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양서)] [include(틀:남사)] ||<-2> {{{#ece5b6 '''{{{+1 소량의 인물[br]{{{+1 羊鴉仁 | 양아인}}}}}}'''}}} || || '''{{{#fff 작호}}}''' ||광진현후^^(廣晉縣侯)^^ || || '''{{{#fff 성}}}''' ||양(羊) || || '''{{{#fff 이름}}}''' ||아인(鴉仁) || || '''{{{#fff 자}}}''' ||효목(孝穆) || || '''{{{#fff 출신}}}''' ||태산군(泰山郡) 거평현(鉅平縣) || || '''{{{#fff 생몰}}}''' ||? ~ 549년 || || '''{{{#fff 국적}}}''' ||[[북위]](北魏) → [[양(육조)|양]](梁) || [목차] [clearfix] == 개요 == [[남북조시대]] [[북위]], [[양(육조)|양나라]]의 인물로 자는 효목(孝穆). == 생애 == 태산군(泰山郡) 거평현(鉅平縣)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용맹하였다. [[북위]]에서는 군의 주부(主簿)를 맡았다가, 형제들과 함께 보통(普通) 연간[* 520년 ~ 527년]에 형제들과 함께 양나라로 망명하여 광진현후(廣晉縣侯)로 책봉되었다. 양아인은 양나라로 귀순한 뒤 청주(青州)와 제주(齊州)를 정벌할 때 누차 공적을 세웠고, 점점 원외산기상시(員外散騎常侍), 역양(歷陽) 태수로 옮겼다. 532년에는 지절(持節), 도독초주제군사(都督譙州諸軍事), 신위장군(信威將軍), 초주 자사를 지냈고, 546년에는 태자좌위솔(太子左衛率)로 제수되고, 지절, 도독남북사예초4주제군사(都督南北司豫楚四州諸軍事), 경거장군(輕車將軍), 북사주(北司州) 자사를 맡았다. [[후경]]이 양나라로 귀순할 때, 양아인은 3천 군대를 이끌고 현호(懸瓠)에서 후경의 귀순을 맞이하였고, 도독예사회기은응서예등7주제군사(都督豫司淮冀殷應西豫等七州諸軍事), 사예2주(司豫二州) 자사가 되었다. 후경이 와양(渦陽)에서 패배하고 위군가 점점 가까워지자, 양아인은 군량의 보급을 우려하여 북사주로 돌아갔고 조정에 진정서를 올린다. [[무제(양)|양무제]] 소연은 양아인의 진정서에 분노하였고, 양아인은 양무제의 분노를 두려워하여 회수에 진수하였다. 뒤에 후경이 반란을 일으키자, 양아인은 군대를 이끌고 양무제를 구원한다. 548년, 후경이 맹약을 저버리자, 양아인은 조백초(趙伯超), 남강왕(南康王) 소회리(蕭會理)와 함께 후경을 공격하였으나, 도리어 후경에게 대패한다. 건강성이 함락된 뒤, 양아인은 후경에 의해 오병상서(五兵尙書)로 임명되었지만, 항상 분발하려고 하였다. 그래서인지 양아인은 주변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조정의 총애를 받았는데, 결국 국가의 두터운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다. 사직이 기울 때 몸은 능히 죽지 못하였고, 구차하게 살아남아 간신히 재앙을 벗어나 지금에 이르렀다. 만약 이대로 죽는다면, 죽어서도 울분이 풀리지 않고 남을 것이다. 549년, 양아인은 강서(江西)로 달아나 수백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다시 강릉(江陵)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동완(東莞)에 이르러 옛 북서주 자사였던 순백도(荀伯道)의 아들인 순귀(荀晷)에게 살해되고 만다. 이 사정을 알게 된 양아인의 조카 양해진(羊海珍)은 순귀의 아버지인 순백도는 물론 순귀의 생모, 순귀의 조부모 등 5명의 무덤을 파헤쳐 각각 유골의 반을 관과 함께 불태웠고 나머지는 잡다한 뼈와 섞어서 5개의 자루에 담아 자루에 ‘순귀의 조부모와 누군가의 뼈’라고 적었다. [[분류:남북조시대/인물]][[분류:양(남조)/인물]][[분류:타이안시 출신 인물]][[분류:54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