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임진왜란 전투 목록)] [목차][clearfix] == 개요 == 임진왜란 시기 강원도에서의 마지막 전투로, 강원 감영이 있던 원주의 치악산 영원산성에서 일어난 전투. == 배경 == 강원도에서 쓸만하던 1군 및 자원은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서 소진되었고, 다음으로 2군인 [[여주 전투]]들을 이끌어 온 [[원호(무관)|원호]]의 군대마저 [[시마즈 요시히로]]의 대군에 맞서다가 역부족으로 7월 27일(음력 6월 19일) 패배했다. 8월 중, [[시마즈 요시히로]]의 군이 금화에서 춘천, 홍천을 거쳐 원주로 향했다. 8월 중, [[모리 요시나리]]의 4군이 동해안으로 북상해 삼척, 정선, 영월, 영주, 단양, 홍천, 평창을 거쳐 원주로 향했다. 강원감영이 있는 원주 읍성은 평지라 방어하기에 좋지 못 했다. 이에 원주 목사 김제갑과 군민 4천명은 원주 동남쪽 치악산 기슭 영원산성으로 식량-무기 한 달분을 쉴새없이 옮기며, 성을 수리하고, 왜적에게 던질 돌 등을 비축해 방어 준비를 했다. == 전개 == 9월 28일(음력 8월 23일), 왜군이 영월과 주천을 지났다고 보고가 들어왔다. 이에 김제갑은 휘하 장수 박종남에게 군사를 주어 치악재(가리파 고개, 가리평)에 매복을 명령했다. 하지만 박종남이 명령을 듣지 않고 냇가에서 군사들과 쉬다가 기습공격을 받아 군사만 잃고 돌아왔다. 9월 29일(음력 8월 24일), 모리 가쓰노부의 군 2천명, 아키즈키 다네나가의 군 1천명이 원주읍성에 도착했으나 성은 비어 있었다. 일본군은 매복이나 기습을 우려해 읍성을 조심히 수색하였다. 마침 어린아이를 데린 노인을 잡아 어린아이의 목숨을 위협하자 노인이 군민들이 영원산성으로 갔다고 밝혔다. 9월 30일(음력 8월 25일), 일본군은 항복을 권하는 글을 보냈으나, 김제갑은 그 왜군을 죽이고 결사항전의 각오를 다졌다. 주변 높은 다섯 봉우리에 척후병을 두어 감시하였다. 10월 1일(음력 8월 26일), 다섯 봉우리의 척후병들이 왜군이 올라온다는 신호를 보냈다. 일본군은 영원산성이 공격하기 어려운 좁은 계곡이라 공략을 못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절벽 쪽 산성이 허술함을 알고, 수십명의 결사대를 뽑아 성 안에 침투하게 하였다. 이에 성문이 열리고 백병전이 열린 뒤 일본군이 승리하게 되었다. == 이후 == 일본군이 이겼으나 일본군도 절반 가량 손실되는 큰 피해를 입어서, 모리 가쓰노부와 아키즈키 다네나가의 군은 원주에서 이동하지 못하고, 4군 사령관 [[모리 요시나리]]에게 지원부대를 요청하고, 4군이 재정비하는데 큰 시간과 자원을 들이게 되었다. [[분류:임진왜란/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