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명 ||안창제(安昌濟) || || [[본관]] ||[[안(성씨)|탐진 안씨]] || || 생몰 ||[[1866년]] [[10월 1일]] ~ [[1931년]] [[8월 13일]] || || [[출생지]]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 [[안(성씨)|탐진 안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안효제]]·[[안희제]]와 제헌 국회의원 [[안준상]], [[안호상]] 초대 문교부 장관도 이 마을 출신이다.] || || 사망지 ||[[중국]] [[지린성]] 장춘현 삼성보 || || 추서 ||건국훈장 애국장 || [목차] == 개요 ==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안창제는 1886년 10월 1일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진령군]]을 탄핵한 강직한 유학자였고 독립운동에도 뛰어든 [[안효제]]의 서제(庶弟)이다. 1894년 [[갑오개혁]]이 발표되자, 그는 갑오개혁을 주도한 개화파들을 처형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금부옥(禁府獄)에 감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이후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의 국권이 일본에게 넘어가자 3차례 상소를 올려 [[을사오적]]을 참수할 것을 청했지만 회답을 받지 못했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그는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단을 조직하고 단장 [[박장호]]와 협력하여 결사대를 파견해 일본 경찰과 밀정을 다수 사살했다. 1919년에는 중국에서 조직된 전국유교연맹의 동삼성 학회 분회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1931년 8월 13일 지린성 장춘현 삼성보에서 [[장학량]]의 봉천군벌 병사들에게 일가족과 함께 처형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안창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분류:나무위키 독립운동가 프로젝트]][[분류:한국의 독립운동가]][[분류:탐진 안씨]][[분류:의령군 출신 인물]][[분류:1866년 출생]][[분류:1931년 사망]][[분류:건국훈장 애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