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대한민국 국회|[[파일:국회휘장(제헌-5대).svg|width=30]]]] {{{#cfa547 '''[[대한민국 국회의원|{{{#cfa547 대한민국 국회의원}}}]] ([[전라남도|{{{#cfa547 전라남도}}}]] [[광양군|{{{#cfa547 광양군}}}]])'''}}} || || 초대[br][[김옥주]] || → || '''2대[br]엄상섭''' || → || 3대[br][[김정호(1909)|김정호]] || ||<-5> [[대한민국 국회|[[파일:국회휘장(제헌-5대).svg|width=30]]]] {{{#cfa547 '''[[대한민국 국회의원|{{{#cfa547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특별시|{{{#cfa547 서울특별시}}}]] [[용산구(선거구)|{{{#cfa547 용산구}}}]])'''}}} || || 3대[br][[남송학]] || → || '''4대[br]엄상섭''' || → || 5대[br][[장면]] || [include(틀:역대 대검찰청 차장검사)] [include(틀:역대 부산지방검찰청 검사장)] [[파일:external/rokps.or.kr/324.jpg|width=150]] 嚴詳燮 [[1907년]] [[5월 23일]] ~ [[1960년]] [[5월 3일]] [목차] == 개요 ==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교육자, [[정치인]]이다. 본관은 [[영월 엄씨|영월]](寧越)[* 28세 섭(燮) 항렬.][[http://blog.daum.net/yacho2011/1864|#]], 호는 효당(曉堂)이다. 가끔 소설가 [[염상섭]], 아나운서 [[엄성섭]]과 혼동되기도 한다. == 생애 == 1907년 [[전라남도]] [[광양시|광양군]] 진상면 섬거리[[http://m.xn--hc0bk2yb5hribo85b.kr/shop_contents/myboard_read.htm?load_type=&page_idx=0&tag_on=&h_search_c=0&h_search_v=&me_popup=&myboard_code=myboard4&page_limit=10&idx=83276&page=1&category_idx=12930|#]]에서 태어났다. [[광주교육대학교|전남공립사범학교]]를 졸업한 후 1926년부터 1928년까지 비아보통학교에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1930년 옥룡보통학교, 1931년 송학보통학교, 1934년부터 1936년까지 영암보통학교 및 영암심상고등소학교 등지에서 훈도를 지내며 교원생활을 하였다. 이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경성지방법원 및 산하 검사국에서 수습생활을 하다가[[http://db.history.go.kr/id/npda_1939_05_03_x0001_0830|#]], 1939년 5월부터 1940년까지 광주지방법원 사법관시보에 임명되어 근무하였으며, 1941년 [[조선총독부]] 검사에 임명되어[[http://db.history.go.kr/id/su_012_1941_01_15_0370|#]] 1942년부터 1943년까지 함흥지방법원검사국에서 검사로 근무하는 등 [[일제강점기]] 말기 사법계 관료로 근무하였다.[[http://db.history.go.kr/search/searchResultList.do?sort=&dir=&limit=20&page=1&pre_page=1&setId=17&totalCount=17&kristalProtocol=&itemId=jw&synonym=off&chinessChar=on&searchTermImages=%E5%9A%B4%E8%A9%B3%E7%87%AE&brokerPagingInfo=&searchKeywordType=BI&searchKeywordMethod=EQ&searchKeyword=%E5%9A%B4%E8%A9%B3%E7%87%AE&searchKeywordConjunction=AND|#]] [[8.15 광복]] 후 [[미군정]]기 하에서도 검사로 근무하며 [[대검찰청]] 차장까지 지냈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인 1948년 다른 동료 검사 일부와 일괄 사표를 제출하면서 성명서를 발표해 [[민족정기]] 양양을 위해 퇴진한다고 밝혔다. 이후 회고록을 통해 [[독립유공자|애국지사]]들에게 면목이 없다면서 "왜제통치에 협력하였다는 것만은 아무리 사과를 해도 모자랄 것"이라고 말하였다.[[http://db.history.go.kr/id/dh_008_1948_08_23_0090|#]] 한편 대한민국 [[형법]] 초안 작업에 깊은 관여를 하였고 한국 형법학의 기초를 다졌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라남도 광양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자유당]]에 입당하였다가 다시 탈당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당 [[김정호(1909)|김정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5년 [[민주당(1955년)|민주당]] 창당에 참여하고 인권옹호위원회 의장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구(선거구)|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국회의원]]인 자유당 [[남송학]]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제4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60년, [[의원내각제|내각 책임제]] 개헌기초특별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다가 5월 3일 개헌을 위한 토론회 중 [[졸도]]하여 [[돌연사]]로 [[사망]]하였다. 2008년 공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사법 부문에 포함되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가 대표적인 친일 전력 반성 사례 중 하나로 언급했다. == 둘러보기 == [include(틀:제2대 국회의원/전라남도)] [include(틀:제4대 국회의원/서울특별시)] [[분류:제2대 국회의원]][[분류:1907년 출생]][[분류:1960년 사망]][[분류:제4대 국회의원]][[분류:자유당 국회의원]][[분류:민주당(1955년) 국회의원]][[분류:대검찰청 차장검사]][[분류:대한민국의 법조인]][[분류:영월 엄씨]][[분류:광양시 출신 인물]][[분류:고등문관시험 출신]][[분류:돌연사한 인물]][[분류:광주교육대학교 출신]][[분류:법조인 출신 정치인]][[분류:이승만 정부/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