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사보이아 공작)] [include(틀:역대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 ||<-2> '''사보이아 공작[br]{{{+1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br]Emanuele Filiberto, Duca di Savoia''' || ||<-2>{{{#!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사보이아의 에마누엘레 F. 공작.png|width=100%]]}}} || || '''이름'''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디 사보이아[br](Emanuele Filiberto di Savoia)|| || '''출생''' ||[[1528년]] [[7월 8일]][br][[사보이아 공국]] [[샹베리]]|| || '''사망''' ||[[1580년]] [[8월 30일]] (향년 52세)[br][[사보이아 공국]] [[토리노]]|| ||<|2> '''재위''' ||<#E7E7E7,#2d2f34>[[사보이아 공국]]의 공작|| ||[[1553년]] [[8월 7일]] ~ [[1580년]] [[8월 30일]]|| || '''배우자''' ||프랑스의 마르그리트 ,,(1559년 결혼/1574년 사망),,|| || '''자녀'''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 || || '''아버지''' ||[[카를로 2세]]|| || '''어머니'''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즈|| || '''서명''' ||[[파일: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서명.svg|width=150]] || [목차] [clearfix] == 개요 == [[사보이아 공국]]의 미래에 큰 영향을 끼친 여러 정책들을 시행하여 먼 훗날 [[사보이아 가문]]이 [[이탈리아 통일|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기틀을 다졌다. == 생애 == 사보이아 공국의 수도 [[샹베리]]에서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2세]]와 [[포르투갈 왕국|포르투갈]]의 베아트리즈의 3남으로 태어났으나, 성인으로 성장한 유일한 자녀였다. 그가 8살에 불과했을 때 [[프랑스 왕국]]의 [[프랑수아 1세]]가 [[밀라노 공국]]을 영구히 합병할 전초기지 격으로 사보이아 공국을 공격해 점령했고, 공국 대부분이 프랑스의 간접통치를 받는 상황에 놓였다. 어머니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의 처제[*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어머니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즈는 카를 5세의 황후인 [[포르투갈의 이자벨]]과 친자매 관계였다. 둘 다 포르투갈 국왕 [[마누엘 1세]]의 딸.]였던 인연으로 카를 5세의 군대에서 복무하면서 프랑스에게 빼앗긴 공국을 되찾고자 했다. 1553년 8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보이아 공작이 되었지만 다스릴 영토가 없었기에 그의 작위는 유명무실한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1555년부터 외사촌인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 밑에서 [[스페인령 네덜란드]]의 [[총독]]으로 복무하였다. [[이탈리아 전쟁#s-2.1.8.|8차 이탈리아 전쟁]] 중인 1557년 8월 10일, [[스페인군]]을 이끌고 생캉탱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승전의 결과로 1559년 카토캉브레지 조약이 체결되어 프랑스로부터 사보이아 공국을 되찾았다. 원래는 [[잉글랜드 왕국]]의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남편으로도 고려되었으나 종교 문제로 협상이 결렬되었고 정치적인 목적으로 [[프랑스 국왕]] [[앙리 2세]]의 누이 마르그리트 공주(Marguerite de Valois 1523~1574)[* 여담으로 마르그리트의 할머니 [[사보이아의 루이사]]는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할아버지 [[필리포 2세]]의 장녀였다. 5촌 간의 [[근친혼]]이었던 셈이다.]와 결혼하였다. 그런데 결혼을 축하하는 [[마상창시합]]에서 [[스코틀랜드 왕국]] 근위군 대장이었던 콩테 드 가브리엘 몽고메리[* 사족으로, 이 사람이 [[제2차 세계 대전]]의 [[영국]]의 명장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의 조상이다.]의 [[랜스]] 파편이 앙리 2세의 눈 위를 찌르는 바람에 치명상을 입었고, 앙리 2세가 자신의 사후 사보이아 공국이 조약을 파기할 것을 우려해 결혼식을 재촉하는 바람에, 둘은 앙리 2세의 사망 전날 눈물 속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부부의 자녀는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가 유일했다. 이후 프랑스 점령으로 망가진 [[사보이아 공국]]을 복구하는 것으로 치세 대부분을 보냈다. 1561년 공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었고, 1563년에는 프랑스 침공에 노출된 샹베리에서 [[알프스 산맥]] 뒤편에 있는 [[토리노]]로 [[천도]]하여 프랑스의 위협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이러한 조치들로 이제까지 프랑스와 이탈리아 사이에서 애매한 정체성을 가졌던 [[사보이아 가문]]은 본격적으로 [[이탈리아/문화|이탈리아화]]하여 [[이탈리아/역사|이탈리아 역사]]에 전면으로 등장했다. 이외에도 [[플랑드르]]에서의 군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군대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를 배워와 [[피에몬테]] 출신의 군사조직을 조직하여 공국의 방위를 [[용병]]이 아닌 [[상비군]]에게 맡겨 국방을 튼튼히 다졌으며, 오랜 전란으로 제기능을 못한 [[토리노 대학교]]를 복원하고 각 지역에서 열리던 신분제 의회를 [[토리노]]에서 열리도록 통합하여 중세 봉건 국가에 가까웠던 사보이아 공국의 중앙집권화를 위해 힘썼다. 말년에는 텐다(Tenda)[* 현재 프랑스 탕드(Tende). [[1947년]] [[파리 조약]]으로 프랑스령이 되었다.], 오넬리아(Oneglia) 등을 병합하였으나 숙원이었던 살루초 후국 병합까지는 성공하지는 못했다. 1580년 간경화로 사망했으며 토리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 기타 == 샹베리에서 토리노로 천도한 이후인 1578년, [[사보이아 가문]]이 대대로 샹베리 성 예배당에 보관하던 수의를 토리노 대성당으로 옮겼다. 그리고 이 수의는 후대에 '''[[토리노의 수의]]'''(Sindone di Torino)로 알려진다. [[분류:사보이아 공작]][[분류:사보이아 가문]][[분류:1528년 출생]][[분류:1580년 사망]][[분류:샹베리 출신 인물]][[분류:토리노 대성당 안장자]][[분류:가터 훈장]][[분류:네덜란드 총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