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wiki style="margin: -4px -9px" [[파일:브루너.png|width=100%]]}}}|||| ||<#666> {{{#FFF 이름}}} ||<(>'''Alois Brunner'''[br] 알로이스 브루너|| ||<#666> {{{#FFF 출생}}} ||<(>[[1912년]] [[4월 8일]][br][[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 ||<#666> {{{#FFF 사망}}} ||<(>[[2001년]]?/[[2010년]]? (향년 89세?/향년 98세?)[br][[시리아]] [[다마스쿠스]] || ||<#666> {{{#FFF 복무}}} ||<(>[[슈츠슈타펠]] (1938년 ~ 1945년) || ||<#666> {{{#FFF 최종계급}}} ||<(>[[슈츠슈타펠]] [[대위]] (최상급돌격지도자) || ||<#666> {{{#FFF 주요 참전}}} ||<(>[[제2차 세계 대전]] || [목차] [clearfix] == 개요 == || [[파일:브루너1.jpg|width=100%]] || || '''알로이스 브루너 (Alois Brunner)'''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출신의 전직 [[SS|슈츠슈타펠]] 소속 [[전범]]이자, 또다른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의 심복이었다. 또한 전후 철저한 추적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붙잡히지 않고 몰년 또한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 초기 행적 == || [[파일:브루너2.jpg|width=100%]] ||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태어난 브루너는 19세에 [[오스트리아 나치당]]에 가입해 돌격대 대원이 되었다가 [[1938년]]에 [[오스트리아 합병|오스트리아가 독일과 합병]]하자 빈의 친위대에 들어갔다. == [[제2차 세계 대전]] == [[1939년]]에는 [[빈(오스트리아)|빈]]에 있던 [[아돌프 아이히만]]의 <유대인 이송국>으로 배치되어 아이히만의 부관으로 [[오스트리아]]의 유대인을 [[폴란드]]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는 일을 맡았다. [[1943년]] [[2월]]까지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4만 7천명을 수용소로 보낸 브루너는 그 공적으로 승진을 거듭 해 [[1940년]] [[4월 20일]]의 총통탄생일 당시 친위대 소위, [[1941년]] [[11월 9일]]엔 중위, [[1942년]] [[1월 30일]]엔 대위로 승진했다. [[1943년]] [[2월]]부터 [[그리스]]의 테살로니카로 파견되어 그곳의 유대인 명사 25명을 인질로 잡은 후 명령에 따르지 않으면 이들을 총살하겠다고 하며 유대인 사회를 협박했다. 이리하여 테살로니카와 마케도니아의 유대인 5만 8천 명 중 4만 4천명이 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브루너는 [[1943년]] [[6월]]에 [[프랑스]]로 부임해서 그곳의 유대인 2만 7천 명을 수용소로 보냈다. 또 [[슬로바키아]]로 파견되어 1만 4천명의 유대인을 이송했으며 다시 [[헝가리]]로 부임해 1만 2천 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보냈다. '''브루너가 전쟁터에 나간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전시 많은 독일병사들이 전선에서 전사할 때 브루너는 일관되게 안전한 곳에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 전후 행적 == 독일이 패전한 뒤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브루너는 친위대의 군복을 벗고 한 명의 독일시민으로 숨어지냈다. 전후 브루너는 알로이스 슈마르딘스트라는 가명으로 독일의 난민으로 분류되어 [[서독]]으로 입국했다. 서독에 머무르던 중 그는 독일의 구 정보부원으로 對소련에 방첩임무를 하는 겔렌 기관에 합류해 공작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54년]]에 브루너는 독일을 빠져나가 프랑스 정부는 궐석재판으로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다. 게오르크 귀셔라는 가명의 여권으로 [[이집트]]의 [[카이로]]로 이사한 그는 다시 [[시리아]]로 이주했다. 이 사실을 안 서독정부 및 프랑스 정부, 오스트리아 정부, 그리스 정부는 시리아에 대해 알로이스 브루너의 신병을 인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시리아는 '''<브루너란 사람은 살고 있지 않다>'''며 이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당시 시리아는 브루너를 유대인 문제의 정보부 고문으로 앉혔기 때문이었다. 정보기관에서 오랫동안의 경험을 쌓은 브루너는 아직 미숙한 시리아의 첩보기관원들에겐 대선배로 추앙받아서 시리아 정보기관은 독재정치의 유지를 위해 그를 충분히 이용가치가 있다고 보았다. == 암살 위협 == 그러나 브루너는 결코 안전하지 못해 [[1961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폭발물이 든 편지를 받았다. 브루너는 첫 번째 편지를 개봉하다가 한쪽 눈, 두 번째 편지를 개봉하다가 손가락을 잃었다. 이것은 민간인의 소행이라 보기 어려워 이스라엘 첩보기관인 [[모사드]]가 한 짓으로 의심받았다. == 최후 == [[1995년]]에 독일정부는 브루너에게 33만 3천달러라는 거액의 현상금을 내 걸었다. 하지만 브루너는 아직 체포되지 않았는데 이에 열받은 [[프랑스]]는 [[1999년]]과 [[2001년 ]]두 번에 걸쳐 궐석재판으로 브루너에게 [[종신형]] 판결을 내렸다. [[시리아]]는 아직도 브루너가 국내에 있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데 현재 그의 생사도 불명인 상태이다. 다만 현재 나이를 고려하면 살아있을 가능성은 없다. || [[파일:브루너3.jpg|width=100%]] || || 말년의 브루너 || [[1985년]]에 [[서독]]의 잡지사 기자가 브루너와의 취재에 성공했었는데 그 때 브루너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유대인들은 모두 죽여야만 한다. 후회 같은 건 없다. 기회가 된다면 나는 다시 유대인들을 모두, 전부 죽여버릴 것이다!!'''' [[분류:1912년 출생]][[분류:몰년 미상]][[분류:오스트리아의 군인]][[분류:제2차 세계 대전/군인]][[분류:나치당원]][[분류:친위대(나치 독일)/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