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97년 출생]][[분류:1987년 사망]][[분류:노르웨이 총리]] [include(틀:역대 노르웨이 총리)]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5183b 0%, #00205b 20%, #00205b 80%, #05183b)" '''[[노르웨이 총리|{{{#ffffff 노르웨이 제23·25·27대 총리}}}]] [br] {{{#ffffff {{{+1 에이나르 헨리 게르하르센}}} [br] {{{#ffffff Einar Henry Gerhardsen}}}}}}'''}}}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inar_Gerhardsen_(131919).jpg|width=100%]]}}} || ||<|2> '''출생''' ||[[1897년]] [[5월 10일]] || ||[[파일:노르웨이 국기(1844).svg.png|width=28]]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령 노르웨이 아스케르 || ||<|2> '''사망''' ||[[1987년]] [[9월 19일]] (향년 90세) || ||[[파일:노르웨이 국기.svg|width=28]] [[노르웨이]] [[오슬로]] || || '''국적''' ||[[파일:노르웨이 국기.svg|width=28]] [[노르웨이]] || ||<|6> '''재임기간''' ||제23대 총리 || ||[[1945년]] [[6월 25일]] ~ [[1951년]] [[11월 19일]] || ||제25대 총리 || ||[[1955년]] [[1월 22일]] ~ [[1963년]] [[8월 28일]] || ||제27대 총리 || ||[[1963년]] [[9월 25일]] ~ [[1965년]] [[10월 12일]] || || '''학력''' || || || '''정당''' ||[[노르웨이 노동당|{{{#!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3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E11931; font-size: .9em" {{{#ffffff '''노동당'''}}}}}}]] || || '''직업''' ||[[정치인]], 도로노동자 || || '''가족''' ||배우자 베르나르 게르하르센[br] 슬하 자녀 3명 || || '''약력''' ||[[국회의원|스토르팅에트의원]][br][[북유럽]]이사회 의장[br]노동당 대표[br][[국회의장|스토르팅에트의장]][br]제23·25·27대 총리 || [목차] [clearfix] == 개요 == 노르웨이의 정치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역사적인 첫 총리다. 많은 노르웨이인들에게 [[국부]](Landsfaderen)로 불릴만큼 압도적인 칭송을 받고 있으며, 나치의 지배에서 벗어난 노르웨이를 현대적으로 재건하였다. == 생애 == 원래 도로 노동자로 힘겹게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던 게르하르센은 [[192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사회주의]] 노동 운동가로 활동했다. 이때는 [[공산주의]]에 가까운 급진좌파로서 여러차례 체제 전복 활동에 가담했고 수차례 유죄 판결을 받기도 했는데, 가장 대표적으로 [[1924년]] 좌익공산주의청년동맹의 군사행동에 참여했다가 방조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고 75일간 복역한 케이스가 있다. 하지만 [[1930년대]]가 되면서 점진적으로 온건한 [[민주사회주의]] 성향으로 변모, 본격적으로 제도권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고 [[오슬로]] 시의원 및 노동당 부대표 등을 맡으면서 정치적으로 몸집을 키우기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가 찾아오게 되는데 [[1940년]], [[나치 독일]]이 [[노르웨이 침공|노르웨이를 침공, 점령]]한 것. 이를 막지 못한 [[요한 뉘고르스볼]] 총리와 [[오스카르 토르프]] 대표가 [[노르웨이 왕실]]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자 당 대표 대행으로 노르웨이에 잔류한 노동당원들을 총괄하게 된다. 1940년 8월 15일, 오슬로 시장이 되었지만 결국 독일군에 의해 26일 사임해야했고, 9월에는 나치 독일이 세운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에 의하여 아예 정당 활동을 금지당하고 만다. 이후 반나치 활동에 나섰다가 1941년 9월 11일 체포되어 31차례나 되는 구금과 강제신문 끝에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만다. 강제수용소 수감 이후에도 저항 활동을 이어가다 [[게슈타포]]에 의해 적발되어 고문당하는 등 여러차례 수모를 당해야 했다. 게슈타포는 게르하르센에게 노르웨이 내 [[레지스탕스]] 정보를 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끝까지 거부했고 결국 노르웨이가 해방될 때까지 강제수용소에서 나오지 못한 채 겨우 생명을 부지하는 데 만족해야했다. 1945년 5월, 노르웨이가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되자 노동당 대표로 복귀해 다른 정당들과 10월 총선까지 국가를 이끌 임시 [[거국내각]]을 구성하면서 전후 첫 노르웨이의 총리가 되었고[* 노르웨이가 해방된 후 오스카르 토르프 전 대표를 비롯한 망명 정부가 복귀했지만 노르웨이에 남아 저항 활동을 이어간 게르하르센 대표의 입지를 넘어설 순 없었고 결국 이를 포기한다.] 이어진 10월 총선에서 게르하르센이 이끄는 노동당이 단독 과반(76석)을 차지하면서 승리해 공식적으로 노동당 단독 정부를 구성하게 된다. === 총리 시절 === 재임 기간 동안 폭넓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는데, 심지어는 게르하르센 총리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총리로서의 게르하르센은 매우 높게 평가했다. [[시장경제]]를 추구하면서도 강력한 정부 규제를 유지하고 적극적인 부의 재분배에 주력하는 전형적인 [[수정자본주의]] 노선을 추구했는데, 현대 북유럽을 대표하는 포괄적인 [[사회보장제도]]가 이때 만들어진다. 대표적으로 [[의무교육]] 및 국가 주도의 보편적 [[의료보험]] 체계를 도입해 정착시키고 [[실업급여]] 제도를 빠르게 도입했다. 그 외에도 국영 주택 은행법(Norwegian State Housing Bank Law)을 제정해 주택협동조합 및 개인 건축업자들에게 저리로 자금을 대출해줘 주택 공급을 크게 늘리고 동시에 주택 수당을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급함으로써 전후 시름에 빠진 서민들의 주거 문제를 해소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덕분에 노르웨이는 전후 극심한 빈곤과 대량 실업에서 빠르게 탈출할 수 있게 됐다.[[https://nbl.snl.no/Einar_Gerhardsen|#]] 내치에서의 압도적 지지를 바탕으로 게르하르센이 이끄는 노동당 정권은 무려 20년이 넘게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외교적으로는 노동당 내 노선 갈등에도 불구하고 [[NATO]]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는 등 다른 서방 선진국들과 행보를 함께했다.[* 사실 역사적으로 보면 당연하기도한데 [[겨울전쟁]] 때도 노르웨이 의용대가 참전하여 소련과 대적한 경험도 있고, 지금도 러시아가 [[스발바르 제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노르웨이를 자극하는 등 노르웨이와 러시아의 사이도 스웨덴-러시아 못지 않게 [[앙숙]]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피요르드 협만 안쪽으로 NATO 항모 기동 부대가 훈련을 하면서 [[소련]]을 자극하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히 이어질것 같았던 게르하르센과 노동당의 천하는 [[1963년]]에 무너지고 마는데 [[스발바르 제도]]에 있는 킹스 만 탄광에서 광부 21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사회주의좌파당|사회주의인민당]][* 노동당의 온건화에 반발한 좌파 성향 정치인들이 분당해 만든 정당으로 사회주의좌파당의 전신이다.]이 보수 정당들과 손잡고 게르하르센 총리에 대한 내각불신임결의를 통과시켜버린 것. 노르웨이 총리에게는 [[의회해산]] 권한이 없기 때문에 게르하르센 총리로서는 손쓸 방도가 없었고 자리에서 물러나게 됐다. 이 결과로 노동당 내각이 전후 처음으로 붕괴되고 [[욘 륑]] 총리의 보수 내각이 성립되었지만 이 일종의 정치적 [[쿠데타]]에 반발한 시민들의 항의가 이어지면서 결국 3주만에 게르하르센이 다시 총리로 복귀한다. 하지만 노동당은 이전과 같은 압도적인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고 게르하르센 총리 이전과 같은 리더십을 보이지 못하면서 [[1965년]] 열린 총선에서 단독 과반에 실패, [[중앙당(노르웨이)|중앙당]] [[페르 보르텐]] 대표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내려와야 했다. 결국 [[1969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면서 완전히 자리를 떠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