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알브레히트 뒤러}}}[br]Albrecht Dürer''' || ||||<#fff,#191919>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lbrecht_Dürer_-_1500_self-portrait_(High_resolution_and_detail).jpg|width=100%]][br][* 1500년에 그린 모피코트를 입은 자화상으로 현재 [[루브르 박물관]] 소유. 여담으로 원래 당대에 정면을 향한 초상화는 거의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의 삼위일체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다.]}}} || ||<|2> '''출생''' ||[[1471년]] [[5월 21일]]||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2> '''사망''' ||[[1528년]] [[4월 6일]] (향년 56세)|| ||[[신성 로마 제국]] [[뉘른베르크]]|| || '''국적''' ||[[파일:신성 로마 제국 국기(후광 포함).svg|width=25]] [[신성 로마 제국]]|| || '''직업''' ||화가, 판화가|| || '''배우자''' ||아그네스 뒤러 ^^(1494년 결혼)^^|| || '''종교''' ||논쟁중[* 뒤러의 종교관은 끝이 나지 않는 미술사학계 만년떡밥 중 하나다. 말년에 루터의 주장에 상당부분 공감했던 것은 분명하나, 가톨릭 교회와 공식적으로 단절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루터 외에 에라스무스 등의 가톨릭 내 개혁파와의 교류도 활발했다. 그리고 이후 루터파 운동이 과격화되면서 루터와 다소 거리를 두는 모습도 보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뒤러의 생전에만 해도 루터의 지지자들 중 여전히 스스로를 개신교라는 새로운 종파를 만드는게 아니라 체제 내 개혁파로 인식한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더더욱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가 쉽지 않다. "[[https://www.smu.edu/Bridwell/SpecialCollectionsandArchives/Exhibitions/Durer2011/Durer-and-the-Reformation|Dürer and the Reformation]]", smu.edu, [[http://justus.anglican.org/resources/bio/148.html]], Wolf, Norbert. Albrecht Dürer. Taschen, 2010.]|| [목차] [clearfix] == 개요 == 르네상스 시기 독일을 대표하는 화가로 "독일 미술의 아버지", "북유럽의 레오나르도"로 존경을 받는 인물로 특히 그의 자화상과 판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독일 미술의 아버지라 불리는 만큼 독일의 [[낭만주의]] 미술은 뒤러의 화풍을 모방하며 등장하였다. == 생애 == [[헝가리]]에서 이주한 금세공사인 알브레히트 뒤러와 금세공사의 딸인 바바라 뒤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향 [[뉘른베르크]]는 당시 북유럽과 남유럽을 잇는 중요한 교역도시였다. 아버지 밑에서 금세공기술과 그림을 배우고 관습에 따라 미하엘 볼케무트에서 수년간 견습생으로 있었다. 1490년에서 1494년 사이 라인강 지역을 여행했는데, 거기서 이탈리아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과 그 모사본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결혼 후 다시 배움에 대한 욕구에 가득차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났다.[* 뒤러는 당시 르네상스 이탈리아 미술을 접한 최초의 독일 예술가 중 한명이다.] 이후 명성을 쌓아 이탈리아처럼 '귀족과 동등한 예술가'라는 개념을 최초로 독일에 퍼뜨렸고,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신성 로마 제국)]]의 후원을 받게 되었다. 네덜란드를 여행할 무렵 [[카를 5세]]가 모은 신대륙의 보물들을 보고 기적보다 아름답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신대륙에서 건너온 질병에 걸리게 되었고 평생동안 그 병으로 고통받다가 1528년 사망했다. == 작품 == [[파일:Albrecht_Dürer_Betende_Hände.jpg]] 그의 대표적인 작품인 기도하는 손이다. 이 작품은 후대에 덧붙여진 이야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 가난 속에서 그림을 그리는 뒤러와 그의 친구 한스 나이스타인은 왕립 미술학교 입학금을 사기꾼에서 사기 당해서 입학금을 내기 위해 일과 그림을 병행하여야 했다, 그러자 한 사람이 먼저 그림을 공부하고 그 후 남은 사람이 그 후를 미술 공부하기로 했다. 그래서 뒤러가 먼저 그림을 배우고 한스는 고향으로 돌아가 묵묵히 뒤러에게 지원금을 보내주게 되었다. 그러나 채석장에서의 고된 노동으로 그의 손은 만신창이가 되었고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다. 한편 미술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널리 명성이 알려진 뒤러는 고향으로 돌아와 한스를 찾아간다. 거기서 자신이 온 지 모른 체 기도하는 한스를 보았다. 한스는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의 손은 노동으로 인해 더 이상 그림을 그릴 수 없게 되었지만, 내 친구 뒤러가 유명한 화가가 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를 했다. 그를 본 뒤러는 눈물을 흘리고 감명을 받아 그의 손을 그린 작품이 이 기도하는 손이다. 물론 이는 완전히 거짓이다. 실제로는 프랑크푸르트의 부유한 상인의 의뢰한, 교회를 장식할 그림[* 불행히도 해당 그림은 화재로 소실되었고, 현재는 모사본만 남아있다.]을 그리기 위한 습작이며, 손의 모델 역시 뒤러의 친구가 아닌 형제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파일:Albrecht_Dürer_-_1500_self-portrait_(High_resolution_and_detail).jpg]] 뒤러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위의 프로필에도 올라온 [[자화상]]이 있다. 1500년에 그린 이 작품은 [[유럽]] 역사상 최초의 독립적인 자화상으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등이 [[최후의 심판]] 등의 작품에다 본인의 얼굴을 [[이스터 에그]]격으로 그려넣은 경우는 이전에도 꽤 있었다.], 인물의 정면상을 [[예수]]를 그린 [[성화]]에만 그리는 당대의 관행을 깨고 자신의 모습을 정면상으로 그렸을 뿐만 아니라, 그 모습도 어둠 속에서 홀로 빛을 받아서 밝게 보이는 식으로 묘사해서, 자의식을 강하게 드러낸 것이 특징이다. 게다가 자신을 대놓고 예수의 성화와 유사하게 그렸다. == 여담 == 그의 사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를 뒤러의 고향에서 개최하게 되는 데 후베르트 란칭어는 뒤러의 작품 기사, 죽음, 악마를 모티브로 해서 히틀러를 두려움을 모르는 전사로 만들었고 그는 그 이전부터 내려오던 독일 정신의 정신적 지주라는 평을 더욱더 확산 시키게 되었다. 나치 이미지가 많이 박힌 [[뉘른베르크]]는 히틀러 대신 뒤러라는 캠페인을 벌여서 나치의 도시가 아닌 뒤러의 도시로 기억되기를 원하고 있다. 뉘른베르크 소재 기업인 [[파버카스텔]]의 고급 수성 색연필이 알브레히트 뒤러의 이름을 따서 팔리고 있다. == 매체에서 == === 게임 === ==== [[도미네이션즈]] ==== 알브레이트 뒤러의 시계가 유물 중 하나로 등장한다. [[분류:독일의 화가]][[분류:1471년 출생]][[분류:1528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