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에른스트 오페르트}}}[br]Ernst Oppert'''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에른스트 오페르트.jpg|width=100%]]}}} || || '''이름''' ||에른스트 야코프 오페르트[br]Ernst Jakob Oppert || || '''출생''' ||[[1832년]] [[12월 5일]][br][[독일 연방]] [[함부르크|자유한자도시 함부르크]] || || '''사망''' ||[[1903년]] [[9월 19일]] (향년 70세)[br][[독일 제국]] [[함부르크 제국도시]] || || '''형제''' ||형 율리우스 오페르트[br]남동생 구스타프 솔로몬 오페르트 || [목차] [clearfix] == 개요 ==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 국적의 [[유대인]] [[상인]].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주범으로 유명하다. == 생애 == === 도굴 사건 이전 === 1832년 자유한자도시 [[함부르크]]에서 부유한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형제로 동양학자인 율리우스 오페르트와 구스타프 솔로몬 오페르트가 있었다. 이런 집안 분위기 속에 [[동양]]에 관심을 가지게 된 오페르트는 19세 때인 1851년 [[홍콩]]으로 건너가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홍콩에서 사업이 기울어 파산 위기에 처하자 조선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리하여 1866년 2차에 걸쳐 조선에 통상을 요청했으나 실패하고 돌아갔다. === 오페르트 도굴 사건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오페르트 도굴 사건)] 오페르트는 자신을 [[영국군]]이라고 속여 두 차례 [[조선]]을 방문했고, 세 번째 방문 때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도주했다. === 이후 === 당연히 조선에서는 [[고종(대한제국)|군주]]의 [[남연군|친할아버지]]의 묘를 파헤친 악랄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졌고, 이후 오페르트는 죽을 때까지 조선에는 들어오지 못했다. 겁도 없이 군주의 친할아버지 묘를 도굴했으니 들어오는 순간 [[사형]]에 효수를 면치 못했을 것은 자명했다. 도굴 사건 이후 조선에서 있었던 일을 회고록으로 출판했다.[[https://archive.org/details/einverschlossen00oppegoog/page/n8/mode/2up|#]] 우리나라에선 <금단의 나라 조선 기행(Ein verschlossenes Land, Reisen nach Corea)>이란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http://blindbard.egloos.com/847307|발췌독 하기]] 회고록의 내용을 보면 당시 그 어떤 서양 국가에도 개항하지 않은 조선의 역사와 정치, 군사 제도까지 제법 자세하게 정리해놨다. 물론 실수가 없는 건 아니어서 조선의 건국년도를 1397년으로 오기하거나 조선 시대 3포의 개항을 마치 '''일본이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킬 권리를 얻은 것'''처럼 오해하는 등 오류도 많다. 그래도 서양인이라는 신분과 시대적 한계[* 쇄국 정책을 견지하고 있어서 정보를 얻을 방법 자체가 별로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신뢰성이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이 정도의 정확성을 갖는 데이터를 수집했다는 것은 나름대로 교차 검증을 하는 등 큰 노력을 기울였다고 볼 수 있다.]를 감안하면 대단한 수준이다. 또한 [[조선군]]은 겉보기에만 멀쩡할 뿐 형편없다며 까기도 했다. 이후 고향인 함부르크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향년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오페르트와 한유동조론 == 오페르트의 회고록에선 조선인이 사람이 좋다느니 야만인이 아니라는 등 조선을 긍정적으로 묘사한다. 심지어 '''"조선인은 일본인이나 중국인보다 키가 크고 피부가 흰 것이, [[백인]]이나 [[유대인]]의 [[잃어버린 10지파]]의 후예일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실려 있다[* 다만 이 부분은 구한말 조선에 온 백인들 대부분이 했던 주장이다.]. 현재도 한국인의 평균키가 중국인, 일본인의 평균키보다 크다. == 여담 == * 도굴 사건을 일으키기 전에는 오페르트와 근처 주민들과의 사이는 좋은 편이었다. 폭풍이 온다고 [[조선인]]들이 미리 알려주어 같이 비를 피하거나 한 적도 있다. 그의 마닐라인 부하 중 하나가 소를 훔치는 바람에 주민들이 분격한 일이 있었는데 배상을 통해 원만하게 해결했다고 한다. * 오페르트는 형제들이 동양학자였던 영향으로 어느 정도의 [[일본어]]와 [[중국어]] 구사가 가능했다. 하지만 [[한국어]]는 미처 배울 엄두를 내지 못했음을 회고록에서 고백하고 있다. 조선인들과는 한문을 통한 [[필담]]으로 주로 소통했으며, 한국어 능력이 필요할 때에는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와 조선인 신자들에게 의존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title=오페르트 도굴 사건,version=375)] [[분류:1832년 출생]][[분류:1903년 사망]][[분류:함부르크 출신 인물]][[분류:유대계 독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