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성명''' ||<(> 알레움 드 부르농빌[br]Aleaume de Bournonville || ||<-2> '''생몰년도''' ||<(> [[1360년]]경 ~ [[1415년]] [[10월 25일]] || ||<-2> '''출생지''' ||<(>[[프랑스 왕국]] [[파드칼레]] 주 불로네 || ||<-2> '''사망지''' ||<(> [[프랑스 왕국]] 아쟁쿠르 || ||<-2> '''아버지''' ||<(> 로베르 드 부르농빌 || ||<-2> '''어머니''' ||<(> 잔 드 크라마이유 || ||<-2> '''형제''' ||<(> [[앙게랑 드 부르농빌]] || ||<-2> '''아내''' ||<(> 마리 드 하베르스커크 || ||<-2> '''직위''' ||<(> 부르농빌, 콩트빌레불로뉴, 리엔의 영주, 부르고뉴군 지휘관 || [목차] [clearfix] == 개요 == [[부르고뉴 공국]]의 군인. [[백년전쟁]] 시기 부르고뉴파의 일원으로서 아르마냑파에 대적했으나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 생애 == 1360년경 프랑스 왕국 [[파드칼레]] 주 불로네 출신인 부르농빌 가문의 일원으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로베르 드 부르농빌이며, 어머니는 크레마이유의 영주 장의 딸 잔이다. 동생으로 [[앙게랑 드 부르농빌]]이 있었고, 사촌으로 [[리옹넬 드 부르농빌]]이 있었다. 이 세 사람은 할머니 마호트 드 파인즈를 통해 프랑스 무관장 [[로베르 드 파인즈]]의 조카였다. 1369년경 아버지가 사망한 뒤 부르농빌, 콩트빌레불로뉴, 리엔의 영주가 되었고, 1403년에 리엔의 영주권을 동생 앙게랑에게 넘겼다. 1377 ~ 1379년 어머니 잔 드 크라마이유의 유산 일부, 특히 누비옹르콩트의 영주권을 회복하고자 소송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1382년 할머니인 클레망스 드 숄느의 상속에 관한 또다른 소송전을 벌였는데, 그 결과는 알려지지 않았다. 1380년부터 종자 신분으로 삼촌인 기사 장 드 부르농빌과 함께 수아송 백작 앙게랑 7세 드 쿠시의 플란데런 원정에 참여했으며, 1383년 또는 1384년에 기사 작위를 받았다. 이후 생폴 백작 발레랑 3세 드 뤽상부르리니의 가신이 되어 발레랑 3세의 여러 원정에 참여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 휘하에 들어갔고, 1410년 파리에서 [[용맹공 장]]의 군대를 강화한 생폴 백작 파견대의 일부인 9명의 종자와 8명의 궁수로 구성된 중대의 수장이 되었다. 1410년 퐁티외 출신 [[삼부회]] 의원 로베르 폴라트를 폭행해, 로베르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게 만든 일로 고발당했다. 의회는 1414년에 그에게 공개적으로 자기비판하고, 예배당을 설립하고, 로베르 폴라트의 미망인에게 보상금을 지불하고, 추방과 재산 몰수를 명령했다. 그러나 의회의 이 판결은 무시된 것으로 보인다. 사촌 [[리옹넬 드 부르농빌]]을 포함한 부르농빌 가문 구성원들과 함께 부르고뉴파에 서서 아르마냑파와 대적하다가 1415년 잉글랜드의 침략에 맞서 두 정파가 동맹을 맺기로 한 뒤 프랑스군의 일원이 되었다. 그러나 1415년 10월 25일 [[아쟁쿠르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는 생전에 와떵의 영주 장 드 하베르스커크의 딸인 마리와 결혼했지만 자녀를 낳지 못했다. 사후 그의 영지는 형제 앙게랑의 아들인 앙투안 드 부르농빌에게 상속되었다. [[분류:프랑스의 귀족]][[분류:프랑스의 군인]][[분류:1360년 출생]][[분류:1415년 사망]][[분류:백년전쟁/인물]][[분류:백년전쟁/사망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