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신라의 고총 고분군)]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현풍 분지 전경.jpg|width=100%]]}}} || || {{{#fbe673 '''테크노폴리스 건립 이전의 현풍 분지의 전경[* 사진 출처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5, 《달성 초곡산성·양리고분군 정밀지표조사보고서달성 초곡산성·양리고분군 정밀지표조사보고서》.]. 초곡산성이 있는 능선에 위치한다.'''}}} || [목차] [clearfix] == 개요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양리를 중심으로 위치하는 [[신라]]의 고분군. '양동 고분군'이라고도 하지만 통상 '양리 고분군'이라고 불린다. == 조사내용 == [[비슬산]]에서 뻗어나온 서쪽 능선의 척릉(脊稜)을 따라서 분포한다. 해발고도 300~500 m에 걸쳐서 군집을 형성하는데, 신라 고분군 중에서는 굉장히 높은 곳에 조성되어 이례적이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2005년 지표조사를 실시하여 현황을 파악하였다. ||[include(틀:지도, 장소=초곡산성, 높이=224px, 너비=100%)]||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양리 고분군 분포도.jpg|width=100%]]}}} || || {{{#fbe673 '''테크노폴리스 건립 이전의 현풍 분지의 전경[* 사진 출처 -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 2005, 《달성 초곡산성·양리고분군 정밀지표조사보고서달성 초곡산성·양리고분군 정밀지표조사보고서》.] 초곡산성이 있는 능선에 위치한다.'''}}} || [[교동 고분군|창녕 양식 토기]][* 창녕지역이 5세기에 이미 신라화되었다는 전제를 둔다.]과 지금 달성군의 화원유원지가 있는 [[성산리 고분군]]을 중심으로 나타나는 [[토기]]양식과는 달리 달성군의 [[유가읍]], [[현풍읍]] 일대에서 다소 양상이 다른 토기 양식이 나타난다. 00지역 양식 [[신라토기]]의 존재는 역시 별도의 토기 생산과 유통망을 지니고 의례적으로도 같은 범주에 있다고 판단되므로 현풍지역에 별도의 정치체, 내지는 구분되는 집단으로 존재하였다고 상정했다. 참고로 고분이 형성된 분지에는 [[유가읍]]과 [[현풍읍]]이 있지만, 학계에서 이 지역을 부를 때는 관용적으로 '현풍 지역'이라고 표현한다. 통상 양리 고분군의 토기 양식은 '현풍양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 양식의 가장 특징은 돌출된 톱니 모양 장식이다. 기형상으로는 [[신라토기]], 논자에 따라서는 창녕 양식 신라토기의 기형을 닮았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톱니모양의 돌출된 장식은 정말 딱 현풍 지역에서만 나오는 것이라서 유물의 수량적으로나 정식 발굴조사상[* 발굴돼서 나온 톱니장식 고배는 아직 없다. 모두 도굴품이거나 지표채집품이다.]으로나 양식을 설정함에 무리가 다소 있는데도 불구하고, 현풍 양식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고배뿐만 아니라 기종적으로도 영배(鈴杯)라고 불리는 토기와 특유의 뚜껑 장식 등을 지역적으로 공유하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위의 맥락에서 문헌에 등장하는 비지국의 존재를 양리 고분군과 결부하기도 한다. 한편 각주에 있듯이 창녕 지역 즉, [[비자벌]] 세력과의 관련성에 주목하는 사람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비지국]], [[비자벌]] 참조. 양리 고분군에는 신라 고분 약 6백여 기가 있지만, 정식 발굴된 것은 없고 대부분 도굴로 이미 --탈탈-- 털린 상태다. 그래도 나름 고총 고분군답게 지름 20 m를 넘는 대형분들이 일부 존재하는데, 그 중에서 지역에서 '팔장군묘'라고 부르는 고분도 있다. 큰 무덤 8기가 있다고 팔장군묘... 뜬금없겠지만 [[고구려]] [[장군총]]의 네이밍이 이런 식이라고 보면 된다. 정식 발굴조사가 없는 상황에서 지역양식을 설정하고 집단을 상정하다보니 학계에서도 다소 관심이 없지만, 엄연히 고총고분군이며 지표조사상으로도 밝혀진 내용이기 때문에, 추가로 정식 발굴조사를 하면 가치가 재조명될지도 모른다. == 초곡산성 == [include(틀:대한민국의 산성)] ||<-5>
[[파일:대구광역시 휘장_White.svg|width=30&height=30]] '''{{{#ffffff 대구광역시의 기념물}}}''' || || 16호 ||<|2> ← || '''17호''' || || 노변동사직단 || '''초곡산성''' || ---- ||<-2> [[파일:대구광역시 휘장_White.svg|width=28]] '''{{{#ffffff 대구광역시의 기념물 제17호}}}''' || ||<-2> {{{#fff {{{+1 '''초곡산성'''}}}[br]{{{-1 草谷山城}}}}}} || ||<-2>{{{#!wiki style="margin: -10px"; margin-top: -5px; margin-bottom: 16px" [include(틀:지도, 장소=팔거산성, 너비=100%, 높이=100%)]}}}|| || '''{{{#fff 소재지}}}''' ||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읍]] 초곡리 산1 일대 || || '''{{{#fff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성 / 성곽 || || '''{{{#fff 수량 / 면적}}}''' || 1,523.712㎡ || || '''{{{#fff 지정연도}}}''' || [[2008년]] [[4월 10일]]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초곡산성.jpg|width=100%]]}}} || || {{{#fbe673 ''' 초곡산성 전경[* [[https://www.heritage.go.kr/heri/cul/imgHeritage.do?ccimId=1645419&ccbaKdcd=23&ccbaAsno=00170000&ccbaCtcd=22|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 || ---- [clearfix] 양리 고분군의 뒤로는 배후산성으로 초곡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통용되는 명칭이 꽤나 많아서 '양리산성'ㆍ'양동산성'ㆍ'초곡산성'ㆍ'와우산성' 등으로도 불린다. 여기서는 지표조사 내용을 참고로 '초곡산성'이라고 지칭한다. 통상 삼국시대의 고분군들은 [[산성]] 같은 [[성곽]]과 같이 형성됨이 특징이다. 초곡산성 또한 통상 그런 맥락에서 거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하 서술은 독자연구의 성격이 강하다] 엄연히 따져보면 산성 내부에 고분군이 형성된 점은 보통의 삼국시대 산성+고분군 조합과는 맞지 않다. 산성은 삶의 공간이고 고분군은 죽음의 공간으로 구분되는데, 그 고분군이 성곽 안에 있음은 지금의 초곡산성이 삼국시대 것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또한 전형적인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테뫼식 산성형태와 초곡산성은 차이가 있다. 신라의 산성은 보통 평탄면을 포함하면서 그 바운더리를 따라서 성벽이 진행하는 것이 특징인데, 초곡산성은 성 중앙에 산의 정상부 즉, 툭 튀어나온 지형을 포함하여 형성되어, 일반적인 삼국시대 테뫼식 산성과는 다르다. 이는 [[비슬산]], [[유가읍]]을 중심으로 전해지는 [[조선시대]] [[의병장]] [[곽재우]]와 관련된 활동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성벽의 축조 양태 또한 전형적인 삼국시대의 산성의 성벽과는 생김새가 다르다. 오히려 그다지 가공되지 않은 석재를 사용했다는 점에서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성벽 축조양상과 닮았다. == 관련 문서 == * [[고분문화 #s-4]] [[분류:고분]][[분류:신라/건축]][[분류: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