[선사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우세를 차지한 예맥족이 [[원삼국시대]]~[[삼국시대]]부터 자칭·타칭 [[삼한|삼한(三韓)]]이라 불린 것으로 보아 크게 보면 서로의 정체성은 하나의 세력권으로 점차 동화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현대 한국인을 이루는 한민족은 예맥족 중심 국가였던 [[고조선]]과 [[부여]][* 고조선 유민들을 다수 흡수했다.], 그리고 이들의 후손인 [[고구려]][* 고조선계와 부여계 유민들이 부여와 한사군을 역흡수했다.][* 후삼국 통일을 전후로 하여 [[패서]]▪︎[[관서]]▪︎[[영동]] 일대의 고구려 유민들은 [[고려]]를 건국해 같은 고구려계인 발해 유민들을 대거 흡수한 뒤 신라를 합병, 후백제를 멸망시킴으로써 한민족의 주류로 자리잡게 된다.] 와 [[백제]][* 부여계 유민들이 마한을 흡수했다.][* [[백제멸망전|백제 멸망]] 이후 절대 다수의 백제인들은 [[통일신라]]에 편입, 고구려인, 신라인들과 더불어 한민족의 원류(源類)가 된다.]와 [[신라]][* 고조선 유민들이 진한 지역에 정착한 뒤 발전, 진한이 되었으며, 그 중 사로국(신라)이 영토국가화 되면서 진한 전체를 장악했다. 이후에는 변한을 이은 가야를 흡수했다.], 또한 [[옥저]]와 [[동예]]를 모두 계승했지만 한족과 만주족은 해당 국가들을 계승하지 않았다.[* 예맥계 주민들을 동화시켜 흡수한 경우는 있을지언정, 역사귀속 의식이나 문화계승이 이뤄진 사례는 없다. 당연히 문화적 계승성이 이뤄지지 않았는데 예맥을 중국사나 만주사로 편입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특기할만한 사실은, [[한민족]]의 경우 수백년에 걸쳐 지속된 [[고구려부흥운동]]의 영향으로 예맥의 직계이자 계승자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하게 자리잡았다는 사실이다.] == 예맥 == >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예맥'''이 있고, 동쪽은 '옥저'가 있으며, 북쪽은 '부여'에 접한다. > ... '예왕의 도장'이라 하니 나라의 옛성에 '예성'이 있다. 대개 근본은 '''예맥'''의 땅이다. '부여'가 그 가운데에서 왕노릇을 하고, ... >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큰 바다에 임하여 거한다. 그 땅의 형태는 동쪽과 북쪽은 좁고 서쪽과 남쪽은 길다. 가히 천리이다. 북쪽으로 '읍루'와 '부여'에 접하고, 남쪽으로 '''예맥'''에 접한다. 실상 '''예맥'''이라는 명칭은 고대 사서에서 매우 넓은 범위로 제시되는 일반적인 종족명이다. 위의 <동이전>이라는 하나의 사료 내에서도 예맥은 고구려와 동옥저의 남쪽, 즉 한반도 동부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이기도 하며 (일반적으로 언급하는 [[동예]]) 혹은 부여와 같은 [[송화강]] 일대에 있던 고대 국가와도 연관을 가진다. 삼국지에서 종족 명칭이 아니라 국가 명칭으로서의 “예맥”은 [[동예]]를 지칭한다. 항목 참고. 한편으로 예맥은 예+맥 이라는 주장 역시 존재한다. 이는 아래 항목들을 참고할 것.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따르면 예족(동예를 의미한다)은 [[호랑이]]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곽박의 《이아》(爾雅), 《일본서기》 등을 근거[* [[고구려]]를 [[맥#s-2|박(狛)]]이라고 쓰고 [[곰|코마(こま)]]라고 읽었다.]로 '맥(貊)'이 [[곰]]을 의미했고, 예족과 맥족의 관계가 [[단군신화]]에 반영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즉 하늘과 태양을 숭배하는 천신족(天神族)이 곰을 토템(totem)으로 하는 맥족(貊族)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예족(濊族)을 평정하고 복속시키는 사실을 설화로서 전해주는 신화(神話)로 남아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당연히 정설이라고 볼 고고학적 증거는 아직 부족하다. 어디까지나 신화를 해석하는 설 중 하나일 뿐임을 유의하자.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318820|#]][* 출처 : 위키백과 한글판, 원출처는 한국사 1권(1973), 한국민족문화대백과로 제시되어 있음. 추가로 제시된 링크 (# 부분)의 경우, 신용하 교수의 저작을 언급하는데 신용하 교수는 2000년대, 즉 70대까지는 일정기와 독립운동 단체, 독도 영유권 등을 다루던 학자였지 고대사학자는 아니다.]삼한인들이 곰을 토템으로 했다는 설도 있다. == 예(濊): [[부여]], [[옥저]], [[동예]] == 일단 아래의 모든 항목은 '''학문적으로 현재 완전히 정립된 관점은 아니다.''' '''예'''는 다양한 형태로 사서에 제시되는데, [[동예]]라고 흔히 한국사 교육과정에서 알려진 '''[[영동]] 지역의 예(濊)'''가 예족의 대표적인 일파이다. >당나라 가탐(賈耽)은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에 ‘지금 신라 북계인 명주(강릉)는 예(濊)의 고국’이라고 썼다. 또 다른 하나의 예와 관련해서는 '''예'''[* 穢, 《[[동사강목]]》 등에서는 濊로 혼용하여 기재. 穢라는 한자에 '더럽다'는 의미가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이기도 하며, 정확하게 ‘종족이름’이라는 훈만 가진 한자는 濊라서 그런 듯 하다.] 세력을 말한다. 이 예 세력은 [[위만조선]]의 북부, 한사군 중 현도군, [[부여]] 등의 고대 국가 집단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기록에도 등장하지 않다가 전한 세종 무제 시기에 있었던 창해군 복속 사업과 당시의 군주였던 예군 남려와 관련된 기록으로 인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위만조선과 느슨한 형태의 연맹을 이루었던 것으로 보이며 무제에 의한 별도의 창해군 복속사업은 실패했고, 이후 위만조선 멸망 당시 현도군의 일부로 편입되었다가 고구려 등의 기반 지역으로 바뀌었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명확한 구분 기준은 아직 알 수 없다. 고조선 멸망 이후 기록된 《[[후한서]]》와 《[[삼국지]]》에서 동예의 역사 파트는 《[[사기]]》와 《[[한서]]》의 <조선열전>을 복붙해놓았다. == 맥(貊): ([[고조선]]), [[고구려]] == '''맥'''이라는 민족에 관해서는 조선 시대 실학자들 이후 다양한 가설들이 나왔으나 근래의 가설은 맥을 주로 '''[[고구려]]'''와 연관지어 이해하고 있다. [[동로마제국]]에서는 고구려를 맥과 관련하여 '무쿠리(Mucuri)'라고 불렀는데 이는 '맥+고려'라는 의미이다. [[돌궐]] 역시 맥고려라는 의미의 '뵈클리(Bökli)'라고 고구려를 칭하였다[* 항간에는 맥고려가 [[말갈]]을 의미하거나 [[발해]]를 칭한다고도 주장하지만 동로마와 돌궐에서의 기록이 7세기에 쓰여졌다는 점에서 발해 건국시기나 말갈족의 등장시기를 고려했을 때 현실성이 떨어진다.] 여호규, 송호정, 김현숙 등 고대사 사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가설은 '예맥'으로 분류되는 [[지린성]]과 [[랴오닝성]] 일대의 집단 중에서 기원전 3세기 이후 구별되어 '''구려, 고구려''' 등으로 분류되는 집단이 주변의 '예'와 구별되는 '맥'의 정체성을 발현시켰다는 것이다. 맥계는 이와 같이 [[고구려]] 건국 및 확장시에 보다 확실하게 대두된다. 물론 고구려 세력이 유일한 맥계 공동체는 아니었고, 고구려 통합 과정에서 '''대수맥(大水貊), 소수맥(小水貊), 양맥(梁貊)''' 등이 편입된 것이다. 중원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세력이었기 때문인지, '맥'을 고구려 세력의 비칭으로 사용한 예가 많다. 대표적으로 북송 시대에 [[고려]] 사신의 행패를 [[소동파]]가 비난할 때 비칭으로 쓰인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근대 사학자들의 경우 과거 《[[맹자]]》 등의 중국 고서에 나오는 '맥적' 내지 '맥'을 예맥과 연관시켜 왔지만 《맹자》나 《[[한서]]》가 저술되던 시대에 이민족의 족보를 따져 가면서 종족 명칭을 기술하지는 않아 역사학계에서는 진지하게 다루지 않고 있다. 대체로 선진시대 문헌의 '맥'은 북방민족의 범칭으로 해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표적으로 '동이'라는 명칭은 현대의 우리가 보기에는 한반도 고대 국가와 연관되지만, 《맹자》 이전의 선진시대 문헌 중에서는 산동 지방의 내이 세력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이러한 명칭의 혼용은 고대 중국에서 흔히 발견되는 사례이다.]. 게다가 '맥'이라는 명칭은 예맥 외에도 '호맥, 만맥' 등 매우 많으며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맥은 이민족을 가리키는 일반명사에 가깝다고 인지해야지 아무 맥이나 다 예맥에 갖다 붙여서는 안된다는 것이 현대적 관점이다. 이 “일반적인 이민족을 뜻하는 호칭”으로서 쓰인 것 때문에 [[위말갈]]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삼국사》(三國史)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명주]](溟州)는 옛날의 [[예#s-5|예국(穢國)]]인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도장'(濊王之印: 예왕지인)을 발견해 바쳤다.” >“[[춘천시|춘주]](春州)는 예전의 [[신사우동|우수주]](牛首州)인데 옛날의 [[맥#s-1|맥국]](貊國)이다.”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도 하고, 혹은 평양성이 맥국이라고도 하였다.” >---- >《삼국유사》 제1권 <기이> 제1 -마한- 中. 《삼국유사》의 지역 인식은 이러한 변화를 잘 반영한다. 여기에 나오는 명주는 [[영동]]이며, 삭주는 영서 지방을 의미하는데, 현대의 영동 지방은 '예'로 불렸으며 [[춘천]]을 중심으로 한 영서세력과 평양성[* 왜 평양성을 놔두고 영서를 고구려 취급하냐고 할 수 있는데 평양성은 삼국통일 이후에는 전쟁피해로 인한 황폐화와 국경지대라는 문제 때문에 남북국시기 영향력을 잃었다. 통일신라 당시 신라에 남은 고구려 유민들의 중심지는 평양이 아닌 영서와 [[패서]]지역, 한반도 중부 일대로 보아야 하며 이는 후고구려 세력의 중심이 단순히 평양 등 서북한 지역이 아닌 주로 철원 등 영서인 것과 무관하지 않다.] 등 고구려계 세력을 주로 '맥'으로 칭하고 있는 현실을 잘 알 수 있다. >공은 어려서부터 남다른 모습을 보였고, 일찍부터 뛰어난 용모를 지녔으니, 그 기세가 삼한(三韓)을 압도하였고, 그 이름이 '''양맥(兩貊)'''[* '두 개의 맥족'이라는 뜻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의미함]에 드날렸다. >---- >《부여융 묘지명》, 682년 《[[부여융]] 묘지명》의 '양맥'은 '두 [[맥족]]'이란 뜻으로 백제와 고구려가 예맥을 계승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느 시점에서는 단순히 예와 맥을 영동/영서로 구분하지 않기도 하며, 이러한 인식은 예맥이 예+맥으로서 , 또는 예맥이라는 삼한 일통 이후의 단일민족적 관점에서도 동시에 인지될 수 있음을 드러내는 바이다. 이후에도 맥은 예와 함께 고구려 세력을 의미했다. 고유 풍습과 관련된 말로 '맥궁'(貊弓)이나 '맥적'(貊炙) 등을 찾아볼 수 있으며, 특히 맥적은 [[한국 요리]]인 [[너비아니]]와 [[https://www.google.com/search?q=%EB%A7%A5%EC%A0%81%EA%B5%AC%EC%9D%B4&rlz=1C1FGUR_koKR890KR890&source=lnms&tbm=isch&sa=X&ved=2ahUKEwi8s5y6z-3zAhUTJaYKHbK7AXwQ_AUoAXoECAEQAw&biw=2560&bih=1367&dpr=1|맥적구이]]의 기반으로 추측되고 있다. 참고로 [[백제]] 기록에서도 '맥'이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책계왕]] 때 [[낙랑]]이 주동이 되어 맥인과 함께 백제에 쳐들어가서 책계왕이 맞서 싸웠으나 전사했다고 한다. 이것 역시 낙랑이 주동이 되어 고구려계 용병과 함께 백제(한성백제)와 대결했다고 하면 해석이 매우 부드럽다. 백제에서는 고구려의 멸칭으로 '박적'(狛賊)이라고 칭했는데, 외관에서 알수 있듯이, '박(狛)= 맥(貊)'에서 유래했으며, 곰이라는 뜻이다. 고구려도 고조선처럼 곰을 숭상했음을 알수 있는 대목인데, 고조선과의 친연성을 풀수 있는 열쇠인 셈. 흔히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는 일본어에서 고구려=고려의 훈독에서도 알 수 있는데, 일본어에서는 고려를 Koma라고 부르며, Kuma는 곰이라는 뜻이다. 狛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일본어 훈독은 koma이며, 안장왕 후손들은 일본으로 망명했는데, 그들의 성씨도 狛으로 개칭했다고 한다. 백제의 경우, [[웅진]]을 《일본서기》에서 '고마나리'라고 부른 것을 알 수 있다. '고마'는 백제어로 웅(熊)에 해당하는 단어로, 마찬가지로 곰을 뜻한다. == 토착민과 혼재된 경우: [[백제]], [[신라]], [[가야]], [[탐라국]] == '''예맥(濊貊)'''은 고대 만주 지방과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종족명으로, '''[[삼한]]'''계 민족들과 함께 '''한민족(韓民族)'''의 근간이 되는 민족들 중 하나로 보는 게 일반적이다. 그동안 '''예족'''과 '''맥족'''을 사실상 동질적인 민족들로 보는 견해가 주류였으나, 최근의 연구 결과 이에 관한 다양한 이설들이 제시되고 있다.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삼한|한인(韓人)]]과 [[예맥|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 >但取吾躬率所略來'''韓穢''', 令備洒掃言教如此. >---- > 『[[광개토대왕릉비]]』 비문에서. '한예'(韓穢)를 '한'과 '예'가 섞인 별도의 집단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한과 예를 연칭한 것으로 봄이 일반적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예'는 [[동예]], [[옥저]]와 같이 고구려 이외의 한반도 북부인을 지칭하는 언급이며, '한'은 당연히 '삼한' 즉 한반도 남부 지역의 제 부족을 지칭하는 것으로 봄이 매우 타당하다. 북쪽의 한민족과 남쪽의 한민족, 즉 예인(穢人)과 한인(韓人)들의 차이에 대해서는 백제 지배세력과 피지배세력간의 언어 차이를 하나의 단서로 들 수 있다. 《주서》(周書) <이역전>(異域傳) -백제조-에 의하면 >"왕의 성은 부여씨(夫餘氏)이고 이름은 '어라하'라 하는데 백성은 '[[건길지]]'(鞬吉支)라고 부른다. 이것은 한자어로 왕(王)과 같다. 처는 '어륙'(於陸)이라 하는데 한자로 비(妃)가 된다." 고 하여 부여계 언어와 한계(韓系) 토착 언어와의 차이를 드러내주는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지배층 언어와 일반민의 용어 차이로도 해석할 수 있으므로 '''확실한 근거가 되지는 못하나'''[* 실제 [[조선시대]]만 보더라도 사대부들은 '주상' 혹은 '전하'라고 부르고 일반 평민, 백성들은 '나랏님'이나 '임금님', 또는 '상감마마'와 같이 서로 다르게 부른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동시대 [[신라]] 사회나 [[고구려]] 사회가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이 왕을 서로 달리 부른 적이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확실히 '백제만의 특징적인 차이'라고 볼 수도 있으며, 바로 그 점에서 의혹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백제어]] 문서의 '이중언어체계' 문단과 [[반도 일본어설]]을 참고. 다만 특기할 점은 ~지 계통의 존칭접미사는 고구려(막리지 등)부터 가야(한기 등)까지 당시 한반도 전체에서 확인된다는 점에서 반도 일본어설과는 다소 궤를 달리 하는 것으로 보인다.[* 반도 일본어가 실존했다는 전제 하에 반도 일본어는 고대 일본어와 다소 차이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긴 하지만 일단 현전하는 고대 일본어를 비롯한 일본어족 언어/방언들에서 ~지 형태의 존칭접미사는 확인되지 않았다.] [[신라]], [[가야]], [[탐라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반도 일본어설과 관련해 미국 언어학자인 [[알렉산더 보빈]] 교수에 의한 비슷한 지적이 있다. 위처럼 명시적으로 차이가 있는 단어가 있었다고 기록된 건 아니지만 각국의 인명, 지명 등으로 파편처럼 남아있는 각종 단어의 연대에 따른 변천을 근거로 정체불명의 토착어를 예맥계로 보이는 고대 한국어가 대체해나간 것이 아니냐는 가설을 제시했다. 다만 보빈의 경우 일본어족이 상당히 늦게까지 한반도 남부에 잔류해있었다고 주장하는데, 여러모로 고고학적 연구결과와 대응관계가 발견되지 않는 측면에서 한계가 있다. 보빈은 이에 대해 터키 등의 사례를 언급하며 언어적 변동과 고고학적 물적 변동이 일치하지 않을 수 있다고 방어하나, 이는 따지자면 물적 증거를 언어학적 추정을 통해 일방적으로 기각하는 접근이므로 보빈의 시각도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한, '맥=고구려'라는 관점을 보강해서 설명하자면, [[광개토대왕릉비]]의 저 비문만으로 고구려가 같은 예맥계인 예족들도 아예 다른 민족으로 인식했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애초에 고대에는 같은 민족끼리도 부족별로 나뉘어서 싸우거나 각각 다른 나라들로 나뉘어서 싸우는 경우가 많았고, 그 탓에 서로를 별개의 집단으로 구별해서 인식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었다. 비유하자면 [[6.25 전쟁]] 때 [[북한]]이 [[대한민국]]의 국군 포로들을 노역에 동원했다고 해서 이를 근거로 한국과 북한이 서로 다른 민족이 되는 게 아닌 것처럼, 그 당시 고구려 또한 전쟁 포로들을 활용했다고 해서 같은 부여계인 예족과 맥족이 서로 아예 다른 별개의 민족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맥인'인 [[광개토대왕]]이 수많은 민족들 중에서 굳이 '한인'과 '예인'만을 골라 언급한 점으로 보았을 때, '''"예, 맥, 한을 [[광개토대왕/생애#s-7.1|고구려 천하관]]으로 포함해서 생각한 사례가 아니냐"'''고 해석하기도 한다. [[진시황]]이 당시의 중원 천하관에 해당하는 나라들만 통일 대상으로 삼고 이와 관련 없는 이민족 국가[* 초나라처럼 문화적으로 동화된 국가는 제외할시]인 [[고조선]]은 제외한 것 처럼 말이다. 애초에 전근대에는 혈통과 언어가 비슷한 같은 민족들을 부족이 서로 다르고 나라가 다르다는 이유로 침략해서 노예로 삼는 경우가 매우 흔했었다. 대표적인 예로 [[조선시대]] 당시 [[여진족]]들만 해도 서로 부족별로 나뉘어서 치열하게 싸웠었고, 정복한 타 부족민들을 전부 노예로 만든 경우가 많았었다. 극단적으로는 같은 계통의 부족들을 아예 대규모 인신공양과 식인의 대상으로 삼았던 [[아즈텍 제국]]이 있다. 또한 앞서 명기했듯이 예맥이 항시 모든 시간과 공간에서 동등한 존재로서 나타날 필요는 없으며 이것이 인류유전학적 관점이나 고고학과 반드시 조응할 필요도 없다. 인간의 인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 왜곡되며 이를 후대에 압축해서 보는 과정에서 이렇게 편향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근대사학이나 현대의 재야사학의 대표적 오류이다. 예맥의 뿌리는 같으나 시대에 따라 예와 맥으로 분류되어 호칭되기도 했으며, 다만 그 기준이 과학적이고 혈통적인 것이 아니라 고구려, 동예/옥저 등 [[영동]]계열, 후대 백제 등으로 이주한 북방계 한반도 남부인, 부여인 등이 뒤섞여 나타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마땅하다. == 표기 문제 == 이들 세력이나 종족을 '예맥족'이라 표현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문헌상으로 예와 맥은 '예(濊)', '맥(貊)'으로만 존재할 뿐 '예족', '맥족'이라 기록된 적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반대로 예맥을 예와 맥이라는 특정 혈연 민족으로 보는 경우 이들을 '예맥족'이라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헌상에는 羌(강), 氐(저), 凶奴(흉노)라고 나타나는 민족을 [[강족]], [[저족]], [[흉노족]]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신라본기> 극 초반에 등장하여 충돌하는 영서, 영동의 말갈 세력을 활동 영역과 기록 시기로 보아, 한반도 중남부에서 활동하던 이질적인 예맥 집단으로 보기도 한다. 자세한 내용은 [[위말갈]] 항목 참조. [include(틀:원삼국시대 한반도 세력)]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고려)|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같이보기 == * [[성읍국가]] * [[원삼국시대]] * [[고조선]] * [[부여]] * [[옥저]] * [[동예]] * [[삼한]] * [[고구려]] * [[백제]] * [[신라]] * [[갈사국]] * [[비류국]] * [[행인국]] * [[황룡국]] * [[해두국]] * [[개마국]] * [[구다국]] * [[조나국]] * [[주나국]] * [[대수맥]] * [[소수맥]] * [[양맥]] * [[맥국]]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예, version=69, title2=맥, version2=150, title3=만주 종족 계보, version3=50)] [include(틀:문서 가져옴, this=문단, title=한반도의 지도자 목록, version=23)] [[분류:동아시아의 민족]][[분류:예맥]][[분류:한국사]][[분류:고조선]][[분류:부여]][[분류:삼국시대]] [include(틀:포크됨2, title=예맥, d=2022-07-12 00:5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