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external/file.homun.or.kr/03_034_2_08.jpg|width=100%]]|| == 개요 == {{{+1 [[於]][[于]][[野]][[談]]}}}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인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이 저술한 [[한국]] 최초의 [[야담]]집. 총 5권 1책으로 인륜, 종교, 학예, 사회, 만물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 저자 유몽인에 대해 == 유몽인이라는 인물은 무난하게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1421|소개]]되기도 하고, 정반대로 극도로 까는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811030_005|사료]]도 있어서 교차검증하여 평가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 일단 어우야담에 실린 유몽인 본인의 모습은 딱 먹물 좀 먹은 [[선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유몽인은 훗날 [[정조(조선)|정조]]때 복권, 이조판서에 추증된다. 유몽인의 누이는 어깨너머로 [[사서삼경]]을 독파한 재녀로, 홍민이라는 사람에게 시집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게 바로 영의정을 지낸 홍서봉이다. 홍서봉은 [[최명길(조선)|최명길]]에 가려져서 그렇지 [[병자호란]]때 화의를 주도하고 실무를 도맡았으며, [[소현세자]]와 그의 자손들을 보호한 인물이다. [[인조반정]]에 참여해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냈는데 정작 외삼촌 유몽인이 역모에 몰려죽었지만 손을 쓰지 못했다. == 내용 == 조선 후기에 성행한 야담류의 효시이며 풍자적인 내용과 문체로 이루어져 있다. 조선 초중기 및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설화들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다. 유몽인은 [[광해군]]과 사이가 틀어져 낙향한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의 총신으로 여겨져 [[인조반정]] 직후 고변을 당해 아들과 함께 [[사형]]당했다. 그 때문에 어우야담을 정리하지 못해서 온전한 판본은 없고, 30여 종에 이르는 판본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은 [[1964년]] 이제현의 후손 유제한(柳濟漢)이 어우야담을 처음으로 정리해 다섯 권으로 인쇄해서 출판한 만종재본이다. 특히 유몽인 본인이 [[임진왜란]]을 경험한 세대이기 때문에 전란 속에서 고통을 받은 일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이 쓰여져 있다. >"[[인도|천축天竺]] 서쪽에 [[유럽|구라파]]가 있고, 그곳에는 [[가톨릭|하늘을 섬기는 도道]]가 하나 있다. 그 교는 [[유교]]도 아니요 [[불교]]도 아니요 [[도교]]도 아닌 별난 교이다. 모든 마음가짐이나 행동을 하늘을 어기지 말라 하고, [[예수|천존天尊]]의 상象을 만들어 놓고 받들어 모신다. [[석가모니|석가]]와 [[노자]]를 배척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유교를 원수처럼 여긴다. 우리의 도를 많이 인용하여 말하면서도 큰 근본에서는 현격하게 다르다. 석가의 [[윤회]]설도 배척하며 [[천국/기독교|천당]]과 [[지옥(기독교)|지옥]]이 있다고 한다. 또 그 풍속은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평생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는 군자를 뽑하서 [[교황|교황敎皇]]이라고 이름한다. 교황은 천주의 가르침을 퍼뜨리며 세습으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콘클라베|그 무리들 가운데에서 가장 현명한 자를 택하여]] 교황으로 세운다. 그는 사사로운 가정의 생활이 없이 오로지 그 몸을 공무에만 맡기는 것이다. 자식은 물론 없고 억조창생을 모두 자식이라고 한다. >[[성경|그들의 글]]은 [[이슬람|회회교回回敎]]의 [[쿠란|그것]]과 매우 닮아서 왼쪽으로부터 나가고, [[로마자|글자]]는 [[가로쓰기|횡서橫書]]로 쓰게 되어 있으며, 그것을 성현의 말이라고 한다. 그 무리 가운데 천문성상天文星象에 정통한 '[[마테오 리치]]'라는 자가 있다. 그는 태어나기는 구라파에서 났으며, 서역 8만 리를 주유하며 10여 년간 천금의 재산을 모았다가 그것을 다 버리고 [[청나라|중국]]에 들어와서 여러 경서들을 모두 섭렵하고 성현의 글도 읽고하여 계묘년에 이르러 책을 쓰니, 모두 상하권으로 여덟 편編이 되었다. 모두 천주교의 가르침을 썼는데, 그 끝 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한나라]] 애제哀帝 원수元壽 2년, [[크리스마스|동지가 지난 사흘 뒤]]에 [[이스라엘|그 나라]]에 [[성모 마리아|동정녀]]가 강림하여 남자와 교접이 없이 아이를 배고 낳으니 사내아이라, 이름은 [[예수]]라고 했다. 그리고 예수는 세상을 구제하면서 몸소 서역의 신인神人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사신을 파견했더니 사신은 반도 채 못 가서 인도로부터 불경을 얻어 가지고 와서 그것이 성교聖敎라고 잘못 전해진 일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마테오 리치란 자는 이인異人이다. 세상을 두루 돌아다니며 천하의 지도를 그렸고, 여러 나라의 말을 알아 중국에 와서는 포교를 했다. 그 포교의 행각은 동남의 여러 오랑캐 나라에도 미치어 존신尊信하는 바가 되었다. 전자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코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도 이 도를 운위했고, [[허균]]許筠이 중국에 들어가서 그 지도와 교지敎旨 12장章을 갖고 돌아왔으나, 모두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죄임을 면치 못했다."[* 유몽인, 이희준 저, 이민수 역, 『어우야담·계서야담』, 서울, 사단법인 올재, 2022, p.71-72.] >---- >- 유몽인 저, 『어우야담』, 제13장 「서교西敎」에서. 내용 중에는 [[천주교]]에 대한 설명도 들어 있다. 정확히는 [[중국]]에 온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가 저술한 [[천주실의]]에 대해 설명하면서 함께 천주교에 대해 설명한 것. [[천주교]]의 교리와 [[교황]] 제도에 대해 설명하며, 조선의 유불선(유교, 불교, 도교)과의 비교한 평가도 있다. 물론 유몽인 본인이 성리학자인 관계로 천주교에 대해선 비판적인 논조가 강하다. 후대의 [[이익(실학자)|이익]]이 천주실의를 소개한 이후로 당대 학자들이 '''천주교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공격과 옹호를 했는데, 유몽인이 어우야담에서 쓴 천주교 비판은 이런 논의의 선두주자 격라고 할 수 있다. [[이순신]]에 대한 일화도 수록되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다음과 같다. > "만력萬曆 임진, 계사년 사이에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은 [[한산도]]에 군진을 치고 있었다. 그 아들 역시 종군하여 [[충청도]]에 이르러 왜적과 만나 싸움이 벌어졌다. 단숨에 서너 놈 왜적의 목을 베고, 이어 적을 쫓아 말을 달리던 중 한 무리의 왜적들이 초가집에 감복해 있다가 불시에 습격했다. 이리하여 순신의 아들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그러나 순신은 이러한 소식을 알 까닭이 없었다. >뒤에 충청도 방어사가 왜적 열세 명을 잡아 산 채로 한산도에 보냈다. 그날 밤에 순신이 잠에서 놀라 깨어나 비로소 아들이 죽은 것이 아닐까 의심했다. 그런데 곧이어서 부음이 날아들었다. 순신은 잡혀 온 왜적을 끌어내어 물었다. >"어느 날쯤에 너희들은 충청도 어느 곳에서 붉고 흰 준마를 탄 사람을 만난 일이 있느냐? 너희들이 그 사람을 죽이고 말을 빼앗았을 터인즉, 말은 어디 있느냐? 말을 찾고자 한다." >순신이 이렇게 타이르자, 그 가운데에서 한 놈의 왜병이 앞으로 나와 아뢰었다. >"어떤 날 한 소년이 붉고 흰 얼룩말을 타고 우리를 추격하였습죠. 소년이 아군 서너 명을 죽였으므로 우리는 초가집에 잠복해 있다가 불시에 소년을 습격했고, 말은 빼앗아 우리 장수에게 바쳤습니다." >다른 왜적 놈들에게 물어도 모두 그렇다는 대답이었다. 순신은 애통해 마지 않았다. 왜놈들은 옥에서 끌려 나와 참수당했다. 그러고는 초혼제를 올려서 아들에게 이 일을 말해 주었다."[* 유몽인, 이희준 저, 이민수 역, 앞의 책, p.78-79.] >---- >- 유몽인 저, 『어우야담』, 제16장 「영혼靈魂」에서. 이 일화는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에서도 각색되었다. 다만 이순신의 아들로서 왜병에게 죽은 것으로 알려진 이면은 한산도가 아닌 [[명량 해전]] 이후에 죽었기에 시간대가 맞지 않다. 여담으로 이순신 본인은 유몽인을 별로 안 좋게 평가했다. 유몽인이 [[암행어사]]로 남쪽을 돌아다니면서 관리들을 심사하는데 임실현감 이몽상과 무장현감 이충길, 영암군수 김성헌, [[낙안군|낙안군수]] 신호를 파면해 내치고 순천부사 [[권준]][* 항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순신 장군이 아꼈던 장수이기도 하다.]은 "[[탐관오리]]의 으뜸"이라고 조정에 보고하면서 담양군수 이경로나 나주목사 이순용, 장성현감 [[이귀]], 창평현감 백유항 등에 대해서는 그들의 과오는 덮어놓은 채 상을 요청했다거나, 그리고 [[조선 수군|수군]]을 친척 가운데서 뽑는 것과 장정 넷 가운데 둘을 전장에 내보내는 안에 대해서 비난한 적이 있었다. [[난중일기]] 갑오([[1594년]])일기 2월 16일자에 이 이야기를 언급한다. > "국가의 위급한 난리는 생각하지 않고 눈앞의 일에만 몰두해 남쪽의 헛소리에만 귀기울였다. 나라를 그르치는 교활하고 간사한 말이 [[진회]]가 무목([[악비]])한테 한 짓과 다를 바 없다" 이렇게 혹독하게 비판을 해놨다. 이 당시 관점에서 진회는 간신, 악비는 충신 그 자체를 상징하는 인물인데 '''이순신은 유몽인을 진회에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충무공의 인물 비판은 좀 걸러들어야 할 것이, 그 능력과 애국심을 누구도 의심치 않는 [[사명대사]]조차도 땡중이라고 까내리신 분이 충무공이다. 충무공 본인을 기준으로 삼다 보니 그 기준을 충족할만한 인물이 별로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유몽인 본인은 어우야담에서 다들 충신으로 추앙하는 [[남송]]의 [[문천상]]을 왜 [[원나라]]에 사로잡힌 후 [[애산 전투]]에서 송 황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즉시 자결하지 않고 옥중에서 5년이나 더 구차한 목숨을 이어갔냐고 비판하는 글을 적었다. 조선 후기 문신 [[장유(조선)|장유]]가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사실과 다른 것이 많다고 저서 '계곡집(谿谷集)'에서 비판한 적이 있다.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을 지었는데, 민간의 비속한 일들을 많이 기록하면서 그 사이에 시화(詩話)나 국조(國祖)의 고사(故事)도 언급하였다. > >그런데 내가 우연히 한 권을 얻어서 들춰보았더니, 그 글이 매우 속될 뿐더러 기록 자체도 사실과 다른 곳이 눈에 많이 띄었다. 예컨대 박원종(朴元宗)이 36세에 영상(領相)이 되었다고 한 것이나, 홍유손(洪裕孫)이 90세에 아들을 낳았다고 한 것, 그리고 김수온(金守溫)이 대제학(大提學)이 되었다고 한 것들은 모두가 오류를 범한 것이다. >---- >ㅡ 《계곡집》 계곡만필 제1권 / [만필(漫筆)]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333A_0380_010_1300&solrQ=query%E2%80%A0%EC%96%B4%EC%9A%B0%EC%95%BC%EB%8B%B4$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40$solr_curPos%E2%80%A02$solr_solrId%E2%80%A0BD_ITKC_BT_0333A_0380_010_1300|#]] 또한 [[백두산]]에서 털북숭이 거대 괴물을 봤다는 [[만주]]사람의 이야기를 [[신립]] 장군이 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youtube(grxsVGq4Z7Y)] 돌베개에서 만종재본을 비롯한 30여 종의 이본을 대조하고 번역해서 완역본을 출판했다. 만종재본에 수록되지 않은 39화가 수록되었다. 필사본이 [[국립중앙도서관]] 및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분류:야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