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송사)] [include(틀:다른 뜻1, other1=삼국시대 촉한의 인물, rd1=여개)] [목차] == 소개 == 余玠, 1199 ~ 1253 [[남송]] 시대 명장으로, 자는 의부, 호는 초은이다. 회동제치사 조규의 밑에서 군생활을 시작하고, 양회 지역에서 몽골군을 막아낸 뒤 사천 지역에 산성을 쌓아 몽골군을 막는 데 기여하였으나, 참언을 믿은 송 조정에 의해 울분에 차 급사하고 만다. == 생애 == === 초기 === 송 영종 경원(慶元) 4년 12월 8일(1199년 1월 6일)에 태어났다. 본관은 회남서로 기주 기춘현(지금 호북 기춘)으로 송실이 남도한 후 그 선조들은 가족과 함께 유택하여 절동 구주 개화 현(지금의 절강 개화) 금수향, 강서로 홍주 분녕현에 기거하였다가 다시 기주 원적지로 돌아와 정착하였다. 어린 시절 집이 가난하여 백록동 서원과 태학상사에서 공부하다가 다방 노인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다옹을 놓쳐 죽게 되자 양·회 일대를 빠져나와 장단문 한 수를 짓고 회동제치사(會東制治使) [[조규(남송)|조규]]의 수하가 되었다. 조규는 큰 뜻을 품고 그를 군대에 수용하여 사무를 맡겼다.곧 공로로 의부위를 보진하고 장수로 승진되어 주부가 되었다. === 강회 전선에서 === 단평 3년(1236년) 2월, 몽골군이 회하 지역을 침공했을 때 여개는 군민(軍民)을 조직하여 성을 지키고, 남송 원병과 함께 몽골군을 격파한다. 가희 원년(1237년) 10월, 그는 조규의 인솔 아래 안풍군(오늘날 안후이(安徽) 수현(守縣))의 수장 [[두고]]를 응원하여 몽골군을 격파하고 강회 지역을 보전하게 하였다.이듬해 조정(朝正)에서 논공행상(論功行賞)을 받고, 그는 삼질(三質)에 입관하여 지모신군(知求信軍) 겸 회동제치사(會東制治司) 참의관(參議官)에 임명되었고, 진공부 낭관(弘官)이 된다. 가희 2년(1238년) 9월, 몽골의 차간[* [[서하]] 출신의 무장이다.]은 추주로 진격하나 정병들을 거느리고 응원하여 완승을 거둔다. 가희 3년(1239년), 군사를 이끌고 개봉(지금의 하남 개봉)·하음(지금의 하남 정주 서북) 일대의 몽골군을 기습하였다. 가희 4년(1240년) 9월, 회동제점 형옥 겸 지회안주로 승진하여, 호주의 동쪽과 회하의 남북 일대의 방위를 주관하였다. 순우 원년(1241년) 가을, 차간이 안풍군(安豊軍)에 출병하였고, 이에 주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40여 일 동안 격전을 벌여 몽골군을 패퇴시켰다. 군공으로 대리소경이 되고, 회동제치부사(會東制治副使)에 올랐다. === 사천 지역에서 몽골군에 대한 수비를 강화하다 === 순우 원년(1241년) 11월 몽골 오고타이 칸이 병사하고 내부 분쟁이 벌어져 대규모 대남송 전쟁을 전면 배치할 여유가 없게 되자 남송은 잠시 여유가 있었다. 이종은 양회 전선에서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운 여개로 하여금 병부시랑과 사천제치사 겸 지중경부로 사천 방무를 전담하게 했다. 순우 3년(1243년)부터 보우 원년(1253년)까지 [[몽송전쟁]]에서는 여개가 사천을 지키며 몽골군의 침공을 격퇴하는 작전을 여러 차례 벌였다. 그 기간 동안 여개는 사천의 민생을 안정시켰다. 그는 염진, 염박 형제의 건의에 따라 조어성을 비롯한 10여 개의 성을 쌓고, 군을 산성(山城)으로 옮겼다. 또 병력 배치를 조정하여 진주의 수군을 대획, 면주(지금의 산시 요양)의 수군을 청거(靑居), 흥원(興元, 지금의 산시 한중)의 수군을 합주(合州, 지금의 충칭시 합천 구)에 배치하여 내수(內水, 지금의 푸장), 가릉 강, 거장), 이주의 수군을 운정(雲頂)에 배치하였다. 각 성은 산을 기초로 하여 험준한 곳에 방어 시설을 설치하였는데, 주둔병들은 식량을 저장하고 병졸들을 훈련시켰으며, 수년 간의 건설을 거쳐 중경을 중심으로 강을 장악하고 요충지를 장악하는 종심제차 방어 체계를 갖추어 변방이 조금 안정되었다. === 여러 차례 몽골군 격파 === 여개는 사천에 군량미를 마련하기 위해 논을 열고, 재산을 정돈하고, 상벌을 명명하며, 산성을 축조하였다. 몽골군에 대항한 장병은 모두 장려와 발탁을 받았고 법을 어긴 장수들은 처벌을 받았다.[* 이주도통제 왕기범은 '왕야차'라 불릴 정도로 발호하였고, 여개의 명을 듣지 않고 여기저기 약탈하였다. 여개는 군법에 따라 왕기를 베었고 여개의 정비를 통해 사천 주둔군의 기세가 크게 떨쳤다.] 몽골군은 서쪽에서 여러 차례 침범해 소란을 피웠으나 송군에게 밀려 물러났다. 순우 6년(1246년), 몽골이 네 길로 나뉘어 사천 지역을 침공하자, 여러 차례 몽골군을 물리치고 진격한 데 이어산성 방어체계로 몽골군의 침공을 물리쳤다. 순우 8년(1248년)에 병부상서(兵部尙書)에 임명되고, 이후 재정전(政殿) 학사(學士)에 임명되어 집정관(集政官)과 같은 은수를 베풀고 사천(四川)에 주둔하였다. 순우 10년(1250년), 여개는 사천 각지의 정병들을 모아 북벌을 맹세하였다. 병사들을 이끌고 농촉 국경으로 출격하여, 황우도를 취하여 한중으로 진격하여, 3전 3승을 거두었다. 이듬해 4월, 한중 서쪽의 양산을 점령하였다. 순우 12년(1252년), [[왕덕신]][* 왕세현의 아들로, 1258년 몽케가 사천을 침공할 때 선봉으로 활약하나, 1259년 조어성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사망하게 된다.]이 성도를 침공한 뒤 가정(嘉定, 지금의 사천 러산)을 침공하자 여개는 군을 이끌고 다시 몽골군을 물리쳤다.[* 1259년 [[조어성 전투]]에서 몽케의 대군을 막아낸 왕견이 이 당시 여개의 수하로 활약하였다.] 여개가 사천 지역을 다스린 이래 사천 지역의 항몽 형세가 나날이 호전되고 있었다. === 원한을 품고 급사하다 === 사천 방면에서 연전 연승하자 재상 사방숙이 여개를 박해하려 하였다. 여개는 요세안과 불화했고, 요세안은 사방숙의 후원이 있었다. 보우 원년(1253년)에 [[사방숙]](謝方淑)과 참지정사(參知政事) 서청수(徐淸等) 등이 이종(理宗)에게 무고하여 여개를 공격하였는데, 이종은 그것을 그대로 믿었다. 여개는 울화가 치밀어 병이 났다. 그해 7월[* 여개의 아들 여여손이 지은 《홀부군묘지명》은 5월 18일이라고 한다.], 여개는 사천에서 쉰여섯의 나이로 급사하였다.[* 음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문도 있다.] 여개가 죽자 촉 사람은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여개 사후 이종은 다섯 벼슬을 특진하였다. 이듬해 6월 시어사 오수 등은 재상 사방숙 등의 지시로 여개의 칠죄를 물었고 조서를 내려받아 남은 재산을 몰수했다. 여개 사후 사천 지역은 질서가 잡히지 않았고 관리들이 백성들을 함부로 대했다고 한다. 10월 감찰어사(御史) 진대방(陳大方)의 무고(無告)를 받은 이종은 여개의 자정전(資政殿) 학사(學士)를 비롯한 일체의 관직을 박탈하고 그 가족과 측근들을 박해하였다. 보우 6년(1258년) 11월, 조정 내부의 항몽정세[* 몽케의 군대가 사천으로 침공해 왔고, 사천 대부분은 왕견과 장각이 지키는 조어성 이외에는 몽골군의 기세에 놀라 겁먹고 항복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와 민중의 압력에 못 이겨 이종(理宗)이 조서를 내려 여개의 관직을 복구하였다. == 여담 == * [[맹공]]의 휘하였던 [[왕견]]이 여개의 휘하였다. 그가 여개 밑에 있는 동안 몽골군을 격퇴하였고 또 여개 사후인 1254년 조어성 지역의 수비를 강화하며, 1259년 조어성 전투에서 부장 장각과 함께 몽골군을 격퇴하고 몽케 칸은 이 전투에서 죽고 만다. * 염진, 염박 형제의 건의로 합주 지역에 조어성을 건설하는데, 이 조어성은 나중에 왕견이 수비를 강화한다. [[분류:송나라/인물]][[분류:1199년 출생]][[분류:1253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