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hite 연헌성}}}''' || || '''{{{#white 국적}}}''' ||[[고구려]] → '''[[당나라|당]]''' || || '''{{{#white 당 시호}}}''' ||'''변국 장공(卞國 庄公)''' || || '''{{{#white 이름}}}''' ||연헌성(淵獻誠) || || '''{{{#white 자}}}''' ||헌성(獻誠)[* 본인 묘지명 기록인데 희한하게 이름이랑 자가 똑같다.] || || '''{{{#white 이명}}}''' ||천헌성(泉獻誠) || || '''{{{#white 아들}}}''' ||연현은, 연현정, 연현일 || || '''{{{#white 아버지}}}''' ||[[연남생]] || || '''{{{#white 형제}}}''' ||[[연헌충]] || || '''{{{#white 묘지}}}''' ||? → 당 [[북망산|망산(芒山)]] || || '''{{{#white 생몰연도}}}''' ||651 ~ 692(만 41세) || [목차] == 개요 == >논하여 말합니다: >...[[연남생|남생]], 헌성은 비록 [[당나라|당실(唐室)]]에 명성을 알렸지만, '''[[고려|본국(本國)]]에서 말할 땐 [[매국노|반인자(叛人者)]]라 불려지는 걸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 > - [[삼국사기]] 개소문 열전 발췌. 저자 [[김부식]]이 남생 헌성 부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다. [[고구려]] 말기의 귀족. 고구려 말기의 실권자였던 [[연개소문]]의 손자이자 [[연남생]]의 아들이다. 아버지 연남생과 함께 고구려를 배반하고 당나라에 항복해 고구려의 멸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구려 멸망 후에는 [[당나라]]에서 공을 인정받아 높은 작위에 올랐다. == 생애 == === 고구려에서 지낸 삶 === ||<-2> '''{{{#white 헌성의 고구려 관직}}}''' || || '''{{{#white 고구려 관등}}}''' ||선인(先人) || 651년([[보장왕]] 10), 당시 [[고구려]]의 실권자였던 대막리지 [[연개소문]]의 맏아들 연남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9살 때 관등 '선인(先人)'에 봉해졌다. 665년, [[고구려]]가 할아버지인 연개소문이 죽자 아버지 연남생이 대막리지의 지위를 잇게 되었다. [[대막리지]]가 된 연남생은 이듬해에 지방의 여러 성을 순시하기 위해 [[수도(행정구역)|수도]]를 비우게 되었다. 묘지명에 따르면 연헌성도 아버지를 따라 나갔다. 그러나 연남생은 수도에 남기고 온 동생들인 [[연남건]], [[연남산]]을 의심하여 수도에 밀정을 파견하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연남건, 연남산은 형이 자신들을 해치려 한다고 생각하여 정변을 일으켰고, 곧 수도를 장악하였다. 이때 연헌성은 숙부들의 손에 형인 [[연헌충]]이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었다. 본인 묘지명엔 당시 연헌성의 나이는 16살이었다고 한다. 지방에 나가 있던 연남생은 수도 [[평양성]]이 동생들에게 장악당했다는 소식을 듣자 고구려의 옛 수도인 [[국내성]]에 숨었다. 이때 연헌성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구원을 청하게 되었다. [[당고종]]은 당나라에 도착한 연헌성을 우무위장군(右武衛將軍)에 임명하였으며, 수레와 말, 비단, 보도(寶刀) 등을 주어 국내성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666년, 연헌성은 아버지 연남생과 함께 당나라에 투항하게 되었다. 묘지명은 연헌성이 당 투항을 주도했다고 한다. 정변이 터지자 '[[국내성|국내고도성(國內故都城)]]'[* 천헌성 묘지명 원문 기록.]에 숨자고 한 것도 연헌성의 아이디어였다. 연남생 연헌성 부자는 여러 추장(酋長), 이장(夷長), 수령(首領)들을 데리고 국내성으로 갔다.[* 이 추장들은 고구려가 거느리던 수백 가지 부족과 그 수령들이다. 평양성에도 92명의 수령이 있었다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다.] 다들 혼란스러워 하고 누구는 맞서 싸우자고 주장했다. 헌성은 홀로 나서서 아버지에게 말하니: >지금 사(使)를 보내 조한(朝漢)[* 조는 조천(朝天)의 줄임말이고 한은 당나라의 별칭이다. 즉 당나라에 조천하자는 뜻.]하여 성심껏 대하면, [[당나라|국가(國家)]]는 [[연남생|대인(大人)]]이 올 것이라는 걸 알고 분명 기뻐하며 받아드릴 겁니다. > >'''그리하여 병마(兵馬)를 청해 합쳐 토벌하는 것'''이 만전(萬全)하며 결승(決勝)할 계(計)입니다. >---- > - 본인 묘지명 중 발췌. '''[[매국|당에 항복하자고 건의하고 있다.]]''' 이 말을 들은 남생은 제이장(諸夷長)[* 원문은 '[[제후]](諸侯)'와 비슷하게 '제이장(諸夷長)'이라 표현했다.]에게: >'''헌성(獻誠)의 언(言)은 심히 가택(可擇)하다.''' >---- > - 천헌성 묘지명 중 발췌. 헌성에게 동의하다. 그리하여 먼저 수령(首領) [[염유]](冉有)[* 연남생 묘지명엔 대형(大兄) 염유로 나온다.]를 보낸 뒤, 연헌성 본인이 직접 가 당고종으로부터 보라색 관복과 금으로 만든 허리띠를 받았다. 묘지명은 연헌성이 당에서 받은 대우가 [[위(삼국시대)|위나라]] [[허저]]과 같았다고 한다. 당나라에 투항한 연남생 덕분에 당고종은 고구려 조정과 군사들의 허실을 잘 알 수 있었고, 이후 연남생을 앞잡이로 삼아 고구려를 침공하였다. 결국 668년에 고구려는 [[평양성]]이 [[평양성 전투(668년)|함락되어 멸망하였다.]] === 당나라에서 지낸 삶 === ||<-2> '''{{{#white 헌성의 당 관직}}}''' || || '''{{{#white 당 작위}}}''' ||'''변국공(卞國公)'''[*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음. 묘지명 원문 기록으론 '습봉(襲封)'.][* 사후 작위 회복.] || || '''{{{#white 당 훈위}}}''' ||상주국(上柱國) || || '''{{{#white 당 관직}}}''' ||우무위 장군(右武衛 將軍)[br]위위정경(衛尉正卿)[br]운휘장군(雲麾將軍)[br]우위 대장군 겸 우림위(右衛 大將軍 兼 羽林衛)[br]원외 치동정원(員外 置同正員)[br]우우림위 상하(右羽林衛 上下)[br]신무군 대총관(神武軍 大摠管)[br]용수도 대총관(龍水道 大摠管)[br]'''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 최종 관직][br]'''우우림위 대장군(右羽林衛 大將軍)'''[* 사후 추증.] || || '''{{{#white 당 검교직}}}''' ||검교 천추자 내사(檢校 天樞子 來使)[* 생전 최종 관직이다.] ||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로 연헌성은 아버지를 따라 당나라의 수도 [[장안]]으로 들어가서 당나라의 이민족 귀족이 되었다. 본인 묘지명엔 668년에 끝난 [[평양성 전투]]과 관련된 서술은 전혀 없다. 갑자기 679년 아버지의 죽음으로 넘어간다. 아버지가 죽자 연헌성은 엄청나게 슬퍼하며 며칠동안 음식을 먹지 않았다고 한다. 이를 불쌍하게 여긴 연헌성의 '조모(祖母)'[* 연개소문의 아내, 연남생의 어머니.]는 손자가 밥을 먹지 않으면 본인도 먹지 않겠다면서 연헌성에게 슬픔을 견디라고 부탁한다. 679년 9월 당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양군(襄軍)'을 이끌고 진압에 참가했다고 한다. 연남생의 시호와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양군은 아마 연남생 연헌성 부자의 사병으로 보인다. 682년 조모가 죽자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나지만 곧 다시 복직했다. [[무주|주나라]] [[측천무후]] 천수[* 天授: 690년∼692년까지 사용됨.] 연간에는 우위대장군(右衛大將軍) 겸 우림위(羽林衛) 벼슬을 지내고 곧이어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으로 옮긴다. 그러던 어느 날, 측천무후가 금과 예물을 상품으로 내걸고 문무관료들 중에서 활을 잘 쏘는 사람 다섯 명을 고르도록 하였다. 이때 내사(內史) 장관보(張光輔)가 연헌성에게 먼저 쏘기를 양보하여 첫 번째로 활을 쏘게 되었다. 그러나 연헌성은 뒤에 있는 우옥검위대장군(右玉鈐衛大將軍) 설돌마지(薛咄摩支)에게 양보했고, 설돌마지는 다시 연헌성에게 양보하였다. 이렇게 엎치락뒤치락하며 순서를 미루다가 연헌성이 측천무후에게 '''"활을 잘 쏘는 사람 중에서 [[한족|한인]]이 아닌 사람이 많으니 당나라 관인들이 활 쏘는 것을 수치로 여길 것 같아 두렵습니다."'''라며 활쏘기를 그만둘 것을 청하였다. 측천무후는 연헌성의 의견을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측천무후 시기 형옥(刑獄)[* 오늘날로 말하자면 사법관부 및 국가정보원 책임자 쯤은 되는 사람이다.] 벼슬을 지내며 위세를 떨치던 내준신(來俊臣)이라는 자가 있었다.[* 잔인한 성격으로 유명했던 관리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큰 죄를 뒤집어 씌워 죽이거나 집안을 망하게 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하루는 내준신이 연헌성에게 [[뇌물]]을 요구하였으나, 연헌성은 응하지 않았다. 잔인한 성격의 내준신은 이에 앙심을 품고 연헌성이 모반을 꾀했다고 모함하였다. 692년, 결국 연헌성은 반역자라는 누명을 쓴채로 목이 매이는 형벌을 받아 [[끔살]]당하고 말았다. 그의 나이 42살일 때였다. 이후 반역자로서 어딘가에 매장된다. 이후 연헌성에게 모함을 씌워 죽인 내준신이 그 죄가 드러나 697년 처형되어 죽게 되었고,[* 내준신은 그동안 온갖 사람들에게 모함을 씌우다가 정작 자신도 밀고를 당해 몸이 찢겨 죽었다.] 측천무후도 연헌성이 억울하게 죽었음을 알고 우우림위대장군(右羽林衛大將軍)을 추증하였으며, 예를 갖추어 아버지가 묻힌 [[북망산|망산(芒山)]]에 다시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사후 신분이 회복된 뒤 '장공(庄公)'이란 시호가 내려진 듯 하다. 본인의 묘지명엔 없지만 손자 [[연비]]의 묘지명에 언급된다. == 기타 == * 아버지 [[연남생]]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험난한 삶을 살다가 간 사람이었다. [[고구려]]에서는 숙부들의 손에 형제가 죽었고 [[당나라]]에 투항해서 잘 먹고 잘 사나 했더니 결국 반역자로 몰려 죽었으니 개인으로서는 파란만장하게 살다가 죽었다. 보통 고구려 [[멸망]]의 주 원인 중 하나로 연남생의 당나라 투항을 꼽는데 <연헌성 묘지명>에 의하면 당나라 투항은 연헌성 본인이 제안하고 주도했다고 되어 있다. 연남생이 이를 허락하자 연헌성이 직접 당나라로 가서 협상하였으니 [[만악의 근원]]인 셈. 물론 연남생이 따로 다른 해볼만한 계책이 있는 상태가 아니었으니 연헌성의 제안이 아니더라도 결국에는 당나라에 항복했을 수도 있겠다. * 아무래도 [[연개소문|핏줄이 핏줄이라 그런지...]] 돌궐과 토번 등 당시 당나라 제1의 전선에서 활약하고 반란이 있던 시기마다 진급해서 동시대 다른 번장들이나 혹은 아버지 이상의 최고위직에 오르는 것을 보면 당에서 16살에 장군을 준 것은 고구려의 위상과 [[연남생|아버지]]빨이었다 치더라도 무인으로서의 기량 자체는 그 이상으로 뛰어났던 모양이다. [[측천무후]] 시기 이민족들 중에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워낙 많으니 중국인들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자처해서 활쏘기 시합을 멈춘 것을 보면 무재도 있고 처신에도 상당한 신경을 쓴 것 같다. <[[삼국사기]]>에서는 [[나라]]를 버리고 당나라에서 귀족이 되어 살았다하여 [[김부식]]에게 반역자라고 호되게 까였다. 특히 함께 당나라에 투항한 아버지 연남생과 함께 '당나라에서는 명성이 있을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반역자가 아니면 무엇이겠느냐.'고 [[세트]]로 혹평을 들었다. == 가족 == 할아버지는 [[연개소문]], 할머니는 존재가 언급된다. 아버지는 [[연남생]], 어머니는 기록이 전무하다. 작은아버지 [[연남산]]은 죽을 때까지 장안 근처에서 살며 관리 생활을 했다. 장안서 남생 헌성 부자와 계속 마주쳤을텐데 서로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의문이다. 형으로 [[연헌충]]이 있다. 형제의 이름에서 돌림자를 제외한 글자를 합치면 충성(忠誠)이 된다. 사촌으로 작은아버지 연남산의 아들 연광부가 있다. 두 사람은 장안에서 계속 마주쳤을 가능성이 있다. 아들로 연현은(淵玄隱), 연현정(淵玄靜), 연현일(淵玄逸)이 있다. 손자인 [[연비]](淵毖)가 있다. 손자의 묘지명에서 시호 '변국 장공(卞國 庄公)'이 언급된다. == 묘지명 == 천헌성 묘지명의 공식 이름은 '太周 故 左位大將軍 右羽林衛上下 上柱國 卞國公 贈 右羽林位大將軍 泉君 墓誌銘'이다. 해석하면 '주나라[* 당시는 측천무후가 주나라, 즉 무주를 세운 시절이다.]의 고(故) 무슨무슨 관직을 가진 천(泉) 군의 묘지명'이란 뜻이다. 헌성이 반역자로 몰려서 죽었다 보니 묘지명 후반부터는 그냥 단순한 연헌성 찬양 뿐이다. * 연헌성의 선조는 고구려국인(高句驪國人), 본인은 소맥지향(小貊之鄕)에서 왔다고 표현했다. * 헌성의 묘지명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아버지 연남생의 항복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하는 점''''이다. 묘지명에서 아버지를 대인(大人), 양공(襄公)으로 부르며 아버지를 크게 도왔다고 한다. * 평양성 전투와 관해 어떠한 언급도 없다. 아마 참전하지 않은 듯하다. * 헌성의 조모, 즉 친할머니가 등장한다. * 아버지 연남생과 사이가 좋았던 걸로 보인다. 연남생은 9살에 선인(先人) 관등을 받았는데 아들인 연헌성도 9살에 선인 관등을 받았다. 아버지가 죽었을 때 크게 슬퍼했다는 기록이 있다. * 묘지명엔 헌성이 16살 때 작은아버지들이 내전을 일으켰다고 한다. 연남건은 헌성의 형 연헌충(淵獻忠)을 죽였는데 연헌충의 나이는 최소 17살 이상이었을거고 관등 또한 연헌성보다 높았을 것이다. * 본인을 아버지 양공의 적자(嫡子)로 표현했다. * 아버지 대는 남(男) 자 돌림, 본인 대는 헌(獻) 자 돌림, 아들 대는 현(玄) 자 돌림 이름을 가지고 있다. * 사병 양군(襄軍)을 거느리고 있던 듯 하다. 또한 아버지의 작위를 세습하여 현존 기록 상 아들 현은까지 삼부자간 이어졌다.[* [[고려]]의 [[최충헌]], [[최이]], [[최항]] 삼부자도 진강, 진양, 진평과 같은 [[진주]]와 관련된 곳을 봉작받아 사실상 세습의 모습을 보였다.] == 대중매체에서 == * 2006년 [[SBS]] 드라마 <[[연개소문(드라마)|연개소문]]>에서는 배우 [[서준영]]이 연기했다. 연남생 역을 맡은 [[안재모]]와 8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데다가 안재모가 동안이라서 부자지간보다는 형제지간으로 보였다는 평이 많았다. [각주] [[분류:651년 출생]][[분류:692년 사망]][[분류:고구려의 인물]][[분류:수당시대/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