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송나라/인물]][[분류:1098년 출생]][[분류:1157년 사망]] [include(틀:송사)] ||<-2> '''{{{+1 양정[br]楊政}}}''' || || '''시호''' ||양의(襄毅) || || '''성''' ||양(楊) || || '''이름''' ||정(政) || || '''자''' ||직부(直夫) || || '''생몰''' ||1098년 ~ 1157년 || || '''출신''' ||원주(原州) 임경현(臨涇縣) || || '''부친''' ||양충(楊忠)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송]]의 명장으로 자는 직부(直夫)이다. == 생애 == 원주(原州) 임경현(臨涇縣) 출신이다. 1104년 [[서하]]의 침공으로 아버지 양충이 전사하자, 양정은 어린 나이임에도 성인처럼 양충의 죽음을 슬퍼했다. 양정의 어머니는 양정을 기이하게 여기며 말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이는 반드시 임금에게 효도한다는데, 이 아이가 장차 우리 집안을 크게 일으키려는 것인가? 1125년 [[요나라]]가 [[송나라]]]와 [[금나라]]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조정에서 해상의 맹을 이행하지 않자, 분노한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하기 시작한다. 양정은 이때 모집에 응하여 궁수가 되었으며, 1126년 서하의 침공을 막아내며 점점 이름이 알려졌다. [[건염(연호)|건염]] 연간, 양정은 오개를 따라 금나라를 공격하여 9전 전승의 성과를 거두고 그 뒤에도 여러 차례 공을 세워 무현랑(武顯郞)이 되었다. 1131년, 금군이 화상원(和尙原)으로 침공하고 다시 전괄관(箭筈關)을 공격하자, 양정은 군대를 인솔하여 금군의 천호(千戶) 1명과 추장 2명을 사로잡아 참수하여 우무대부(右武大夫)로 승진하였다. 같은 해 금군이 다시 군대를 집결시켜 보계(寶雞)에서 원주까지 울짱을 치기 시작했다. 오개는 금나라와 며칠 동안 지구전을 벌이다가 양정에게 장병들을 인솔하여 금군을 요격하도록 명했으며, 양정은 날마다 수십합을 겨뤘고 양정이 거느렸던 사졸들은 모두 일당백의 기세를 자랑했다. 양정은 다시 기병(奇兵)을 내어 금군의 보급로를 차단했고 금군이 군량이 부족해서 물러나려고 할 때 양정은 다시 퇴각하는 금군을 공격하여 금나라의 만호(萬戶)와 수령 300여 명, 갑옷을 갖춘 군사 860명을 사로잡아 이때의 공적으로 공주자사(恭州刺史)로 임명되었다. 당시 어떤 이가 양정을 시기하여 양정의 가족이 금나라에 있으니 그에게 병권을 쥐어줘서는 안된다고 오개에게 말했으나 오개는 듣지 않았고 양정은 더욱 감동하여 분발하였다. 1132년, 금군이 보병과 기병 수천 명을 합쳐 어룡천(魚龍川) 어귀에 성채를 세우자, 양정은 정예 병력을 이끌고 다시 금군을 물리쳐서 농주단련사(隴州團練使)로 승진하고 지방산원(知方山原)으로 옮겼으며, 군수품과 양곡을 차곡차곡 쌓기 시작했다. 다시 금나라의 대군이 공격해오자, 양정은 금나라의 침공을 물리쳤으며, 지봉주(知鳳州)로 전임되었다. 1133년, 금나라(金)가 요풍관(饒風關)을 공격하자, 양정은 오개를 따라 요풍관에서 6일 동안 전투를 벌였고 뒤에 명주관찰사(明州觀察使)로 전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