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파일:external/dzieje.pl/wilimowski_ernest.jpg|width=100%]] || || 이름 ||에르네스트 오토 빌리모프스키[br]Ernest Otto Wilimowski[* 선수의 표기법이 참 다양하다. FIFA 공식 월드컵의 기록을 보면 이렇게 표기가 되고 독일식인 Ernst라는 이름도 많이 사용된다. 추가로 성인 Wilimowski가 Willimowski. 즉, l이 2글자로 쓰이는 경우도 있다. 폴란드 위키를 보면 이렇게 표기되니 본명은 이렇게 표기하였다.] || ||<|2> 출생 ||[[1916년]] [[6월 23일]] || ||[[독일 제국|독일국]] [[카토비체]] || ||<|2> 사망 ||[[1997년]] [[8월 30일]] (향년 81세) || ||[[독일]] [[카를스루에]] || || 국적 ||[[파일:독일 제국 국기.svg|width=28]] [[파일:독일 국기.svg|width=28]] [[독일국]](1916-1922)[br][[파일:폴란드 국기.svg|width=28]] [[폴란드 제2공화국]](1922-1939)[br][[파일:나치 독일 국기.svg|width=28]] [[나치 독일]](1939-1945)[br][[파일:독일 국기.svg|width=28]] [[독일연방공화국]](1945-1997) || || 출신지 ||[[독일 제국|독일국]] [[카토비체]] || || 포지션 ||인사이드 레프트 포워드, 센터 포워드 || || 신체조건 ||172cm / 68kg || || 등번호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루흐 호주프 (1933~1939)'''[br]1. FC 카토비체 (1939~1940)[br][[켐니츠 FC|PSV 켐니츠]] (1940~1942)[br][[TSV 1860 뮌헨]] (1942~1944)[br]1. FC 카토비체 (1944)[br][[카를스루어 SC]] (1944)[br][[켐니츠 FC|PSV 켐니츠]] (1944~1945)[br]SC 츠비젤 (1946)[br]SG 켐니츠웨스트 (1946~1948)[br]BC 아우크스부르크[* [[구자철]]의 소속팀으로 유명한 [[FC 아우크스부르크]]와는 다른 팀이다.] (1948)[br]오펜부르거 FV (1949~1950)[br]FC 징겐 04 (1950~1951)[br]VfR 카이저슬라우테른[* 이 팀도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과는 다른 팀이다.] (1951~1955)[br]켈러 FV (1955~1956) || || 국가대표 ||22경기 21골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폴란드]] / 1934~1939)^^ [br] 8경기 13골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 / 1941~1942)^^ || [목차] [clearfix] == 개요 == [[폴란드]]와 [[독일]]의 전 축구 선수. == 생애[* 출처: 위키피디아, 11v11] == === 유소년기 === 그의 원래 이름은 에른스트 오토 프란델라(Ernst Otto Prandella)이며, [[독일 제국]] [[실레시아|슐레지엔]]의 [[카토비체|카토비츠]][* 현재는 [[폴란드]]의 영토이다.]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 에른스트로만(Ernst-Roman)[* 정확히 말하면 부친으로 추정되는 인물이다. 빌리모프스키의 출생 기록에는 아버지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과 모친 파울리나(Paulina, 1895~1981) 모두가 독일인인데 그의 부친은 [[제1차 세계 대전]]에 독일군으로 참전했다가 [[서부전선]]에서 전사하였다. 1922년, 그의 고향인 카토비체가 [[폴란드 제2공화국]]의 영토가 됨에 따라 빌리모프스키 또한 폴란드 국민이 되었다. 모친은 그를 독일인 학교에 보냈으며, 그는 아홉 살에 독일인 클럽인 1. FC 카토비체 유소년팀에 입단했다. 프란델라가 13살 때 그의 어머니가 폴란드인 로만 빌리모프스키와 재혼했고 그 해 6월 6일부터 프란델라는 새아버지의 성인 빌리모프스키를 쓰게 되었다. === 선수 생활 === ==== [[제2차 세계 대전|세계 대전]] 이전 ==== 17세의 나이에 루흐 호주프로 팀을 옮긴 빌리모프스키는 18세가 되던 1934년, 33골을 넣으며 [[엑스트라클라사]] 득점왕이 되었다. 빌리모프스키는 7시즌간 루흐 호주프의 엑스트라클라사 5회 우승과 3회 득점왕으로 빼어난 활약을 펼쳤다. 1939년 5월 21일 UT 우치와의 경기에선 혼자 10골을 넣는 괴력을 과시했다. ==== [[제2차 세계 대전|세계 대전]] 시기 ==== [[나치 독일|나치]]가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를 점령하자 독일계였던 빌리모프스키는 독일 시민권을 다시 취득하였다. 만약 빌리모프스키가 폴란드 국적을 계속 유지했다면 폴란드인의 스포츠 활동을 금지시킨 나치의 정책에 따라 축구 선수로 경기를 뛸 수 없었겠지만 독일 국적 취득으로 이를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빌리모프스키 본인과 가족들도 [[제2차 세계 대전|전쟁]] 중에 힘든 시간을 보내야 했다. 먼저 빌리모프스키 본인이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의 간부에게 찍혀 있었다. 빌리모프스키의 루흐 호주프 이적 대신 1. FC 카토비체 잔류를 주장했던 게오르크 요슈케(Georg Joschke)가 [[뒤끝]]을 작렬시켜서 그는 한동안 몸을 사려야 했던 것. 하지만 그의 실력을 높게 본 [[독일 축구 연맹]] 관계자들이 요슈케를 설득시켰고 빌리모프스키가 카토비체에 재입단해서 이 뒤끝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의 어머니 파울리나에게 일어났다. 파울리나는 독일인임에도 러시아 출신 유대인들과도 친하게 지냈는데 여기에 [[불륜]]이라는 이유까지 덧붙여져 1942년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아우슈비츠]]에 끌려간 것이다. 다행히 빌리모프스키의 친구 중 전설적인 [[독일 공군(나치 독일)|공군]] [[에이스]] [[전투조종사|파일럿]] [[헤르만 그라프]][* 그라프는 유명한 축덕으로 나중에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스위스 월드컵]]의 위닝 [[주장|캡틴]]이 될 [[프리츠 발터]]를 그의 축덕질에 끌고 다녔고 발터조차 그의 축구 실력을 인정할 정도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전쟁]]이 끝나고 생활이 어려울 때 그라프를 도와준 사람이 당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대표팀]]의 전설적인 감독 [[제프 헤어베어거]]였다.]가 있었는데 그의 도움으로 파울리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서 나올 수 있었다. 나치 간부들은 선전 목적으로 빌리모프스키를 이용했고 그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켐니츠 FC|PSV 켐니츠]]에서 뛰는 동안 [[독일 국방군]] 복무를 하는 대신 잠시 [[경찰공무원|경찰]]로 일했다. 2007년 5월에 아버지의 전기를 쓰기도 한 빌리모프스키의 딸 실비아의 회고에 의하면 원래 빌리모프스키는 [[카토비체]]를 떠나기 싫어했다고 한다. 아내가 될 클라라가 당시 아파서 그녀와 함께 있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카토비체를 떠났지만 전쟁이 아니었다면 계속 카토비체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는 [[TSV 1860 뮌헨]]에서도 뛰었으며 1942년 [[DFB-포칼|참메르포칼]] 우승팀의 일원이었다. 1942년 [[올림피아슈타디온 베를린|베를린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뮌헨은 빌리모프스키가 첫 골을 넣었고 2-0으로 승리했다. ==== 국가대표 ==== =====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폴란드]] ===== 빌리모프스키의 선수 생활 초창기때에는 [[카토비체]]가 폴란드 영토였던 터라 그는 [[엑스트라클라사]]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폴란드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그의 첫 국가대표 데뷔는 1934년 5월 23일에 있었던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과의 원정경기였는데 비록 여기에서 그가 한 골을 넣기는 했지만 팀은 2:4로 패배하고 말았다. [[1936 베를린 올림픽|베를린 올림픽]] 참가도 유력한 빌리모프스키였지만 술과 파티로 인해 1년간 대표팀 선수 자격 정지를 당해 올림픽에 참가하지 못했다. 폴란드는 이 올림픽에서 4위를 차지했기 때문에 빌리모프스키가 만약 출전했다면 금메달을 땄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출전한 가장 유명한 경기는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라운드#s-1.7|1938년 프랑스 월드컵 1라운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과의 경기로, 여기에서 그는 [[해트 트릭|연장 120분을 모두 뛰면서 4골을 뽑아내고]] [[페널티 킥]]까지 얻어 팀이 넣은 5골에 모두 관여했지만 5:6으로 패배하는 아픔을 겪었다.[* 월드컵에서 해트 트릭을 기록하고도 패배한 다른 기록은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1986년 월드컵]]에서 [[이고르 벨라노프]]가 [[벨기에 축구 국가대표팀|벨기에]]를 상대로 해트 트릭을 기록했지만 팀이 3:4로 패배한 것이 있다. 결과적으론 무승부지만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결승|2022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킬리안 음바페]]가 해트 트릭을 기록했음에도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프랑스]]는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팀|아르헨티나]]에 [[승부차기]]에서 패배하며 트로피를 내줬다.] [[FIFA 월드컵]]에서 한 경기 4득점 기록은 56년 뒤인 [[1994 FIFA 월드컵 미국|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러시아의 [[올레그 살렌코]]가 [[카메룬 축구 국가대표팀|카메룬]]과의 경기에서 5골을 넣기 전까지는 깨지지 않은 기록이었다.[* 타이 기록은 조금씩 찾아볼 수 있는데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1950년 월드컵]]의 [[아데미르]](vs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1954년 월드컵]]의 [[산도르 코치슈]](vs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서독]]),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1958년 월드컵]]의 [[쥐스트 퐁텐]](vs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서독]]),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1966년 월드컵]]의 [[에우제비우]](vs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북한)]] 등이 있다.] 1939년 8월 27일에 홈 [[바르샤바]]에서 열린 [[헝가리 축구 국가대표팀|헝가리]]와의 친선경기에서 폴란드는 0-2로 끌려가던 도중, 그의 해트 트릭과 [[페널티 킥]]까지 얻어낸 것에 힘입어[* 이 페널티 킥은 [[레오나르트 피옹테크]]가 성공시켰다.] 경기를 4-2로 역전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시합 나흘 뒤에 독일군이 [[폴란드 침공|폴란드를 침공]]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그의 폴란드 대표로서의 마지막 경기였다.[* 그 이후에 폴란드 대표팀으로서 [[나치 독일|나치]]의 명령을 거부하다가 경기장에서 총살되었다는것은 사실이 아니다. 후술하겠지만 그는 독일인의 피가 흘렀기 때문에 이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나치 독일]] ===== 빌리모프스키는 1941년 6월 1일 [[루마니아 축구 국가대표팀|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처음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독일 대표]]로 나갔다. 그는 이듬해 11월의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크로아티아]]와의 경기까지 8경기에 출장하여 13골을 기록했다. ==== [[제2차 세계 대전|세계 대전]] 이후 ====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폴란드 인민 공화국|폴란드 공산 정권]]에 의해 독일 부역자로 몰리게 된 빌리모프스키는 [[카토비체|고향]]을 등져야 했고 고향에 갈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서독 [[카를스루에]]로 이주하여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한편, 여러 클럽팀을 돌아다니며 40세까지 선수 생활을 했다. 일부 폴란드 언론에선 1950년대에 빌리모프스키의 [[부고|사망 기사]]를 냈지만 오보였다. === 은퇴 이후 === 축구화를 벗은 후 빌리모프스키는 아내와 레스토랑을 경영하다가 재봉틀 공장에서 1978년까지 일을 했다. 그러다 1995년에 루흐 호주프 구단의 초청으로 드디어 [[카토비체|고향]]을 방문하면서 클럽의 75주년 행사에 참석할 수 있을 줄 알았지만... 당시 폴란드의 스포츠 저널리스트 보흐단 토마체프스키(Bohdan Tomaszewski)는 빌리모프스키를 반역자라 비난하며 그가 폴란드에 와선 안 된다고 주장했고 이에 빌리모프스키는 고향 방문을 포기했다. 빌리모프스키는 1997년 [[카를스루에]]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에는 가족, 친구, 이웃과 함께 [[독일 축구 연맹]] 관계자들도 참석했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빼어난 드리블 기술과 민첩성, 천부적인 득점 감각을 보유한 공격수. 주로 정확한 왼발 슈팅으로 득점하는 플레이를 즐겼지만 오른발로도 강력한 슈팅을 때릴 수 있었다.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폴란드]]가 [[FIFA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보유했던 뛰어난 선수였지만 [[제1차 세계 대전|두 번의]] [[제2차 세계 대전|세계 대전]]이라는 복잡한 역사의 흐름에 휘말려야 했던 비운의 선수였다. == 사생활 == 빌리모프스키는 1951년에 결혼했고 아내 클라라와의 사이에서 1남 3녀를 두었다. == 뒷이야기[* 이 이야기의 상당수는 상술된 빌리모프스키의 딸, 실비아의 회고에서 나왔다.] == * 빌리모프스키는 [[다지증|오른쪽 발가락이 6개]]였다. * 빌리모프스키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항상 그의 삶에서 종교를 강조했다고 한다. * 빌리모프스키는 집에서는 [[독일어]]를 썼으나, 밖에서는 대체로 폴란드어의 실롱스크(슐레지엔) 방언을 사용했다. 공식적으로 폴란드 국민이었던 시기에 그는 본인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상부 실롱스크 사람"(Górnoślązak)이라고 대답했다. * 빌리모프스키는 축구 외에도 각종 겨울 스포츠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는데 어린 시절 고향 [[카토비체]]에서 [[아이스하키]] 선수를 하기도 했고 훌륭한 [[스키]] 트레이너였다고 전해진다.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1938년 월드컵 1라운드]]에서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폴란드]]에 승리한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 대표팀]] 선수들과 관계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서 4골을 넣은 빌리모프스키를 브라질로 데려가려고 했다. 예비 계약까지 체결했지만 결론적으론 엎어졌다고.. * 빌리모프스키는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스위스 월드컵]] 당시 38살의 노장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서독]]의 우승 소식을 듣고 당시 서독 대표팀의 일원이 아니라는 것에 매우 크게 아쉬워했다고 한다. * [[1974 FIFA 월드컵 서독|1974년 서독 월드컵]] 당시 빌리모프스키는 36년 만에 다시 본선 진출에 성공한 [[폴란드 축구 국가대표팀|폴란드 대표팀]] 숙소를 격려차 방문하려 했다. 그러나 그 바람은 이뤄지지 못했는데 폴란드 감독 [[카지미에시 구르스키]]에게 ~~[[할미넴|온갖 욕을 다 먹고]]~~ 문전박대당했다. 하지만 나중에 구르스키가 밝힌 바로는 빌리모프스키는 원래 그의 우상이었고 [[르비우|르부프]]에 루흐 호주프 팀이 원정을 왔을 때 빌리모프스키의 경기를 자주 보았다고 했다. 구르스키는 빌리모프스키를 반갑게 맞이하고 싶었지만 하필 옆에 [[폴란드 인민 공화국|폴란드]] [[정치경찰|SB]](Służba Bezpieczeństwa)들이 그를 감시하고 있어서 빌리모프스키에게 차갑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 수상 == === 클럽 === * [[엑스트라클라사]] 우승 5회: 1933, 1934, 1935, 1936, 1938(루흐 호주프) * [[DFB-포칼|참메르포칼]] 우승 1회: 1942([[TSV 1860 뮌헨]]) * 가우리가 바이에른 남부 지구 우승 1회: 1943(TSV 1860 뮌헨) * 아마투에르리가 슈드바덴 우승 1회: 1952(오펜부르거 FV) === 개인 === * [[엑스트라클라사]] 득점왕 3회: 1934, 1936[* 테오도르 페테르크와 공동 득점왕], 1938(루흐 호주프) * [[DFB-포칼|참메르포칼]] 득점왕 1회: 1942([[TSV 1860 뮌헨]]) [[분류:1916년 출생]][[분류:1997년 사망]][[분류:폴란드의 축구선수]][[분류:독일의 축구선수]][[분류:공격수]][[분류:루흐 호주프/은퇴, 이적]][[분류:켐니츠 FC/은퇴, 이적]][[분류:TSV 1860 뮌헨/은퇴, 이적]][[분류:카를스루어 SC/은퇴, 이적]][[분류:복수의 대표팀에서 뛴 축구선수]][[분류:폴란드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8 FIFA 월드컵 프랑스 참가 선수]][[분류:경찰공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