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튀르키예의 행정구역)] [[분류:튀르키예의 행정구역]] [[파일:터키 얄로바.jpg]] [목차] == 개요 == {{{+1 Yalova }}} [[튀르키예]] 서북부의 [[도시]]. [[이스탄불]]에서 동남쪽으로 40km, [[이즈니크]]에서 서북쪽으로 35km, [[이즈미트]]에서 서쪽으로 50km, [[부르사]]에서 동북쪽으로 45km 떨어진 [[마르마라해]]와 접하는 곳에 위치한다. 인구는 약 12만명으로, 터키에서 가장 작은 도인 얄로바도의 주도이다. [[1995년]]까지 이스탄불도에 속했을 정도로 이스탄불 광역권에 속한 도시 중 하나다. 옛 지명은 필라이였고, [[중세]]에는 [[니케아]]의 외항으로 성장하였다. 근현대에는 [[1920년]]부터 [[1921년|21년]]까지 [[그리스군]]의 얄로바 학살과 [[1999년]] 대지진 등의 아픔을 겪었다. 시내에는 시립 박물관, 지진 박물관이 있고 서남쪽 7km의 숲에는 국부 [[무스타파 케말]]의 여름 별장을 개조한 아타튀르크 박물관이 있다. 기후는 [[여름]]에도 35도를 잘 넘지 않고 [[겨울]]에는 영하로 잘 떨어지지 않아 온화하다. == 역사 == [[기원전 2천년기 이전|기원전 3천년]] 전부터 [[마을]]이 있었다. [[히타이트]] ~ [[프리기아]] 시기에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여 '문'이란 의미인 필라이(Πύλαι)라 불렸고,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통의 거점이었다. [[622년]], [[사산 제국]]을 상대로 영토 수복에 나선 [[이라클리오스]]와 [[1071년]] [[셀주크 제국]]에 맞서기 위해 [[만지케르트]]로 향하던 [[로마노스 4세]] 모두 이곳을 거쳐 아시아로 진군하였다. [[9세기]] 전란기에는 [[아바스 왕조]]와의 국경에서 오는 파발을 위한 숙소가 있었고, 이후의 평화기에는 [[콘스탄티노플]]로 가축을 수송하는 장이었다. [[11세기]] 말엽 니케아를 점령한 [[룸 셀주크]] 군이 일시 정복했지만 [[1차 십자군]]과 함께 [[동로마 제국]]령으로 수복되었고, [[1147년]]에는 프리기아 출신 그리스 난민들이 정착하며 도시화되었다. [[1199년]]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무역 조약으로 필라이는 경제 특구(에피스켑시스)로 지정되어 상업적으로 성장하였고, [[4차 십자군]] 이후에는 [[니케아 제국]]의 명목상 수도인 니케아의 외항으로써 중시되었다. [[1302년]], [[오스만 제국]]이 일대를 정복하였고, 이때 상당수의 주민들은 도시를 버리고 [[마르마라해]]의 프린스 제도로 피신하였다. 오스만 제국기 '평평한 해안가의 집'이란 의미인 얄르오바 혹은 얄카바드로 불리던 도시에는 [[19세기]] 후반 [[아바르족]] [[무슬림]]들이 유입되었다. [[1914년]] 기준 1만의 [[그리스인|그리스계]]와 3천의 [[아르메니아인|아르메니아계]] [[기독교인]] 및 8천의 [[무슬림]] 등 2만여명이 거주하였다. [[튀르키예 독립 전쟁]] 당시 [[1920년]] 9월 [[그리스군]]이 점령하여 수백여 [[튀르키예인]]을 [[학살]]하였고, [[1921년]] 7월 [[튀르키예군]]이 수복하였다. 국부 [[무스타파 케말]]은 [[1929년]] 얄로바에 별장을 짓고 여름 피서지로 활용하였다. 본래 이스탄불도에 속하였으나 [[1995년]] 자체적인 도로 분리되었다. [[1999년]] 8월 [[1999년 이즈미트 대지진|이즈미트 대지진]] 당시 2천 5백여명이 사망하고 1만 5천채의 건물이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으나 복구되었다. [[2014년]] 대국민의회 총선 당시에는 중앙선관위의 검표 결과 당선자가 야당에서 [[정의개발당|여당]] 후보로 바뀌며 논란과 반발이 있었다. [[분류:튀르키예의 도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