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366년 출생]][[분류:1434년 사망]][[분류:곡산 연씨]][[분류:고려의 인물]][[분류:조선의 인물]][[분류:조선 좌명공신]][[분류:조선의 무관]] [include(틀:조선 좌명공신)] ---- ||<-2> '''[[공신#s-1.2.1|{{{#f0ad73 상장군(上將軍)}}}]][br]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 정후공(靖厚公)[br]{{{+1 연사종}}}[br]延嗣宗'''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연사종영정.jpg |width=100%]]}}} || || '''이름''' ||사종(嗣宗)|| ||<|2> '''출생''' ||[[1366년]]([[공민왕]] 15) [[8월 8일]]|| ||[[고려]] [[동북면]] 함주[*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605008_009|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5월 8일 갑신 9번째기사]]] [br] (現 [[함경도]] [[함흥시]])|| ||<|2> '''사망''' ||[[1434년]]([[조선 세종|세종]] 16) [[5월 8일]] (향년 67세)|| ||[[조선]] [[경기도]] 양주군 노원면 [br] (現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로]] 58길87) || || '''[[자(이름)|{{{#f0ad73 자}}}]]''' ||불비(不非) || || '''[[시호|{{{#f0ad73 시호}}}]]''' ||정후(靖厚) || || '''[[작위|{{{#f0ad73 작호}}}]]''' ||[[부원군|곡산부원군]] (谷山府院君)[br]곡산군(谷山君)[br]곡성군(谷城君) || || '''[[본관|{{{#f0ad73 본관}}}]]''' ||[[연(성씨)|곡산 연씨]] (谷山 延氏) || || '''[[무덤|{{{#f0ad73 묘지}}}]]'''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금당1길 34-5[* 묘는 원래 서울특별시 노원구 하계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991년 도시계획 사업으로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로 이장되었다. 2013년 12월 15일 증평군의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었다.] || || '''[[공훈|{{{#f0ad73 공훈}}}]]''' ||[[공신#좌명공신(佐命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 4등[br]회군공신(回軍功臣) 3등[br][[개국원종공신녹권|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 || '''[[부모|{{{#f0ad73 부모}}}]]''' ||{{{#!folding [ 펼치기 · 접기 ] {{{-3 조부}}} [[곡산 연씨]]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112014_002|조부]][* 이름 불명. [[황해도]] [[곡산군]] 출생, [[함경도]] [[함흥]] 사망] {{{-3 아버지}}} [[곡산 연씨]]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112014_002|부친]][* 이름 불명. [[함경도]] [[함흥]] 출생 및 사망 ], 어머니[* 이름 불명. [[함경도]] [[함흥]] 출생 및 사망] }}} || || '''[[자녀|{{{#f0ad73 자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2 [ 자녀 ] }}} [[https://sillok.history.go.kr/id/kea_10004015_001|연경]](延慶) [[https://sillok.history.go.kr/id/kga_10605010_003|연비]](延庇)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507_002259&category=dirSer|연음]](延廕) {{{-2 [ 조카 ] }}} [[https://sillok.history.go.kr/id/kia_10505013_001|연정렬]](延井冽) {{{-2 [ 증손 ] }}}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507_002259&category=dirSer|연보]](延保) [[https://sillok.history.go.kr/id/kka_12012117_003|연정]](延侹) {{{-2 [ 현손 ] }}}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MN_6JOa_1507_002259&category=dirSer|연구령]](延九齡)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510_002084&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연창령]](延昌齡) [[http://people.aks.ac.kr/front/dirSer/exm/exmView.aks?exmId=EXM_SA_6JOa_1510_002084&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연현령]](延玄齡) }}} || || '''경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br]중군총제(中軍摠制)[br]판한성부사겸우군총제(判漢城府事兼右軍摠制)[br]용무사상호군(龍武司上護軍)[br]좌군도총제(左軍都憁制)[br]동북면병마도절제사(東北面兵馬都節制使)[br]길주도찰리사(吉州道察理使)[br]의흥시위사절제사(義興侍衛司節制使)[br]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br]동북면도순문사겸영흥부윤(東北面都巡問使兼永興府尹)[br]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br]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br]수릉관(守陵官) }}} || [목차] [clearfix] == 개요 == >[[부원군|곡산부원군]] 연사종(延嗣宗)이 졸(卒)하였다. 사종의 자(字)는 불비(不非)요, [[신평군|황해도 곡산]] 사람으로서 '''[[함흥부]]'''로 옮겨 산 지가 [[3대#三代|삼대]]가 되었다 >----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404020_003|《세종실록》 16권, 세종 4년 4월 20일 병오 3번째기사]] [[조선]] 초기 [[동북면]]을 방어하던 [[장군]]. [[본관]]은 [[연(성씨)|곡산]](谷山), 자는 불비(不非)이다.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태조 이성계]]와 동향사람이다. == 생애 == [[1366년]] [[8월 8일]] [[고려]] [[동북면]] [[함주]](咸州)[* 現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연사종의 [[곡산 연씨|집안]]은 [[신평군|곡산군]]에서 [[함흥부]]로 옮겨 산 지가 이미 삼대째였다. 그의 부모는 모두 [[함흥]] 사람이고 또한 [[조부]]는 [[신평군|곡산]] 사람이다. 후일 [[위화도 회군]] 때 [[조선 태조]] 휘하에서 장군 진무로서 공을 세워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개국원종공신녹권|개국원종공신]]에 책봉되었고, 후일 [[조선 태종|태종]] 1년 [[제2차 왕자의 난]] 때 대장군으로서 [[정안군]]을 도와 [[공신#좌명공신(佐命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이어 상장군[*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605008_009|여러 번 천전(遷轉)하여 상장군(上將軍)·호조 전서(戶曹典書)를 거쳐 ]]]·호조 전서를 거쳐 곡성군에 봉해졌다.[*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01015_002|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 1월 15일 을해 2번째기사]] ] [[조선 태종|태종]] 9년 김남수(金南秀)·한규(韓珪)·[[이종무]](李從茂)·마천목(馬天牧)·성발도(成發道)·조연(趙涓)등과 함께 [[조선군]] 주요 7인의 한사람으로 군정을 보좌하였다.[*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0910027_006|태종실록 18권, 태종 9년 10월 27일 을축 6번째기사]]] ||<-2><#BF1400> '''{{{+1 여진정벌}}}''' || ||<:><#BF1400> '''시기''' || [[조선 태종]][br][[1410년]] 3월 26일(음력) || ||<:><#BF1400> '''장소''' || {{{#!wiki style="margin: -5px -10px" [include(틀:지도, 장소=함경북도, 높이=224px, 너비=100%)]}}} [br] 現 [[함경북도]] [[경원군]] 전역 || ||<:><#BF1400> '''원인''' || [[아이신기오로 먼터무]]가 이끄는 [[여진족|건주여진]]의 [[경원군]] 약탈 || ||<:><#BF1400> '''결과'''|| 후일 [[조선 세종]]의 [[4군 6진]] 개척을 촉발함 || [[조선 태종|태종]] 10년 요동군을 격퇴한 달단군을 방비하기 위해 [[동북면]] 출신 사종을 군 최고 직위인 [[동북면]][[병마절도사|병마절제도사]][* 현재의 [[중장]]급 ]로 삼고 김승주(金承霔)를 서북면병마도절제사로 삼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001016_003|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1월 16일 계미 3번째기사]] ] 뒤이은 [[조선 태종|태종]] 10년 [[조선]]이 [[경원군]]을 놓고 [[여진족|건주 여진]]의 [[아이신기오로 먼터무]][*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의 6대 선조]와 대치중일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2378|조연]](趙涓)을 대신해 사종을 [[길주군|길주도]]찰리사에 재임명하고[* 연사종을 길주도 찰리사로 조용을 겸 성균관 대사성으로 임명하는 등 인사이동 관직을 제수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004010_002|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4월 10일 병오 2번째기사]]][* [[동맹가첩목아]]에 대한 무마책을 의논하다. 전흥을 경차관으로 보내어 조연을 소환케 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003026_004|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3월 26일 임진 4번째기사]]][* [[동맹가첩목아]]가 이대두를 보내 경원 지방의 침구에 대해 말하고 화호를 청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005001_005|태종실록 19권, 태종 10년 5월 1일 정묘 5번째기사]]] [[조선 태종|태종]] 12년 사종을 다시 [[동북면]]도순문사에 등용하였으며[*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201025_001|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1월 25일 경술 1번째기사 ]] ] [[조선 태종|태종]] 13년 최이(崔迤)·김승주(金承霔)·[[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동북면]]도순문사 겸 [[영흥군|영흥]]부윤에 임명되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1307019_001|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7월 19일 병신 1번째기사]]] 따라서 [[조선 태종|임]][[조선 세종|금]]이 [[동북면]]과 관련된 의제를 논할 때면 사종을 불러 의견을 구하기도 하였다.[* 연사종 등이 [[길주군|길주]]의 창고가 있는 다신 산성 앞에 읍성을 쌓을 것을 건의하다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011019_007|세종실록 2권, 세종 즉위년 11월 19일 을축 7번째기사]]] > 편전(便殿)에서 정사를 보았다. 총제(摠制) 연사종(延嗣宗)이 [[동북면]](東北面)에서 돌아오니, [[조선 태종|임금]]이 묻기를,[br][br] >"동북면에 기근(飢饉)이 거듭 들어 백성들 가운데서 농사를 짓는 자가 없다고 들었는데, 사실 그러한가?"[br] >하니, 대답하기를,[br] >"어찌 짓지야 아니하겠습니까마는, 다만 굶주려서 힘써 농사를 짓지 못하고, 소도 여위어서 갈고 심는 자가 적을 뿐입니다." >---- > - [[태종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0904023_001|17권, 태종 9년 4월 23일 을미 1번째기사]] 편전에서 정사를 의논하며, 총제 연사종에게 [[동북면]]의 기근을 묻다. >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이 계하기를,[br] >근일에 판부사(判府事) [[이화영]](李和英)의 가노(家奴)가 [[동북면|동북 방면]]으로부터 돌아와서 말하기를, ‘여러 [[여진족|야인]] 병영의 천호(千戶)들이 가만히 군마(軍馬)를 점검하며 떠드는 것이 행군할 것 같이 보이고, 공주(孔州) 등지에서는 인심이 부동(浮動)되어 있다.’ 하였습니다."[br] >하니, [[조선 세종|임금]]이 화영(和英)을 불러 물어보니, 화영이 대답하기를,[br] >"사종의 말이 옳습니다."[br] >하였다. 즉시 병조 지인(兵曹知印) [[장효생]](張孝生)을 [[함길도]] 감사와 도절제사(都節制使)에게 보내서 뜬소문이 퍼진 내용을 물어보고, 그로 하여금 잘 효유하여 인심을 안정시키라고 명하였다. >---- > - [[세종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0602004_003|23권, 세종 6년 2월 4일 경술 3번째기사]] 곡산군 연사종이 [[여진족|야인]]들에게 동요가 있음을 아뢰다 후일 [[조선 세종|세종]]에 의해 다시 삼군 도진무[* 도총관(都摠管), 現 [[수도방위사령관]]] 및 중군 도총제[* 도총제사(都摠制使) ]에 역임되었다. == 조선왕실과의 관계 == [[파일:26698E3F574D255020.jpg|width=490]] 現 [[충청북도]] [[증평군]] 도안면 화성리의 묘 >"큰 기업을 협찬함은 진실로 충의한 신하에게 힘입었으니, 큰 공을 생각하여 마땅히 그 죽음을 슬퍼하고, 그 뒤를 영화롭게 하는 은전(恩典)을 두텁게 하여야 할 것이다. 생각건대, 경은 성품이 곧고 밝으며, 도량이 웅대하고 침착하여, 약관(弱冠) 때부터 성취(成就)함이 있었다. 드디어 [[조선 태조|태조]]를 잠저(潛邸)에 좇아 밤이나 낮으로 게으름이 없이 [[위화도 회군|친군을 진무(鎭撫)하였고]], [[조선 태종|태종]]이 장차 머리를 들려고 할 때에 미쳐서는 [[박포의 난|간신(姦臣)들이 흉역(兇逆)을 꾀하여 국가의 안위(安危)가 호흡간(呼吸間)에 있었는데, 경이 갑작스런 즈음에 몸을 바쳐 경각간(頃刻間)에 난(亂)을 평정하였으니]], 도와서 추대(推戴)한 노고와 천명을 도운 공적은 [[공신#좌명공신(佐命功臣)|맹부]](盟府)에 실려 있어, 길이 잊기 어렵도다. >---- > - [[세종실록]]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1607007_005|세종실록 65권, 세종 16년 7월 7일 임오 5번째기사]] 죽은 곡산 부원군 연사종에게 제사를 내리다 [[고려]] 말기 사종의 [[곡산 연씨|가문]]은 곡산의 그저 한미한 [[토성(동음이의어)#s-3|토성이족]] 가운데 하나었지만 [[1400년]] [[1월]]에 발생한 [[제2차 왕자의 난]]을 통해 [[정안군]]을 [[조선 태종|태종]]으로 옹립하는데 기여하며 [[공신#좌명공신(佐命功臣)|좌명공신(佐命功臣)]] 가문으로 위상이 하루 아침에 격상되었다. 아울러 [[조선 왕실]]은 사종이 [[조선 태조|태조]]와 동향(同鄕)이라는 점을 고려해 사종에게 [[조선 태조|태조]]의 아버지 [[조선 환조|환조]]의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50144|정릉]]을 정비하는 중임을 맡기고 그의 사후에도 사종의 충심과 [[무관]]으로서의 공적을 사려해 조정에서 가장 높은 직위인 정1품 [[부원군|곡산부원군]]에 훈봉하였다. 후일 [[곡산 연씨]]들은 선대가 [[공신#좌명공신(佐命功臣)|좌명공신]]이라는 이유로 조정으로부터 특급승진을 당하거나 혹은 죄를 입어도 거진 면죄를 받는등의 특혜를 받았다. 사종의 아들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202022_002|연경]](延慶)은 [[1438년]] 판안주목사에 임명되었고[* [[https://sillok.history.go.kr/id/kda_12202022_002|세종실록 88권, 세종 22년 2월 22일 을미 2번째기사]]] 후일 [[1450년]] 사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ea_10009001_007|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 9월 1일 임인 7번째기사]]] 사종의 조카 [[https://sillok.history.go.kr/id/kia_10505012_001|연정렬]](延井冽)은 옥천 군수(沃川郡守)를 역임한 뒤 20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연안 부사(延安府使)로 승진해 사헌부대사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4656|이서장]](李恕長)등이 부당함을 아룄으며 [[https://sillok.history.go.kr/id/kka_12012117_003|연정]](延侹)은 사종의 증손이라는 이유로 입거를 면책해주었다. 후일 [[조선 숙종|숙종]]은 난에 휩쓸려 직위를 잃은 사종의 후손 [[https://sillok.history.go.kr/id/ksa_12004010_009|연최적]](延最績)을 복직시켜주고 그의 사후 [[영조]] 때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31014|송인명]]의 건의로 최적의 후손들을 면죄하고 재등용하였으며[* [[https://sillok.history.go.kr/id/kua_11411014_001|영조실록 47권, 영조 14년 11월 14일 임술 1번째기사]]] 후일 [[조선 고종|고종]] 역시 최적의 충성과 절개를 사려해 그의 후손들을 다시 등용시켜주었다.[*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1009012_002|고종실록 10권, 고종 10년 9월 12일 정사 2번째기사]]] == 어록 == >[[사치|응견]](鷹犬)이나 [[유흥|성색]](聲色)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일체 멀리 하였다 >----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 5월 8일 갑신 9번째기사 >벼슬이 총질(寵秩)에 이르렀으니 호천(昊天)의 은혜는 뼈가 가루 되어도 갚기 어렵습니다. 지금 [[아버지|아비]]의 상을 만났는데, 기복(起復)하여 신이 당직(當職)이 되었으니 성은(聖恩)이 더욱 무겁습니다. 그러나, 신이 일찍부터 종사(從仕)하여 집에 있으면서 어버이를 섬기지 못하였고, 지금 아비의 죽음도 또한 보지 못하였으니 애통하고 슬픈 마음이 더욱 깊습니다. [[어머니|어미]]가 나이 85세인데 항상 병석에 누워 있으니, 신이 상제(喪制)를 마치고 겸하여 늙은 어미를 봉양하고자 합니다. 엎드려 성자(聖慈)를 빕니다." >---- >[[1412년]] [[3월 12일]] > "내가 초래(草萊)의 천박한 재질(材質)로써 과분히 [[조선 태종|임]][[조선 세종|금]]의 알아주심을 입어 [[부원군|가장 높은 직위]]에 이르렀으되, 항상 조심하여 혹 남의 헐뜯음을 당할까 걱정하였으니, 너희들은 이를 경계하라." >---- >[[1434년]] [[5월 8일]] == 기타 == * [[대마도]]를 정벌한 장군 [[이종무]]와 동기이다. * 사종과 그의 장남 [[https://sillok.history.go.kr/id/kea_10009001_007|연경]](延慶) 부자 모두 사은사로 [[북경]]을 다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