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가톨릭 교황)] ||<-5><#806600> [[교황|[[파일:교황 문장.svg|height=40]] '''{{{#FFF 가톨릭 교회의 교황}}}''']] || ||<-5> [[파일:167_b_eugenio_III.png|height=125]] || || 제166대 [[루치오 2세]] || → ||<#806600> '''{{{#FFF 제167대 에우제니오 3세}}}''' || → || 제168대 [[아나스타시오 4세]]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D9A100, #EFBC00 20%, #EFBC00 80%, #D9A100);" '''{{{#670000 제167대 교황[br]{{{+1 에우제니오 3세}}}[br]Eugenius III}}}'''}}} || ||<-2>{{{#!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에우제니오3세.jpg|width=100%]]}}}|| || '''교황명''' ||에우제니오 3세 (Eugenius III) || || '''본명''' ||베르나르도 피냐텔리 (Bernardo Pignatelli)[* 일부 문헌에는 성이 '파가넬리(Paganelli)'로 기록되어 있다.][br]베르나르도 다피사 (Bernardo da Pisa) || ||<|2> '''출생''' ||[[1080년]] || ||[include(틀:국기, 국명=피사 공화국)] [[피사]] || ||<|2> '''사망''' ||[[1153년]] [[7월 8일]] (72~73세) || ||[[파일:교황령 국기(754-1803).svg|width=25]] [[교황령]] [[라치오|티볼리]] || || '''재위기간''' ||[[1145년]] [[2월 15일]] ~ [[1153년]] [[7월 8일]] || || '''시복''' ||[[1872년]] [[12월 28일]], [[비오 9세]] || || '''축일''' ||[[7월 8일]] || || '''언어별[br]명칭''' ||[[라틴어]]: Beatus Eugenius PP. III[br][[이탈리아어]]: Papa Beato Eugenio III[br][[영어]]: Pope Blessed Eugene III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167대 [[교황]]. 최초의 시토회[* [[프랑스]] [[디종]] 지역에서 시작된 [[가톨릭]]의 봉쇄 [[수도회]] 중 하나. 하얀 수도복 위에 검은 [[스카풀라]]를 착용한 것이 외관적인 특징. 시토회에서는 수작업과 자급자족이 원칙인데, 많은 시토회 소속 수도원들은 전통적으로 농업이나 맥주 제조 등의 활동을 통해 자체적으로 경제를 부양한다.] 출신 교황이다. 에우제니오 3세는 재위 기간 동안 [[로마]]에 제대로 머무르지 못했다. 본래 로마는 교황의 통치 아래에 이루어져야 하지만, 아르날도 다브레시아를 주축으로 구성된 반교황파가 옛 로마 법률을 부활시켜 로마를 다스리는 공화정 조직인 로마 [[코뮌]]을 세우고 시민을 대표하는 통치자로 조르다노 피에르레오니를 선출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티볼리 지역과 [[시칠리아 왕국]]의 국왕 루제루 3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들의 지원으로 일시적으로나마 교황권의 힘을 키웠다. 이에 로마 코뮌은 1145년 12월 교황이 로마에 들어와 성탄절을 보낼 수 있게 허가했다. 1144년 [[십자군 국가]] 중 하나인 [[에데사 백국]]이 [[무슬림]] 군주 [[이마드 앗 딘 장기]]에 의해 멸망하자, 에우제니오 3세는 1145년 [[제1차 십자군 원정]] 때의 영광을 재현하고 [[십자군 국가|성지]]를 지키기 위한 십자군의 결성을 촉구하는 내용인 <얼마나 많은 전임자들께서''{{{-1 (Quantum praedecessores)}}}''>라는 칙서를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7세]]에게 전달해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촉구했다. 그러나 제1차 십자군 원정 초기 때와는 달리 십자군 결성에 대한 열의가 그리 높지가 않자, 교황과 같은 시토회 소속 성직자인 [[베르나르도#s-2.1|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가 직접 나서서 십자군의 성스럽고 명예로운 의의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했다. 베르나르도의 진심 어린 호소로 인해 루이 7세와 프랑스 왕국의 수많은 영주들, 그리고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콘라트 3세]]와 귀족들이 십자군 참가에 서약했다. == 선종과 시복 == 비록 [[로마]] 시민들은 에우제니오 3세를 세속적인 지도자임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자신들의 영적인 지도자임은 항상 인지하고 있었고, 그의 개인적인 인품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했다. 이로 인해 에우제니오 3세가 선종하자, 교황에 대한 존중의 표시로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시간이 흘러 에우제니오 3세의 무덤을 방문한 사람들에게 기적적인 치유가 일어난 성스러운 장소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에 1872년 교황 [[비오 9세]]는 이러한 기적들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에우제니오 3세를 [[시복]]했다. [[분류:1080년 출생]][[분류:1153년 사망]][[분류:피사 출신 인물]][[분류:이탈리아인 교황]][[분류:십자군 전쟁/관련인물]][[분류:시복된 교황]][[분류:성 베드로 대성당 안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