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조선의 왕자군]] [[분류:서출]] [[분류:1498년 출생]][[분류:1506년 사망]][[분류:독살형된 인물]] [include(틀:조선의 왕자/목조 ~ 연산군)] ---- ||<-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5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ffd400 조선 연산군의 왕자[br]{{{+1 양평군 | 陽平君}}}}}}'''}}} || || '''{{{#gold 출생}}}''' ||<-2>[[1498년]]^^([[연산군]] 4년)^^ || || '''{{{#gold 사망}}}''' ||<-2>[[1506년]]^^([[중종(조선)|중종]] 원년)^^ [[10월 10일]]^^([[음력]] 9월 24일)^^ {{{-1 (향년 8세)}}} || || '''{{{#gold 본관}}}''' ||<-2>[[전주 이씨]] || || '''{{{#gold 휘}}}''' ||<-2>인(仁) || || '''{{{#gold 부모}}}''' ||<-2>부왕 [[연산군]][br]모후 [[숙의 이씨(연산군)|폐숙의 이씨]] || || '''{{{#gold 초명}}}''' ||<-2>강수(康壽) || || '''{{{#gold 봉호}}}''' ||<-2>'''양평군(陽平君)'''[* 봉호는 [[경기도]] [[양천]](현재의 [[서울특별시]] [[강서구(서울특별시)|강서구]], [[양천구]] 일대)의 옛 지명인 양평(陽平)에서 유래했다. 지명 ‘[[양평군]](楊平郡)’과는 [[한자]]가 다르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조선]] 중기의 [[조선/왕실|왕족]]. [[연산군]]의 유일한 [[서출]] 왕자군[* 이복동생들은 전부 유아기에 죽어 봉군되지 못했다.]으로, 친모는 [[숙의 이씨(연산군)|폐숙의 이씨]]다. [[중종반정]]으로 [[사약|사사]]되었다. == 생애 == [[문종(조선)|문종]]의 유일한 외손자인 정미수의[* 문종의 딸 [[경혜공주]]의 아들.] 집과, 어머니 [[숙의 이씨]]의 친척인 이손[* 양평군의 외할아버지의 [[사촌]]이다.]의 집에서 성장해서 양평군이 이손을 아버지처럼 따랐다. 1506년(연산군 12년) [[중종반정]]으로 아버지 [[연산군]]이 쫓겨났다. 이 때 이손은 반정 세력들에게서 양평군을 지키려고 그를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러나 양평군의 유모와 보모들이 혹시 몰라 양평군을 다시 영춘군[* 세종의 서자 [[영해군(1435)|영해군]]의 장남.]의 집으로 피신시켰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801007_004|#]] 그러나 결국 반정세력들에게 잡혀 [[황해도]] [[수안군|수안]]으로 [[귀양]]을 갔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05_005|#]] 아버지가 [[왕]]이었던 것을 부정당했기 때문에 양평군 역시 폐작되었다. [[중종(조선)|중종]]은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연산군]] 자녀들의 처리를 매듭 지으려 했다. 하지만 반정 공신들이 폐주(연산군)의 아들들을 놔두면 위험하다면서 죽일 것을 계속 청했다. 중종은 가슴이 아파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했지만 공신들의 강한 요청으로 어쩔 수 없이 조카들을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래서 1506년 10월 10일에[* 음력 9월 24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24_003|#]] 요 8세. 같은 날 이복형 [[폐세자 이황]]과 이복동생 [[창녕대군]], 이돈수도 각자의 유배지에서 죽었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폐세자 이황, version=50)]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녕대군, version=4)] == 사망 이후 == [[중종(조선)|중종]]은 그나마 장남인 이황 만이라도 [[장례]]라도 후하게 지내주려 했다.[* 사실 도리상 이게 맞긴 하다. 죽을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닌데 죽인다면 적어도 [[장례]] 쯤은 후하게 치러주는 게 예의다. 실제로 진짜 '''죽을 짓 한''' [[폐비 윤씨]], '''좀 꺼림찍하지만 진짜 죄를 지은''' [[장희빈]]도 나라에서 장례를 치르는 것을 도왔고 이후 왕비에 준한 제사를 치루게 했다.] 하지만 반정 공신들은 이미 죽은 [[서인]]에게 후한 대우는 필요 없으니 관곽이나 내려주라고 하여 역시 무산되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109025_002|#]] 이 때 죽은 [[연산군]]의 자녀들이 10세 이하의 어린이들인 걸 감안하면 공신들이 어지간히 불안해했고 또 그 만큼 자신들의 반정에 자신감이 부족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후 [[인조반정]] 때에는 [[폐세자 이지]]의 나이가 이황보다 더 많았고 [[광해군]]은 [[연산군]]에 비해 쫓겨날 명분이 부족했는데도 인조와 인조반정의 공신들은 이지를 죽이지 않았다. 단 나중에는 죽이는데, 그마저도 이지가 유배지에서 탈출하려다 걸렸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서 [[연산군]]은 쫓겨날 명분이 충분했고[* 연산군을 쫓아낸 게 잘못이라며 일어난 사건은 없었다. 반면 광해군은 쫓겨난 이후 역모사건에 계속 연루된다.] 그 자식들까지 모조리 사사시킨 걸 보면[* 실제로 어린이와 노약자는 역모에 연루되어도 노비로 만들거나 용서해주는 선에서 그쳤다. 정말 예외가 있었다면 기축옥사 때 이발의 아들이 곤장 맞다 죽었고 봉산옥사 때 어린이들까지 끌려와 국문받은 게 거의 전부다.] [[중종반정]] 핵심부들의 취약성을 보여준다.[* 사실 핵심부들은 모두 다 연산군 밑에서 한자리 했었던 사람들이다. [[유자광]]부터가 [[무오사화]]의 주역이다.] 백 번 양보해서 이황은 한 때 세자였기에 위험하다고 해도, 양평군을 포함한 나머지 자식들까지 죽인 것은 지나친 처사였다. 나중에 중종은 [[박원종]]에게 원한을 품었는지[* 정쟁을 떠나서 결국 중종의 일가친척들을 다 죽인 것이니...] 그가 죽은 후에 그의 하나뿐인 아들(서자)인 박운이 분경[* 奔競, 벼슬을 얻기 위해 청탁을 하는 일.]을 하는 죄를 저질렀다는 김안로 측에 고변이 들어와 그를 변방으로 유배보냈는데 [[정광필]]이 "공신의 하나뿐인 자식인데 선처해주죠"라고 하니 싸늘하게 말하기를 "이자가 공신에 자손이라고 봐주면 분경을 하는 자가 또 나타나지 않겠느냐" 하며 거절했다. 실제로 [[중종(조선)|중종]]은 신하들에게 냉혹했지만 자신의 친족과 혈육에게 자상한 군주였다. 하기사 자신의 형인 [[연산군]]과는 아무런 원한도 없었고 신하들에게 옹립된 왕이니 [[인조]]와 궤를 달리 할 수밖에.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폐세자 이황, version=50)]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창녕대군, version=4)] === 양평군 사칭 사건 === 양평군이 죽은 지 7년 뒤인 1513년([[중종(조선)|중종]] 8년) 2월 12일에[* 음력 1월 7일.], 15살 소년 만손(萬孫)[* 또는 신능손.]이라는 사람이 나타나 자신이 양평군이라고 주장했다. 만손은 자신이 살아남은 배경을 자세하게 이야기했고, 이에 사람들이 놀라면서도 진짜인지 의심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801007_003|#]] 이에 양평군을 키웠던 이손은 진위를 판별해보자고 했다. 그러나 의금부당상 김용기 등은, 만손을 양평군의 [[유모]]와 보모, [[노비]]들에게 보였는데 양평군과 만손의 특징이 많이 달랐기 때문에 만손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손을 비롯한 양평군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양평군은 얼굴이 희고 코에 [[천연두]] 자국이 있었으며, 정수리에 뜸을 뜬 흔적과 [[귀걸이]]를 꿰어 크고 넓은 구멍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만손은 얼굴이 검고 코도 멀쩡했으며 귀걸이를 꿴 구멍도 없었다.[[http://sillok.history.go.kr/id/kka_10801007_004|#]] 결국 거짓임이 밝혀져 만손은 그 해 9월 14일에[* 음력 8월 16일.] [[사형]]당했다. 진짜였어도 숨어살았던 죄로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