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조선 부대부인(대원군 부인))] [include(틀:대한제국의 친왕비)]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29176e, #29176e 20%, #29176e 80%, #29176e); color: #FFD400" '''대한제국 고종의 생모[br]{{{+1 여흥순목대원비 | 驪興純穆大院妃}}}'''}}}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4a122d, #6d1b43 20%, #6d1b43 80%, #4a122d); color: #FFD400" '''조선 고종의 생모[br]{{{+1 여흥부대부인 | 驪興府大夫人}}}'''}}} || || '''{{{#FFD400 시호}}}''' ||'''여흥순목대원비'''(驪興純穆大院妃) || || '''{{{#FFD400 호칭}}}'''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 ||<|2> '''{{{#FFD400 출생}}}''' ||[[1818년]] [[2월 3일]] || ||[[한성부]] [[종로구|서부 인달방]] 사직동 이옥 사저 || ||<|2> '''{{{#FFD400 사망}}}''' ||[[1898년]] [[1월 8일]] (향년 79세) || ||[[한성부]] [[종로구|북부]] [[운현궁]] || || '''[[능묘|{{{#FFD400 능묘}}}]]''' ||[[흥원|흥선대원군묘]] || || '''[[본관|{{{#FFD400 본관}}}]]''' ||[[여흥 민씨]] || || '''{{{#FFD400 부모}}}''' ||부친 - [[민치구|민치구]](閔致久)[br]모친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 '''{{{#FFD400 부군}}}''' ||[[흥선대원군|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 || || '''{{{#FFD400 자녀}}}''' ||'''2남 2녀'''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임천 조씨|조경호]](趙慶鎬)의 처 장남 - [[흥친왕]](興親王) 차남 - '''[[고종(대한제국)|고종]]'''(高宗) 차녀 - [[조정구(1860)|조정구]](趙鼎九)의 처 }}} || || '''{{{#FFD400 종교}}}''' ||[[기독교]] {{{-2 ([[가톨릭|천주교]] | 세례명: 마리아)}}} || [목차] [clearfix] == 개요 == [[흥선대원군]]의 부인이자, [[흥친왕|흥친왕 이재면]]과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친어머니이다. 후술하겠지만 [[명성황후]]와는 6대조인 여양부원군 [[민유중]]에게서 갈라진 같은 항렬의 자매 뻘이다. 흥선대원군이 며느리로 명성황후를 들이는 데에는 여흥부대부인의 영향이 컸다. 흥선대원군은 [[처가]]에서 며느리를 맞으면 그 외척을 자신의 정치 세력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이득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흥선대원군 '''자신의 외가'''도 여흥 민씨였기 때문에 여흥 민씨는 그에게 큰 힘이 될 수 있었다.[* 즉, [[남연군]] - [[흥선대원군]] - [[고종(대한제국)|고종]] - [[순종(대한제국)|순종]] 4대가 모두 여흥 민씨 가문의 여인과 혼인한 것. 고종 입장에서는 처, 어머니, 친할머니, 며느리가 모두 같은 가문인 셈이다.] 그러나 역사는 다들 알다시피... == 생애 == 12세인 [[1830년]]([[순조]] 30년)에 2살 어린 [[흥선대원군|이하응]]과 혼인했다. 1834년(순조 34년)에 이하응이 흥선정 작호를 받을 때 신인(慎人, 정3품 종친의 처), 1841년([[헌종(조선)|헌종]] 7년)에 흥선도정에 봉해질 때 신부인(慎夫人, 정3품 당상 종친의 부인)의 [[외명부]] 작호를 받았다. 직후 이하응이 흥선군이 되면서 군부인이 되었고, 1864년(고종 1년)에 차남 [[고종(대한제국)|이명복]]이 왕위에 올라 남편은 흥선대원군, 자신은 여흥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원래 여흥부대부인은 [[천주교]] 신자였다. 고종의 [[유모]]로 고용한 박 마르타(? ~ 1868)가 천주교 신자였던 것을 계기로 천주교를 접했으며, 고종이 왕위에 올랐을 때 [[운현궁]]에서 감사 [[미사]]를 드리기도 했다고 한다. [[병인박해]] 때 박 마르타가 순교하면서 한동안 천주교를 배우지 못했다. 그러다 [[1887년]] 한불 조약 이후 천주교가 허용되었는데, 이 때는 흥선대원군도 부인이 천주교를 믿는 것을 막지 않았다. 여흥부대부인은 [[1896년]]([[건양]] 원년)에 조선교구 감목[* [[1911년]]에 플로리앙 드망즈 주교가 초대 주교(당시는 감목으로 불렸음)로 착좌하고 [[천주교 대구대교구|대구대교구]]가 신설되며, 기존 조선교구는 서울대교구가 되면서 교구가 늘어나기 시작했지만 [[1896년]]은 아직 조선교구만 있던 시절이었다.] [[뮈텔]] 주교의 집전으로 [[세례]]를 받았다.[[http://www.catholic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886|참고]] [[1866년]]([[고종(대한제국)|고종]] 3년)에 며느리 [[명성황후]]를 맞아들였으나 남편과 아들 내외가 사이가 멀어지면서 여흥부대부인은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난처한 위치에 놓인다. 남편 편을 들자니 [[여흥 민씨|가문]]을 저버리는 셈이고, 가문 편을 들자니 남편을 저버리는 셈이니. [[임오군란]]이 터지면서 흥선대원군이 입궐할 때 부대부인도 입궐했다. 이 때 그는 명성황후를 본인이 타고 온 [[가마]]에 숨겨 피신시켰다. 마침 이를 본 어떤 궁인이 난병들에게 밀고했다. 이 말을 들은 난병은 가마의 포장을 찢어 땅에 팽개쳤다. 그때 무예별감 홍재희[* 훗날 [[홍계훈]]으로 개명]가 '그 여인은 상궁으로 있는 내 누이다. 그대들은 오인하지 말라'고 소리친 뒤에 명성황후를 등에 업고 궁궐을 빠져나왔다. 여흥부대부인은 자신을 의심하는 흥선대원군을 겨우 설득하여 추격을 막아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흥선대원군은 굉장히 화가 나 한동안 부대부인을 멀리하기도 했다. 결국 이 일로 명성황후가 [[청나라|청]]에 원군을 요청해 청군이 [[임오군란]]을 가볍게 진압했다. 결국 이 일로 남편이 납치당해 텐진에 끌려가고 말았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흥선대원군 납치의 원인을 제공한 셈. 저렇게만 보면 일생동안 남편과 대립했던 것 같지만, 여흥부대부인과 흥선대원군의 금슬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898년]]([[광무]] 2년) 1월, 7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 인해 충격을 받았던 탓인지 흥선대원군도 불과 한 달 뒤에 사망했다. == 가족 관계 == * 부 : [[민치구]](閔鎭永) * 모 : 정경부인 [[전주 이씨]](貞敬夫人 全州 李氏, ? ~ 1873) - 통덕랑 이옥[* [[완성군]]의 동생](李𪸛)의 딸, [[경원군(1842)|경원군]]의 고모 * 동생 : 민태호(閔泰鎬) * 동생 : [[민승호]](閔升鎬, 1830 ~ 1874) - [[민치록]]에게 입적 * 동생 : [[민겸호]](閔謙鎬, 1838 ~ 1882) * 동생 : [[청송 심씨|심응택]](沈應澤)의 처 * 시부 : [[남연군]] 이구(南延君 李球, 1788 ~ 1836) * 시모 : 군부인 [[여흥 민씨]](郡夫人 驪興 閔氏) - 민정중[* [[민유중]]의 형, [[인현왕후]]의 백부](閔鼎重)의 4대손 민경혁(閔景爀)의 딸 * 남편 : [[흥선대원군|흥선헌의대원왕]](興宣獻懿大院王, 1821 ~ 1898) * 장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838 ~ 1869) * 사위 : [[임천 조씨|조경호]](趙慶鎬, 1839 ~ 1914) * 장남 : [[흥친왕]] 이재면(興親王 李載冕, 1845 ~ 1912) * 차남 : [[고종(대한제국)|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1852 ~ 1919) * 차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1861 ~ 1899) * 사위 : [[조정구(1860)|조정구]](趙鼎九, 1860 ~ 1926) 6대조가 여양부원군 [[민유중]]이고, 며느리인 [[명성황후]]와는 먼 친척간이자 같은 항렬, 그러니까 12촌 자매간이다. [[명성황후]]의 5대조는 [[민유중]]의 계실 은성부부인 송씨[* [[인현왕후]]의 생모다.]가 낳은 장남 민진후이고, 여흥부대부인의 5대조는 3번째 아내인 풍창부부인 조씨가 낳은, 민유중의 3남 민진영이다. 여흥부대부인의 동생인 [[민승호]]가 [[민치록]]에게 입적하여 [[명성황후]]의 양오빠가 되었다. [[민승호]]는 이렇게 ' 왕의 외삼촌(실제 혈통 상) '이자 ' 왕비의 오빠(법적) '라는 위치에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매형인 [[흥선대원군]]과 처남인 [[민승호]] 사이가 껄끄러워지면서 여흥부대부인이 매우 난처해졌다. 손자며느리인 [[순명효황후]]와도 6대조인 [[민유중]]에서 갈라져 나온 사이이다. [[순명효황후]]는 [[민유중]]의 차남인 [[민진원]]의 6대손으로, 여흥부대부인에게는 먼 친척 조카뻘이다. 정리하면 여흥부대부인과 [[명성황후]]는 시어머니 - 며느리 관계이지만, [[여흥 민씨]] 집안으로는 서로 12촌 '''언니 - 동생''' 사이이다. 그리고 [[순종(대한제국)|순종]]의 아내 [[순명효황후]]는 이들의 13촌 조카이다. 즉, 어머니와 할머니가 12촌 '''자매'''이므로, 순종은 아버지 고종과 부자관계 임에도 외가([[여흥 민씨]]) 쪽으로는 같은 항렬로써 14촌 '''형 - 동생''' 관계이다. 순명효황후도 순종과 같은 항렬이므로, 순명효황후에게 시아버지 고종은 14촌 '''오빠''', 남편 순종은 14촌 '''동생'''이다. 그런데 [[족보]] 상으로는 그렇지만, 사실 실제 혈통 상 [[명성황후]]와 여흥부대부인은 10대조 민사용에서 갈라진 '''20촌'''이다. 정확히는 민사용의 장남 민여건의 9대손이 명성황후, 5남 민여임의 9대손이 여흥부대부인이다. 부대부인의 할아버지 민단현이 15촌 숙부이자 민진영의 손자 민백술의 [[양자(가족)|양자]]로 가면서 [[민유중]][* 민여건의 증손자.]의 후손이 된 것. 여흥부대부인의 생모 이씨 부인은 [[덕흥대원군]]의 종가 [[도정궁]] 13대 사손 [[경원군(1842)|이하전]]의 [[고모]]이다. 즉, 여흥부대부인은 이하전의 고종사촌이다. 그런데 이하전은 [[전주 이씨]] 기준으로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조카 뻘 항렬이다. 그래서 여흥부대부인 입장에서는 아들과 어머니가 같은 항렬 남매 뻘이다. 아들이 외숙 뻘인 셈.(...)[* 상술한 [[여흥 민씨]] 집안 서열과 바로 위에 적은 [[전주 이씨]] 집안 서열을 종합하면, 여흥부대부인에게 [[명성황후]]는 '''외숙모 뻘이자 동생 뻘이자 며느리'''(...)이다. 다만 [[경원군(1842)|이하전]]과 [[고종(대한제국)|고종]]의 촌수가 무려 25촌으로(...) 너무 멀어 그쪽으로는 촌수 서열 계산을 --당연히-- 거의 안 한다.] == 대중매체에서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풍운 여흥부대부인.png|width=100%]]}}} || || {{{#ffd800 ''' 〈풍운〉의 여흥부대부인 '''}}} || 1982년 [[KBS]] 드라마 〈[[풍운(KBS)|풍운]]〉에서는 배우 [[서우림]][* 2000년 [[KBS]]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왕건(태조 왕건)|왕건]]의 어머니 [[위숙왕후|한씨 부인(위숙왕후)]] 역.]이 연기했다. 초반에는 파락호 행세하는 남편 흥선군([[이순재]] 분) 때문에 속앓이를 한다. [[고종(대한제국)|고종]](박칠용 분) 즉위 후 남편과 며느리([[김영애]] 분)가 대립하자 이에 또 괴로워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나오며 죽기 1년 여 전에 흥선대원군에게 허락을 받아 영세를 받는 장면도 등장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대원군 여흥부대부인.png|width=100%]]}}} || || {{{#ffd800 ''' 〈조선왕조 500년〉의 여흥부대부인 '''}}} || 1990년 [[MBC]] 〈[[조선왕조 오백년#s-2.13|조선왕조 500년 - 대원군]]〉에서는 배우 [[엄유신]][* 2001년 [[KBS]]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동서인 [[흥인군]] 부인 역.]이 연기했다. 남편 [[흥선대원군]]([[임동진]] 분)과 며느리 [[명성황후]]([[김희애]] 분)의 대립에서 전반적으로는 남편의 편을 드나 며느리 입장에서도 최대한 생각하려고 한다. 〈[[풍운(KBS)|풍운]]〉과 [[신봉승|작가]]가 같기 때문에 두 작품에서 묘사한 모습이 비슷하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찬란한 여명 여흥부대부인.png|width=100%]]}}} || || {{{#ffd800 ''' 〈찬란한 여명〉의 여흥부대부인 '''}}} || 1995년 [[KBS1]] 드라마 〈[[찬란한 여명]]〉에서는 배우 [[김창숙(배우)|김창숙]]이 연기했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명성황후 부대부인 민씨 초반.jpg |width=100%]]}}} || || {{{#ffd800 ''' 〈명성황후〉의 여흥부대부인 '''}}} || 2001년 ~ 2002년 [[KBS2]] 드라마 〈[[명성황후(드라마)|명성황후]]〉에서는 배우 [[이덕희(배우)|이덕희]][* 1990년 [[KBS]] 특집극 〈[[왕조의 세월]]〉에서는 같은 [[여흥 민씨]] 출신이자 [[영친왕]]의 약혼녀 [[민갑완]] 역, 1995년 [[SBS]] 드라마 〈[[장희빈(SBS)|장희빈]]〉에서는 여흥부대부인의 6대조 할머니 풍창부부인 조씨 역,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야인시대)|김두한]]의 큰어머니 [[오숙근]] 역, 2014년 [[KBS]]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는 [[공민왕]]의 모후인 [[명덕태후]] 역을 맡았다.]가 연기했다. 명성황후([[문근영]] 분[* 아역.])가 중전의 자리에 오르도록 도와주었으며 남편 흥선대원군([[유동근]] 분)과 며느리 명성황후([[이미연(배우)|이미연]] 분, [[최명길(배우)|최명길]] 분[* 성인 역.])가 사사건건 충돌하고 반목하자 그 사이에 끼어 마음 고생을 한다. 주로 남편의 편을 많이 들지만 남편이 지나친 노욕을 보이면 이를 견제하기도 한다. [[임오군란]]이 터져 명성황후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가마(탈것)|가마]]를 내주어 무사히 도망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나 명성황후가 돌아온 뒤 남편이 [[청나라]]로 끌려가자 이에 분개하여 한동안 명성황후를 외면한다. 아주버님 흥인군이 백성들에게 살해당했을때 남편이 손윗동서인 흥인군 부인에게 '사람도 아닌 짐승을 묻을 수 있냐, 대역죄로 다스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일이지. 맘 같아선 사지를 절단내 효수하고 싶다'라며 막말을 하자 제정신이 아니라며 기겁을 한다. 실제 [[역사]]에서 여흥부대부인이 [[조선]] 말기의 [[막장]] 상황을 모두 겪은 만큼 [[드라마]]에서도 동일하게 나오는데 매 회 등장할 때마다 [[눈물]]마를 날이 없다.[br][br]2021년 8월 30일부터 9월 4일까지 [[KBS Drama Classic 연속 무료 스트리밍/2021년#s-2.8|《KBS Drama Classic》 유튜브 채널에서 〈명성황후〉를 연속으로 무료 스트리밍을 했는데]] 거기서 네티즌들에게 ''''[[부대찌개]]''' 부인'(...)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심지어 여흥부대부인이 명성황후에게 자신의 가마를 주고 탈출시키는 장면에서는 '부대찌개부인의 렌트카 사업 진출', '부대찌개 배달용 가마 탑승'(...) 등의 드립이 등장했다. [각주]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명성황후(드라마), version=786, paragraph=7)] [[분류:1818년 출생]][[분류:1898년 사망]][[분류:종로구 출신 인물]][[분류:부대부인]][[분류:대한제국의 황족]][분류:여흥 민씨 삼방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