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 {{{#ffffff '''담영린'''}}}}}} {{{#fff '''譚詠麟|Alan Tam ''' }}}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417c45fafb014330a291bdf74d33ba03.jpg|width=100%]]}}} || || {{{#ffffff '''본명'''}}} ||'''담영린 (譚詠麟[* [[병음]]: Tán Yǒnglín (탄융린), [[광동어]]: Taam4 Wing6leon4 (탐윙런)], Alan Tam Wing-lun)''' || ||<|2> {{{#ffffff '''출생'''}}} ||[[1950년]] [[8월 23일]] ([age(1950-08-23)]세) || ||[[영국령 홍콩]] [[홍콩섬]] 노스포인트 || || {{{#ffffff '''국적''' }}} ||[include(틀:국기, 행정구=홍콩)]|| || {{{#ffffff '''신체'''}}} ||174cm || || {{{#ffffff '''언어'''}}} ||광동어, 만다린, 영어 || || {{{#ffffff '''학력'''}}} ||[[싱가포르]] Ngee Ann 폴리테크닉 경제학 학사 || || {{{#ffffff '''종교'''}}} ||[[불교]] || || {{{#ffffff '''직업'''}}} ||[[가수]], [[배우]], [[작사가]], [[작곡가]], [[사업가]] || || {{{#ffffff '''배우자'''}}} ||양결미(楊潔薇) {{{-3 (1981년 결혼)}}} || || {{{#ffffff '''애인'''}}} ||주영정(朱詠婷) {{{-3 (1995년 교제)}}}[* 애인이라고는 하지만 양결미와 별거한 지 한참 되었고 아내 쪽에서 이혼을 극렬 거부하여 혼인 관계만 유지하는 것으로, 사실상 이 쪽이 사실혼 배우자라고 봐야 한다.]|| || {{{#ffffff '''자녀'''}}} ||담소풍(譚曉風, Howard)[* 애인 주영정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3 (1996년 생)}}} || || {{{#ffffff '''활동기간'''}}} ||[[1969년]]~ || [목차] [clearfix] == 개요 == [[홍콩]]의 가수, 영화배우이다.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나, 1980년대 홍콩에선 [[장국영]], [[매염방]]과 함께 '무적 3인방'이라 불렸고, 앨범 판매량, 시상식, 콘서트 티켓 판매에서 최고 기록을 잇달아 갱신하며 홍콩 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서 홍콩 음악계를 대표했던 수퍼스타. 광동어로 된 대중음악을 뜻하는 칸토팝(Cantopop)의 제왕이라고도 불린다. 부드러운 음색과 안정적인 가창력의 바탕 위에, 잘생긴 외모와 재치있는 입담, 쾌활한 성격과 긍정적인 에너지 등으로 80년대 홍콩 음악계 최고의 아이돌로 자리매김했다. 방송이나 콘서트, 팬미팅에서 만나는 팬들과도 가식없고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특히 알란 탐의 팬들을 일컫는 '런미(伦迷)' 중에는 충성--극성--스러운 팬이 많기로 유명하다. 연예인들을 본명보다 별명으로 부르는 홍콩 연예계의 관습을 따라 알란탐은 '교장(校長)' (광동어 발음으로는 '하오쨩') 또는 성을 붙여 '담교장(譚校長)'(광동어 발음은 '탐하오쨩')이라고 불린다. 1985년 알란 탐은 여름 방학 기간 중에 홍함체육관(홍콩 콜리세움)에서 20회 연속 콘서트를 개최했는데, 방학기간중에 매일 열리는 콘서트가 음악 보충수업 같다는 생각이 들어, 본인은 여름 음악학교의 담교장이며 노래를 통해 학생들에게 인생의 이치를 가르친다고 콘서트장에서 한 농담에서 유래했다. [* 이 별명은 나중에 연예계 전체로 확대되었는데 1993년 홍콩 사대천왕 전성기때 음악상 시상식에서 유덕화가 금곡금장을 받자 다른 사대천왕 팬들이 소란을 피웠고, 진행자가 상황을 통제하지 못하자 알란 탐이 대신 나서서 팬들에게 연설을 하는 일이 있었다.] 1994년 홍콩 스타디움 콘서트 영상을 보면 4만명의 관객이 알란 탐의 지휘 하에 마치 교가를 부르는 학생처럼 그의 히트곡 메들리를 한목소리로 크게 떼창하는 감동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별명의 여파로, 알란 탐이 졸업한 불교지련중학교는 알란 탐을 명예교장으로 임명했다. == 생애 == 1950년 중국의 유명 축구선수인 담강백[[https://zh.wikipedia.org/wiki/%E8%AD%9A%E6%B1%9F%E6%9F%8F|#]]의 1남 5녀 중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담강백은 1930년대 유명했던 중국 축구 선수로, 아시아 축구왕 (亞洲球王)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1936 베를린 올림픽]]에 [[대만 축구 국가대표팀|중화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로 참가하기도 했는데, 이 때 [[아돌프 히틀러|히틀러]]에게 [[회중시계]]를 수여받았다고 한다. 담강백은 1946년에 홍콩의 축구팀인 성도(星島)팀에서 뛰었고,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여기에 눌러앉았다. 이때 성도팀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증지위]]의 아버지 증계영[* 증계영은 축구를 은퇴한 후, 경찰로 전업하여 고위직까지 가지만, 뇌물을 받다가 적발되어 대만으로 도피해서 그곳에서 사망한다.]과도 친분이 있었다고 한다. 알란 탐과 증지위는 축구연습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8~9세 무렵 축구장에서 만나 함께 놀았으며, 알란 탐이 대만에서 활동하던 1980년대 초에 다시 만나 증지위의 소개로 홍콩 신예성(新艺城) 영화사와 계약, 이후 많은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알란 탐의 외조모는 네덜란드인이며, 어머니는 고향인 소주(쑤저우)에서 '쑤저우 4대미인'으로 불릴만큼 미모가 뛰어났었다. 이렇게 홍콩에서 태어난 담영린은 소기만 공립중학교(筲箕灣官立中學)와 불교지련중학교(佛教志蓮中學)를 졸업하고 [[1969년]] 진우, 팽건신, 엽지강, 진백상, 진백상의 동생인 진백신과 함께 밴드 루저스(Loosers)를 조직하여 보컬을 맡는다. 1970년 대학 진학을 위해 싱가폴로 유학을 떠났으나 건강 문제로 3학년을 마치고 귀국하였다. 건강이 회복된 후에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홍콩에서 우체부 생활을 잠깐 하다가 그만 두고 음악 활동을 병행하기 위해 사무용품 회사의 세일즈맨으로 취직하여, 낮에는 중완, 침사추이 등 사무실 밀집지역을 담당하는 세일즈맨으로 활동[* 회사 생활이 체질에 잘 맞았다고 한다. 세일즈 맨으로 일하며 원래 내향적이었던 성격도 외향적으로 바뀌고, 탑 세일즈 상도 받았다.]하고 퇴근 후에는 밤 8시부터 완차이, 침사추이 지역 여러 바에서 노래를 부르느라 하루에 두시간 밖에 못잤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3년]] 루저스 친구들 및 새 멤버 [[종진도]]와 의기투합하여 [[위너스(the Wynners, 溫拿)]]로 정식 데뷔를 하였으며, 1974년에 첫 앨범을 발매하고 곧 [[RTV]]와 [[TVB]]에 출연하며 유명세를 타게 되고, 멤버들끼리 영화도 몇 편 찍는다. 홍콩에서 위너스의 위상은 거의 [[비틀즈]]나 [[롤링스톤즈]] 위상의 전설적인 국민 밴드다. 올드 팬들에게는 본명보다 '아비(阿B)'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진 [[종진도]]는 배우, 가수로 꾸준히 활동하고 있고, 진우는 영화 감독, 배우로 활동하고 있으며, 진백상은 배우와 방송인으로 활동중이다. 1981년 2살 연하 일반인인 양결미와 미국에서 비밀결혼했는데, 1993년까지 결혼 사실이 공개되지 않았다.[* 양결미의 아버지가 1993년에 돌아가셨는데, 부고에 알란탐이 사위로 기재되어 있어서 결혼 사실이 알려졌다.] 자식은 없다고 한다.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부인과 소원해지고 별거중이며, 이 와중에 애인 주영정과 교제하게 되었다. 양결미는 현재 불가에 귀의한 상태이나, 법적으로는 이혼을 거부하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현재는 애인 주영정과 사실혼 관계이다. 1990년대 애인 주영정(朱潁婷) 과의 사이에서 혼외관계로 아들(담소풍, 1996년생)을 낳았음이 알려지기도 했다. 양결미와의 혼인은 사실상 파탄난지 오래였지만 부친 담강백이 완고하게 반대해 부친이 세상을 뜨기 전까지 침묵을 지키다, 2006년 담강백이 별세한 후 알란 탐은 방송에 나와 단 한번 이를 시인하였고, 그 이후에는 가급적 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하고 있다. 방한할 때도 부인이 아니라 애인과 동행했다. == 경력 == === 음악 === 1973년 데뷔후부터 현재까지 50여년간 그룹 및 솔로가수 활동을 통해 꾸준히 차트 1위곡을 내고 국내외에서 수많은 상을 받았다. 홍콩내 모든 음악상을 독점하며 인기의 절정을 달리던 80년대 말에 신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돌연 수상 거부를 선언하였다. 지금까지 발매한 앨범은 130장이며 발매곡은 1000곡이 넘고, 이중 작사나 작곡에 참여한 곡은 100곡이다. 발매한 거의 모든 앨범에서 차트 1위곡이 나왔으며 4대방송국 1위를 싹쓸이한 이른바 4대관군가도 지금까지 26곡으로 전체 가수중에서 1위, 홍콩 가수들에게 꿈의 공연장으로 불리는 12500석의 홍함체육관에서 192회의 개인 콘서트를 개최, 역대 가장 많은 콘서트를 개최한 가수라는 기록을 갖고 있는 등 그야말로 홍콩 음악계를 대표하는 레전드 대가수. 락에 기반한 발성 스타일로, 비음이 가미된 달달한 중저음과 맑고 시원한 고음을 자랑한다. 많은 횟수의 공연을 소화하면서도 안정적인 라이브를 구사했으며, 에너지 넘치는 무대 매너로 무대를 장악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90년대 이후에는 목소리가 점차 허스키한 톤으로 변했는데 창법 또한 라이브 현장에서 더 잘 전달될 수 있는 호소력 짙고 두꺼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파워풀한 창법으로 변신했다.[* 친하게 지내던 조용필의 영향으로 창법을 바꾸었다는 설도 있다] --짙어진 뽕끼는 덤-- 목소리의 키(key) 자체가 높은 편으로 여자 가수의 노래도 원 key로 소화한다. 음악 스타일은 대중성이 돋보이는 발라드와 댄스곡이 메인이다. 80년대에는 일본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거나 번안하여 일본풍의 세련된 발라드 음악을 많이 불렀으며 '알란표 발라드(倫式情歌)'라는 명칭이 있을 정도로 달콤한 러브송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 당시 경제 성장과 동반하여 급성장중이던 홍콩 대중음악계는 음악을 공급할 창작자가 모자라 수요를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폴리그램 같은 거대 음반사들은 일본과 한국의 번안곡 및 홍콩 창작곡들을 수집하여 프로듀서들로 하여금 앨범 발매 시기, 스타일 등을 고려해서 소속 가수들에게 배정하게 하였다. 그 당시 홍콩의 스타 가수들은 해외 번안곡을 부르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좋은 곡이 누구에게 가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1983년 허관걸의 계약 종료 후부터 폴리그램의 1순위 가수는 알란 탐이었고, 당시에 나온 가장 좋은 번안곡들은 일단 알란 탐에게 다 보내졌다. 나중에 1995년 폴리그램 25주년 콘서트에서 한 무대에 오른 알란 탐과 장학우, 여명은 한풀이를 하자며 서로 가장 탐났던 곡을 한곡씩 바꿔부르기도 했다. --가수들도 워낙 레전드지만 곡들이 다 명곡이라 누가 불러도 좋은 것이 함정--] 90년대 이후에는 본인이 원래 좋아했던 락 또는 컨트리 락 스타일의 곡을 많이 발표했다. 이전 세대 가수들과 달리 알란 탐은 느린 노래뿐만 아니라 빠른 노래들의 리듬감도 잘 소화하는 폭넓은 음악성을 갖추고 있었고, 같은 스타일에 머물지 않고 다양한 시도를 하였기에, 꽤 오랜 시간 활동했지만 발매하는 앨범마다 베스트 셀러로 만들 수 있었다. 80년대부터 팍스 뮤지카 등 아시아 다른 국가 가수들과의 협연에 적극적이었으며, 호주, 캐나다 등 해외 투어도 많이 다녔다. 90년대 이후에는 중국 본토 가수는 물론 다양한 장르의 선후배 가수들 및 밴드들과 협업한 앨범도 자주 발매하고, 클래식 오케스트라 등 장르를 넘나드는 협연 공연도 하며 음악계 레전드다운 행보를 보이고 있다. ==== 1960년대~1972년 ==== '''데뷔전 ~ 루저스(Loosers) 시절''' 중학교 때부터 음악을 좋아했고 음악 대회에서 상을 받았다. 주로 팝송을 좋아했는데, 처음 접한 것은 9살때 아버지가 즐겨부르던 냇킹콜(Nat King Cole)의 노래였다고 한다. 1969년 진우, 팽건신, 엽지강, 진백신, 진백상 형제와 루저스(Loosers)라는 밴드를 조직하였고, 1970년에는 아마추어 음악대회에서 우승하여 유니버설의 전신인 다이아몬드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가족의 권유로 알란탐은 밴드 활동을 그만두고 싱가폴로 유학을 갔고 진백상 형제도 밴드를 떠나 사업을 시작했다.[* 방송인 겸 배우로 활동중인 진백상과 알란탐은 8살때부터 70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 절친이다. 당시 진백상은 비옷을 파는 사업을 하기 위해 아프리카로 건너갔는데, 사업이 어려워져서 홍콩으로 돌아올 여비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를 알게 된 알란 탐이 본인이 거주할 집을 얻기 위해 마련한 3만불을 선뜻 빌려줘서 겨우 마무리를 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 ==== 1973~1978년 ==== '''위너스 (온나악대) 시기''' 1973년 양백도가 Loosers를 재조직한 후 이름을 '실패자(Loosers)'에서 '승리자', 즉 [[위너스(the Wynners, 溫拿)]], 광동어 발음으로는 '원나'로 변경했으며, 싱가폴로 유학간 알란탐이 건강 문제로 3학년을 마치고 홍콩으로 돌아온 후 밴드에 합류하여 공식적으로 5인조 밴드로 활동을 시작했다. 알란탐은 [[종진도]]와 함께 그룹의 리드보컬을 담당했다.[* 종진도의 별명 '아비(아B)'는 위너스 시절 생긴 것이다. 한 방송에서 종진도가 직접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알란탐이 보컬A, 종진도는 보컬B를 담당했기에 '아B'라고 불렸다고 한다. 알란탐은 '아A'는 아니고 '아런(앨런)'으로 불렸다.] 1974년 위너스는 폴리그램 전신인 폴리도르 레코드(Polydor Records)와 계약을 맺고 싱글 를 발매했고, 이어서 덴마크 록 밴드 Walkers의 동명 음악을 각색한 두 번째 싱글 를 발매하여 RTHK 인기곡 1위에 올랐고, 3주 만에 첫 앨범 를 발매해 홍콩과 동남아시아에서 좋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위너스의 아방가르드 스타일[* 그들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팝송을 주로 하는 오리지널 루저스의 스타일을 이어갔고, 긴 머리, 선글라스, 플랫폼 슈즈 등 의상에서도 유럽과 미국 밴드의 스타일을 모방하기도 했다. 그들의 나팔바지와 어깨까지 오는 헤어스타일도 홍콩 젊은이들의 모방 대상이 됐다. ]은 당시 홍콩 젊은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TVB에서는 그들을 위한 주간 TV 프로그램을 2편 편성하였으며, 그들의 명성은 대만과 동남아까지 퍼졌다. 위너스는 1974년부터 78년까지 10장의 앨범을 발매하였다. 알란탐은 1975년부터 솔로로서 활동도 병행하여 1976년에는 '해외 중국 일일 10대 가수상'을 개별적으로 수상하기도 했다. 1978년, 알란 탐은 TVB와 계약을 맺고 드라마 <천홍>에 출연했으며, 정유령과 프로그램을 공동 진행했다. 1978년, 그룹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종진도가 대만 영화사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곧이어 알란탐도 대만 활동을 시작하게 되어 위너스는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하지만 완전한 해산은 하지 않고 각자 개인적으로 발전하여 5년마다 만나 함께 음반을 발매하기로 약속하였고 실제로 1983부터 5년 단위로 위너스의 새앨범을 발매하고 콘서트 투어도 하고 있다. 특히 1988년에 발매한 15주년 기념 앨범은 큰 성공을 거두어 그해의 10대금곡, 10대경가 및 모든 음악인의 영예인 금침장을 수상했다. ==== 1979~1983년 ==== '''솔로 활동 초기''' 위너스 활동을 그만 둔 후 1979년 폴리그램(Polygram)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2월 20일에 첫 솔로 앨범 <반두성(反斗星)>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주로 영미 팝송 번안곡을 수록하였고, 판매량은 예상을 웃돌아 골드 음반이 되었다. 자신감을 얻어 1980년에는 이전작의 스타일을 유지한 두번째 앨범 <애도니발광(愛到你發狂)>을 발표하였으며, 최초로 플래티넘 기록을 달성했다. 알란 탐의 초기 작품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981년에 발매된 그의 세 번째 광동어 앨범 <망불료니(忘不了您)>이다. 일본가요를 각색한 동명 싱글도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였고, 이 앨범은 1981-1982년 제6회 홍콩 골드 디스크 시상식(금창편분장전례 金唱片頒獎典禮)에서 베스트 앨범상을 수상하였다. 이 앨범은 알란 탐에게 홍콩 음악계의 일류 가수로서 확고한 위상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1999년 폴리그램(PolyGram)이 선정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중국 앨범'에서 톱 20에 선정되기도 했다.[* 참고로, 톱 20에는 알란 탐의 앨범이 4개가 선정되어 가장 많은 앨범이 선정된 가수가 되었는데, 나머지 3개의 앨범은 <애정함정(愛情陷阱)>, <애적근원(愛的根源)>, <무지련(霧之戀)>이다. 4개 앨범 모두 폴리그램의 전설적인 프로듀서 관유린(關維麟 William Kwan)이 제작한 앨범이다. 관유린은 알란 탐 외에 등려군, 서소풍, 장학우의 앨범도 제작한 최고의 제작자였으며, 훗날 폴리그램 아시아 퍼시픽 회장까지 역임했다. 그의 아들 관초요(Kelvin Kwan)가 가수로 데뷔했을 때는 알란탐이 멘토로서 많은 도움을 주었으며, 관유린은 2014년 알란탐 데뷔40주년 만찬회에 참석하여 이때의 추억을 함께 이야기하기도 했다. ] 이어서 1982년에 발매한 2개의 앨범 <애인·여신(愛人·女神)>과 <정장담영린(精裝譚詠麟)>도 모두 플래티넘 음반이 되어 제7회 골드 디스크 디상식에서 수상을 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광동어 가요가 거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저평가를 받아 그 후에도 조연급 배우 정도로 오해되곤 했다.[* 이는 홍콩의 대가수인 [[허관걸]], [[장학우]]도 마찬가지 사정. 그래도 1980년대에 성음레코드란 업체를 통해 한국에 유일무이하게 정식음반이 나온 [[광동어]] 남자 가수였다.(여가수는 역시 성음에서 낸 [[진추하]] 음반이 있었다.)] ==== 1984~90년 ==== 알란 탐의 솔로 가수로서의 '''인기 절정 시기'''이다. 1984년부터 매년 두장씩 앨범을 발표했는데 84년에 발매한 <무지련(霧之戀)>은 제8회 홍콩 골드 디스크 시상식(香港金唱片頒獎典禮)에서 IFPI 올해의 베스트 앨범상을 수상했고, <애적근원(愛的根源)>은 40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하여 홍콩 팝음악의 벤치마크가 됐다. 두 앨범의 수록곡 대부분이 30년 넘게 인기를 유지하고 있다. 같은 해 홍함체육관에서 처음으로 6회 단독 콘서트를 열었는데 광고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티켓은 판매와 동시에 매진되었다.그 후 그는 싱가포르와 캐나다에서도 많은 콘서트 투어를 개최했다.그해 연례 음악상 시상식에서도 총 13개의 상을 수상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는데, 중문금곡시상식에서는 2곡의 십대금곡상, 최우수 음반 프로듀서상 및 IFPI대상을 받았으며, 십대경가금곡시상식에서는 40곡의 분기별 금곡 중 10곡이 알란 탐의 곡이었고, 연간 십대경가곡 중 3곡이 알란탐의 곡이었다. 그 뿐만 아니라, 최우수 작곡상, 최우수 작사가상, 최우수 편곡가상, 최우수 음반 프로듀서상, 골든 멜로디상,최고 인기 남자 가수상을 수상했다. 1997년에 <애적근원(愛的根源)>은 "20세기 십대최애금곡"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당시 한국, 일본, 홍콩의 대표 가수들이자 아시아 슈퍼스타인 일본의 [[타니무라 신지]], 한국의 [[조용필]]과 함께 아시아 3국간의 문화 교류를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PAX MUSICA'를 공동 창립했으며, 1984년 7월 11일, 세 사람은 도쿄 고라쿠엔 스타디움에서 첫 번째 "PAX MUSICA '84"를 개최했다. [* 팍스 뮤지카는 1994년 [[일본]] [[오사카]] 공연을 마지막으로 명맥이 끊겼으나, 2004년 11월 5일 [[중국]] [[상하이]]에서 팍스 뮤지카 슈퍼 2004 공연으로 부활하였다.] 1985년 설날에 발매된 알란 탐의 새 앨범 <애정함정(愛情陷阱)>은 40만장이 판매되어 그해의 최다판매앨범이 되었고, 상업전대금곡장(商業電台金曲獎)을 수상했으며, 특히 십대경가금곡시상식에서 최고 인기 남자 가수상, 최다판매앨범(最暢銷唱片獎), 그리고 대상격인 금곡금장(金曲金獎)을 수상하여 같은 연도에 3대상을 동시에 석권한 유일한 가수가 되었다. 또한 중문십대금곡과 IFPI대상마저도 석권하며 남자가수 최고 인기를 이어갔다. 알란 탐은 1985년 여름에 홍함체육관에서 <초금곡연창회>를 20회 연속 개최하여 26만명의 관객을 모았고, 홍콩 최다콘서트 및 최다관객동원 기록을 갱신했다. 8월 31일부터 9월 1일은 일본 부도칸에서 공연에 홍콩 대표로 참가했으며, 하반기에 발매된 새 앨범 <폭풍여신 Lorelei>는 35만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 수록곡 <폭풍여신 로렐라이>와 <붕우>는 차트 1위는 물론, 성룡이 감독 및 주연한 영화 <[[용형호제]]>의 주제곡 및 삽입곡으로 사용되었다. 두 곡 다 일본 작곡가 세리자와 히로아키의 곡으로, 세리자와는 당시 일본 최고 인기 밴드였던 체커스의 곡 대부분을 작곡한 당대의 인기 작곡가였다. 알란 탐은 1985년에 처음으로 세리자와의 곡을 불렀는데 그 곡이 바로 <애정함정(愛情陷阱)>으로 처음으로 시도한 빠른 곡인데 그 해 최고 인기곡이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 앨범에서도 다시 한번 세리자와와 협업하여 를 포함하여 3곡을 앨범에 수록하였다. [* <폭풍여신 로렐라이>나 는 전주만 들어도 J-POP을 바로 느낄 수 있다. ] 1986년은 월드 투어와 영화 촬영으로 바빠 새 앨범은 <제일적루(第一滴淚)> 1매만 발매했다. 앨범에는 알란 탐의 장기인 발라드, 댄스 외에도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시티팝(City Pop) 넘버들도 많이 수록되었으며, 팬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노래한 <무언감격(無言感激)>이 연례 시상식에서 중문금곡, 십대경가에 선정되었고, 알란 탐은 최고인기 남자가수상을 수상하며 계속해서 최다득표를 이어갔다. 또한 86년 여름방학 기간 동안 홍함체육관에서 20회 연속 콘서트 <만중광환연창회>를 개최, 2년 연속 최다 콘서트 기록을 세웠다. 2년 연속 최다 콘서트를 연 가수는 알란 탐이 처음이다. 이 콘서트의 실황앨범도 플래티넘 음반이 되었는데, 1986년 콘서트는 이전 콘서트에 비해 무대 장치, 조명이 한결 화려해져서 확실히 돈을 많이 쓴 티가 난다. 같은 해 말 앨범 'THUNDER ARM'이 발매됐다. 일본 폴리컴퍼니가 발표한 알란 탐의 첫 영어 개인 앨범이다. 1987년 1월 21일에는 성룡과 공동주연한 영화 <용형호제> 가 홍콩에서 개봉, 87년 홍콩 연간 흥행 1위에 올랐고[[http://www.boxofficecn.com/hkboxoffice1987|기사]], 이보다 앞서 86년 8월에 개봉한 일본에서도 좋은 흥행 성적을 거뒀다. 1987년에는 <장상적초상(牆上的肖像)>과 <재견바!?낭만(再見吧!?浪漫)> 등 2장의 새앨범을 발매하였고, 7월에 홍함체육관에서 17회 연속 단독 콘서트를 열었고, 8월 18일 다시 한번 일본의 [[타니무라 신지]], 한국의 [[조용필]]과 팀을 이루어 한국 88경기장에서 을 개최했다. 연말에는 , <지심당완우(知心當玩偶)>, <무변적사억(無邊的思憶)>이 10대경가에 선정됐고, 최고 인기 남자가수상,연간 총판매왕상과 금곡십년대장을 수상했다. 1988년 2월, 십대중문금곡시상식에서 4년 연속 IFPI대상을 수상한 그는 신인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더 이상 경쟁적인 음악상은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Alan Tam은 그해에도 십대중문금곡과 경가금곡 시상식에서 총 5개의 금곡상을 수상, 가장 많은 금곡상을 수상한 가수였다.[* 알란탐의 수상 거부 선언은 사실은 팬덤간의 치열한 경쟁으로 인한 부담이 큰 원인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알란탐과 장국영은 가요계 선후배이자 좋은 친구 관계였으나, 장국영이 점차 인기몰이를 하면서 양대 팬덤의 경쟁과 다툼은 폭력사태를 유발할만큼 치열해졌다. 음반 판매점들은 알란탐과 장국영의 음반 판매량을 크게 써서 매일 가게 앞에 붙이는 판촉전략으로 팬들을 자극했고, 게다가 선정적인 언론까지 가세해 각종 루머를 양산하며 도를 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문제의 88년 2월 중문금가곡 시상식장에서도 알란탐 팬들이 "알란"을 외치는 함성이 너무 커서 시상자로 등장한 주윤발이 이를 소재로 농담을 했는데, 하필 그 다음에 알란탐이 경쟁적 음악상 수상 거부 선언을 하는 바람에 비난의 화살이 엉뚱하게 주윤발에게도 쏟아졌고, 주윤발이 알란탐에게 사과를 하는 등 곤혹을 치렀다. 어쨌거나 알란 탐의 수상 거부 선언 이후 88, 89년 2년간 장국영이 최고인기 남자가수상을 수상하였고, 89년 장국영의 가수 은퇴 선언 이후 가요계는 4대천왕 천하가 되었다. 바꿔 말하면 4대천왕의 시대를 열어준 장본인 중 한 명.] 홍콩 음악계에서 음악상 수상 거부 선언을 한 가수는 알란 탐이 최초이며, 나중에는 허관걸, 임지상, 여명, 장학우도 수상 거부 선언을 하여 선배가 후배에게 길을 터주는 훈훈한 전통의 창시자가 되었다. 음악상 거부 선언 직전인 1988년 2월 12일에 발매한 <미혹(迷惑)> 앨범은 앨범판매차트 11주 연속 1위를 차지하며 홍콩에서 35만장, 대만에서도 15만장 이상이 판매되는 등, 1987~88년(87년 4월~88년 3월)사이에 가장 많이 팔린 앨범으로 CASH 골드 기록을 획득했다. 하반기에 나온 <옹포(擁抱)> 앨범은 38만장의 판매고를 올려 <미혹>을 제치고 1988년 IFPI 음반 판매 대상을 획득하였다. 앨범 수록곡 <반몽반성 (半夢半醒)>과 <수중화 (水中花)>는 대중적인 명곡이 되었고, <반몽반성>은 홍콩 뿐만 아니라 대만 차트에서도 5주간 1위를 차지했다. <수중화> 역시 단숨에 차트 1위를 차지했고, 본토에서도 큰 인기를 끌며 1991년 CCTV 춘완에 처음으로 초청받아 불렀다. 1988년은 위너스 밴드의 데뷔 15주년 되는 해였기 때문에 단독 콘서트는 열지 않고 대신 홍함체육관에서 열린 <위너스 15주년 콘서트>에만 참가했다. 연말에 RTHK는 <반몽반성>과 <수중화>가 10대중문금곡에 선정되었으나 수상거부선언을 하였으므로 11위, 12위 곡을 대신 시상한다고 발표했다. 1989년 상반기에 발매된 <애념 愛念>은 판매량 30만장을 돌파하였으며 수록곡 <정의양심지(情義兩心知)>와 <애념(愛念)>이 각각 3개 채널에서 1위를 차지, 3대관군가가 됐다. 알란 탐이 88년에 RTHK 방송국의 중문금가곡시상식에서 시상식 참가 거부 선언을 한 이후로 이 방송국은 알란 탐의 노래를 거의 틀지 않을 정도로 사이가 좋지 않았는데, 두 곡다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그해 하반기에 발매된 또 다른 앨범인 <망정도시(忘情都市)>는 빠른 노래를 많이 선보였는데, 판매량은 쉽게 35만장을 돌파했다. 같은 해 7월 말 홍함체육관에서 3부작 콘서트 <색깔/사랑/새롭게 로맨스 콘서트>를 38회 개최하여 같은 해 33회를 개최한 서소봉을 물리치고 또 한번 연간 최다 개인 콘서트의 기록을 갱신했다. 비록 시상식에는 더이상 참가하지 않았지만 알란탐은 여전히 가요계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앨범판매와 콘서트의 성공으로 1989년에는 홍콩 전체 연예인 중 수입 1위에 올랐다. 연말에는 제40회 일본 NHK 홍백가합전에 '애념'으로 참가해 한국가수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와 경쟁하며 현재까지 중국 남자가수로는 유일하게 초청받은 가수가 되었다. 1990년 설에 발매한 《몽환무대(夢幻舞台)》앨범 역시 35만장의 판매고로 그해 IFPI 최다판매앨범상(全年最畅销大碟奖)을 수상했으며, 자작곡인 <가라영원오케(卡拉永远OK)>와 <몽잉시일양(梦仍是一样)>이 역동적인 리듬과 중독성 있는 멜로디로 크게 히트하였다. 같은해 중순 발매한 《세외도원(世外桃源)》 앨범에서는 이탈리아 월드컵 주제가 'To Be No. 1'을 각색한 타이틀곡 <이상여화평(理想與和平)>이 홍콩 TVB의 월드컵 주제가로 사용되어 각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같은 해에 홍콩 연예인축구단과 함께 방한하여 성남시공설운동장에서 한국 연예인축구단과 친선경기를 했고, 유덕화와 함께 방송 출연도 하고 팬미팅도 가졌다. 1981년부터 1990년까지 알란 탐은 총 28개의 차트 챔피언 곡, 23개의 십대금곡(1988년에 수상 포기), 4개의 IFPI 연간 판매 대상 기록, 4년 연속 최고인기 남자가수상을 수상하여 1981년부터 1990년까지 10년간 홍콩 음악계에서 가장 많은 상을 수상한 가수로 등극했다. 또한 폴리그램 레코드에 따르면, 1990년까지 누적 판매량은 1000만장으로 집계되었다. (참고로 당시 홍콩 인구는 약 600만이다.) ==== 1990년대 ====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홍콩 음악계는 왕조교체를 겪으며 공식적으로 '4대천왕([[홍콩 사대천왕]])'의 시대가 열렸다.이 기간 알란 탐은 여전히 정기적으로 새 앨범을 발표했다. 소속 음반 회사인 폴리그램은 과거보다는 알란 탐에 대한 자원 및 홍보에 대한 투자를 점차적으로 줄였으나, 대신 이는 알란 탐이 자유롭게 비상업적이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91년에 발매한 앨범 《신화1991(神话1991)》에 실린 곡 <일생중최애(一生中最愛)>는 스테디 셀러로 지금도 노래방에서 가장 많이 불리는 곡중의 하나이다. 1991년 여름에는 홍함에서 <몽환유정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1992년 발매된 《애정고사(愛情故事)》 앨범은 스토리텔링이라는 개념을 활용하여 노래 사이에 독백을 추가하고 앨범 A Side에 수록된 6개 트랙을 러브 스토리로 연결하는 첫 번째 시도였는데, 당시 사대천왕 전성기였음에도 불구하고 20만장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그 해 처음으로 본토에 진출해, 광저우에서 11월 17일부터 24일까지 8회 연속 <'92애재심추광저우연창회(爱在深秋广州演唱会)>를 열었다. 콘서트 티켓의 가격은 140위안으로 당시 중국 직장인 한달치 급여보다 약간 작은 수준(1992년 중국 평균임금이 1년에 2700위안)으로 책정되었으나 뜨거운 호응에 당초 3회로 예정된 콘서트가 추가 3회에 다시 2회를 더해 8회로 늘어났고 모든 티켓은 빠르게 매진되었다. 당시 주강지역 라디오방송과 음악 방송은 거의 대부분 이 콘서트의 열기에 대해 보도하는데 열을 올렸으며, 마지막회 콘서트는 라디오로 생중계되었다.[* 당시의 라디오 방송 녹음본을 들어보면 곡과 곡 사이에 아나운서가 열심히 뭔가 해설을 한다. 알란 탐은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본인의 콘서트를 어떻게 생중계를 할 수 있는지 매우 흥미로워했다.] 당시 알란 탐이 머물던 호텔 주변은 본토의 많은 팬들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1992년은 이렇게 중국 내지의 여러 곳을 비롯하여 세계 각지에서 <몽환유정 월드투어> 를 개최하고 짬짬이 앨범 홍보를 위한 TV 방송 출연(예. <지유니연창회(只有你演唱会)> 등)을 하느라 홍콩에서는 콘서트를 열지 않았다. 1993년에는 보다 대담한 풀 스토리 컨셉 앨범《정심의담(情心義膽)》을 발매하였는데, 1930년대 미국 카포네 이야기를 컨셉으로 하여, 곡과 곡 사이에 독백을 넣고, 전체적으로 1930~40년대 팝송을 각색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10개의 노래로 구성하여 사랑, 분노, 증오에 대한 이야기로 함께 엮었다. 이 해에는 또한 한국 가수 [[김완선]]과 듀엣곡 '헤어질 수 없는 우리'를 부르고, 홍보를 위해 내한하여 국내 방송에 출연하기도 했으며 김완선의 대만 활동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2016년 [[김완선]]이 출연 중인 예능 [[불타는 청춘]] 홍콩편에 출연하여 그때를 회상했다. 1994년 홍콩대구장에서 열린 에 맞춰 전통적인 상업성을 띈 《몽환적소용(夢幻的笑容)》 앨범을 출시했다. 홍콩대구장(香港大球場)은 원래 정부 소유의 대경기장으로 최대 28,000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나 좌석과 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1993년 정부는 약 85만 달러를 들여 경기장을 재건하고 좌석 수를 4만 석으로 늘렸다. 알란탐은 1994년 4월 22일부터 24일까지 "Alan Tam '94 금곡연창회"를 홍콩대구장에서 개최하여, 리모델링 후 단독 콘서트를 개최한 최초의 가수가 되었다. 3회의 콘서트의 티켓은 총 120,000장이며 한 시간 만에 매진되었다. 그러나 소음 문제로 인해 첫날 공연 중 주변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고, 도시의회(현 여가문화사업부)에서 공연장에서 발생하는 소음 제한 명령을 내려, 할 수 없이 첫 공연의 음량을 강제로 낮췄다. 이 때문에 무대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 관객들은 노래를 또렷하게 들을 수 없었고 다음날 각 언론에서는 이 공연을 '알란 탐의 소프트 보이스 콘서트'라는 조롱섞인 별명으로 불렀다. 알란 탐 팬들이 도시행정청에 크게 항의하자 도시의회는 23일 오전 긴급회의를 열고 남은 2회 공연에 대한 음향 통제 중단을 발표했다.[* DVD로 발매된 콘서트 영상은 2일차인 4월 23일 공연 실황이다.] 알란 탐은 2010년 인터뷰에서 그 콘서트를 가장 힘들었지만 감동적인 사건으로 꼽았다. 제작진이 천만위안이 넘는 오디오 장비를 구매했는데 볼륨 레벨을 결국 5%도 못썼다며, 그러나 그런 환경에서도 3일 연속 관객들이 그에게 박수와 격려를 보내줘서 감동했다고 한다. 콘서트가 끝난 후 일주일 동안 매일 CNN을 비롯하여 5백명의 중국 및 외국 기자들이 인터뷰를 위해 그를 쫓아다니며 당시 알란 탐과 콘서트가 화제가 되었다. 음향 효과가 좋지 않았던 것에 대한 보상으로 알란 탐은 같은 해 5월 13일부터 17일까지 홍함체육관에서 5번의 콘서트를 더 열었다. 1995년 발매한 앨범 <반아비상(伴我飛翔)>은 알란 탐이 처음으로 전체 앨범을 제작하였는데, 그가 선호하는 컨트리 록 스타일 음악으로 채운 이 앨범은 홍콩 가수로는 처음으로 앨범 전체를 라이브 밴드와 동시 녹음한 기록을 갖고 있으며, 음악의 퀄리티에 대해 평론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타이틀곡도 같은 제목의 <반아비상(伴我飛翔)>으로, 알란탐이 90년대에 낸 앨범의 타이틀곡중 러브송이 아닌 것은 이때가 최초였다. 그리고 1995년에 누적 음반 판매량이 2천만 장을 넘어섰다. 1996년에는 앨범 <사전상후(思前想后)>를 발표하고 같은 해 홍콩 가요계 최고 영예인 '금침장(金針獎)'을 수상하며 홍콩 가요계에서 가수와 밴드 멤버로 두 차례나 '금침장'을 수상한 유일한 가수가 되었다. 당시 시상자는 타니무라 신지였다. 2015년에 같은 위너스 출신의 [[종진도]]도 금침장을 수상했는데 이 때 시상자는 알란 탐이었다. 현재까지도 두 사람만 이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또한 같은 해 싱가포르 금곡영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알란 탐의 <금곡회귀연창회(金曲回歸演唱會)>가 홍함체육관에서 13회 열렸는데, 홍함에서는 늘 4면 무대를 고수하던 그가 클래식한 공연 연출을 위해 처음으로 3면 무대를 시도하였다. 1998년에 개인 앨범 2장 및 위너스 새 앨범도 발매하였으나 음반사 사정으로 홍보를 많이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너스 앨범의 타이틀곡인 <자연관계>는 3개 채널에서 1위를 차지해 위너스 최초의 3대관군가로 등극하였고, 알란 탐은 홍콩과 본토에서 그룹 및 솔로로서의 콘서트 활동에 매진하였다. 특히 98년 9월 12일에 상해체육장(서울로 치면 잠실 주경기장 같은 곳)에서 열린 단독콘서트 <'98 담영린재견상해연창회('98谭咏麟再见上海演唱会)>에는 7만명의 관중이 입장하여 화제를 모았다. 1999년 알란 탐이 소속된 음반 회사인 폴리그램 레코드는 또 다른 세계적 회사인 유니버설 뮤직에 인수되었고, 알란 탐은 유니버설에 머물기로 결정했다. 유니버설은 처음 홍콩 지사를 설립할 때 또 다른 슈퍼스타 장국영을 이미 성공적으로 영입하였기에, 자회사인 샹하이 레코드사에 소속된 장학우와 함께 홍콩 최고의 인기 남성 가수들을 한자리에 모으게 된 셈. 과거 알란탐과 장국영의 경쟁 관계를 고려하면, 두 슈퍼스타가 한 회사에서 공존할 수 있을지, 둘 중 누가 더 높은 대접을 받을지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유니버설 뮤직은 1999년에 알란 탐의 솔로 데뷔 20주년을 기념하고자 홍콩 음악계의 스타가수들을 모아 알란 탐의 히트곡 커버 앨범 <수가개변 誰可改變>을 출시, 그 위상을 세워주었고, 그 앨범에서 장국영과 알란 탐이 듀엣으로 부른 <환영 무지련>은 4대 차트 1위를 차지했다. ==== 2000년대 ==== 2000년 이후 알란 탐은 평균적으로 1년에 한 장의 앨범만 발매하며, 일정 수준의 퀄리티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2000년에 새 앨범 <자선각도(自選角度)>를 발표했는데, 이 곡은 홍콩 음악계에서 독창성이 주류였던 시절에 발표된 개작곡으로 홍콩 창작자들의 발전을 억누른다는 비난을 한때 받기도 했다. 그 해 여름 알란 탐은 홍함에서 <매력천희연창회(魅力千禧演唱會)>를 10회 개최했다. 2000년 말레이시아 '난양상보'는 중국 음악계 대중음악 전문가들을 초청해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중국 팝스타를 평가하고 가장 대표적인 가수 100인을 선정했다. 알란 탐은 "20세기 중국 음악 10대 남자 가수" 중 2위[* 1위는 허관걸. 장학우, 장국영이 각각 3위와 4위를 차지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중국 팝스타 100인" 중 7위를 차지했다. 2001년에는 노관정(盧冠廷), 채국권(蔡國權), 번원량(潘源良) 등 1980년대 창작 예술가 그룹을 모아 새 앨범 <애자기(愛自己)>를 발매하였고, 당시 유행하던 레이브 파티(Rave Party) 형식의 <비일반연창회 (飛一般演唱會)> 콘서트를 10회 개최하였다. 2002년에는 홍콩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합작해 '홍콩필하모닉 Alan Tam 라이브'를 6회 개최해 대중가수와 오케스트라가 함께한 콘서트 최다 횟수 기록을 갱신했으며, 같은 해 공연 실황 라이브 앨범을 발매했다. "Lycra Fashion MTV"에서 "음악 공로상", "제2차 중국 창작 음악 인기 목록"에서는 "밀레니엄 국가 공로상"을 수상했다. 2003년 설날에는 후배 가수 이극근(李克勤, Hacken Lee)과 함께 <좌린우리(左麟右李)[* 원래 4자성어로 '이웃'이라는 뜻인데 담영린의 '린'과 이극근의 '이'를 조합했다.]> 라는 이름으로 함께 콘서트를 개최하여 큰 호평을 받았고, 공연 실황 앨범인 <좌린우리 콘서트 Live>가 2003년 IFPI 최다판매앨범상을 수상하는 등 홍콩에서 좌린우리의 열풍을 일으켰다. 콘서트의 성공 덕분에 콘서트 수입 분배를 후배인 이극근에게 대폭 양보했음에도 불구하고 2003년 홍콩 연예인 중 수입 2위를 차지했다 (1위는 이극근, 3위는 유덕화).[[https://web.archive.org/web/20220530223134/http://ent.sina.com.cn/y/2005-05-10/1628719769.html?from=wap|기사]] 좌린우리 콘서트는 2004년과 2009년 설날에 다시 개최되었으며 중국 본토, 마카오, 동남아시아, 미국, 캐나다 등에서 수백 차례의 투어 공연을 펼쳤다. 2003년 여름, 홍콩금상장 영화제에 출연, 등려군의 <만보인생로(漫步人生路)>를 불렀고, TVB 프로그램 <추억장국영(追.忆张国荣)>에서는 장국영의 <풍계속취>를, 11월에는 [[매염방]] 고별콘서트에서 매염방과 <연분(緣份)>을 듀엣으로 부르며 눈물을 겨우 참는 모습을 보여 양쪽 팬들을 모두 슬프게 했다. [* 매염방과 알란 탐은 나이 차이는 꽤 나지만 영화와 콘서트, 많은 방송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며 오랫동안 가까운 친분을 유지했다. 방송에서는 주로 어리숙한 오빠와 똘똘한 여동생 같은 남매 (앙숙) 케미로 사랑받았다. 매염방은 한 방송에서 본인이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 '알란'이라고 했다. ] 2004년에는 중국 본토 시장을 겨냥하여 광동어와 표준어 혼합 앨범 <천지(天·地)>를 출시했다. 앨범 수록곡인 <피저양피적랑(披著羊皮的狼) 양의 탈을 쓴 늑대>는 다오랑(刀郎)의 자작곡으로, 2004년 다오랑이 유니버설 레코드에 합류했을 때 알란 탐이 다오랑에 직접 전화를 걸어 작곡 의뢰를 해서 받은 곡이다. 다오랑 특유의 거칠고 쓸쓸한 분위기를 잘 살린 이 곡은 기존에 알란 탐이 발표한 그 어느 곡과도 다른 독특한 매력으로 인기를 끌었으며, 중국원창음악유행방 홍콩대만십대금곡(中國原創音樂流行榜港台十大金曲)에서 전국 관객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노래, 2005년 Baidu의 연간 십대유행금곡(十大流行金曲)상을 수상했다. 두 사람의 협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2006년에 다오랑이 이 곡을 다시 불러 본인 앨범에 포함하여 출시했고, 알란 탐도 다오랑의 히트곡<2002년의 첫눈>을 광동어로 부른 <강불출적고별(講不出的告別)>를 출시했다. [* 이때의 협업이 2023년 소위 '다오랑 왕따 사건'때 다시 화제가 되었는데, 다오랑의 실력을 깎아 내려 왕따시킨 중국 음악계의 자칭 거물들과 달리 알란 탐은 다오랑의 재능을 인정하고 격려해줘 네티즌으로부터 '역시 교장',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 등의 평가를 받았다.] 2005년에는 연예계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가자연가농정30년연창회(歌者戀歌濃情30年演唱會)>를 11회 개최하였는데, 전세계 알란 탐 팬들의 집결로 화제를 모았다. 팬들의 성원에 공연 실황 앨범 <성광대도(星光大道)>도 발매와 동시에 차트 1위에 올랐다. 연초에는 오랫만에 홍콩 연예계에 복귀한 여가수 관숙이(關淑怡, Shirley Kwan)와 듀엣으로 《구정복치(舊情復熾)》를 발표, 3개차트 1위에 오른다. 두 사람은 알란 탐의 1991년 앨범 수록곡인 《명천니시불의연애아(明天你是否依然愛我)》를 듀엣으로 부른 적이 있고, 여러 방송 프로그램 및 서로의 콘서트의 게스트로 여러 차례 협업했다. 2007년에는 표준어 앨범 <최애소적인(最愛笑的人)>을 발매했고, 같은 해 홍콩작곡가협회(CASH)가 수여하는 최고 영예인 'CASH 음악 공로상'을 수상하여 창의적인 재능과 성과를 인정받았다. 그가 작사 또는 작곡에 참여한 곡은 100곡이 넘는다. 또한 같은 해, 제8회 홍콩 공연 예술가 협회 회장에 취임했으며,[* 재임 기간이던 2008년에 하필이면 홍콩 연예계를 깜짝 놀라게 한 역대급 사건인 진관희 스캔들이 터지는 바람에 협회 회장인 알란탐의 인터뷰도 연일 매체에 보도되었다. 스캔들이 터진 직후부터 하루가 다르게 당대 톱스타급 연예인의 사생활이 폭로되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미확인 루머까지 양산되는 바람에 연예인들은 단체로 언론과 대중의 질타를 받았고, 공연 예술인을 대변하는 단체의 회장으로서 알란 탐도 곤혹을 치렀다.] 홍콩 정부 명예 훈장도 받았다. 2009년 설날 시즌에는 <좌린우리콘서트>를 개최하였고, 2009년 봄부터 2010년 봄까지 대만 및 중국 각지에서 위너스의 <위너스33호시광연창회> 투어를 개최하였다. 2010년 범 중국 음악산업 30년을 돌아보며 전 세계 100명의 음악인, 평론가, 라디오 DJ 등이 지난 30년간 가장 뛰어났던 <30명, 30곡, 30편>을 선정한 화어금곡장(華語金曲獎) 시상식에서, 30인에 알란 탐이, 30곡에 <애재심추>가, 30편에 <애적근원>이 수상했다. ==== 2010년대 ==== 2010년 7월 16일부터 24일까지 오랫만에 개인 콘서트《재도감동연창회(再度感動演唱會)》를 8회 개최하였는데, 60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3시간반 동안 락, 댄스, 발라드를 오가며 혼자서 50여 곡을 쉬지않고 노래하는 열정과 감동의 공연을 보여주었다. 공연은 어쿠스틱 곡들로 시작하여 락밴드 공연장처럼 관객들을 다같이 뛰게 만들다가 후반부에는 30대때 미성으로 불렀던 <망불료니>, <환영> 등의 히트곡을 60대의 한결 원숙해진 목소리와 감성으로 불러 관객들을 열광시켰고 각 매체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알란 탐의 오래된 팬들 중에는 수십년간 백번도 넘게 들은 <망불료니>와 <환영>의 여러 버전 중에서 2010년 콘서트 버전을 최고로 꼽는 팬들이 많다.] 같은 해 10월 20일, 그가 열성적으로 지지했던 밴드 미스터(Mr.)와 콜라보레이션하여 새 앨범 를 발매하였다. 앨범에는 광동어와 중국어 버전으로 총 20곡을 수록하였다. 2011년에는 중국 본토와 마카오에서 《재도감동연창회(再度感動演唱會)》투어를 진행했다. 2012년에는 밴드 사운드와 현악의 크로스오버 앨범 를 발매, 부족한 홍보에도 불구하고 좋은 판매량을 기록했고, 타이틀곡 가 각종 음악 차트 1위를 차지했다. 2012년 6월에는 베테랑 여가수 두리샤(Teresa)와 협업하여 Hi-Fi 앨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