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CBA 0%, #0755A1 30%, #0755A1 70%, #3D7CBA)" {{{#ffffff '''안젤로 스키아비오의 수상 이력'''}}}}}}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 [[파일:실버슈.png|height=50|height=50]][br]{{{#!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3px 3px; border-radius: 2px; background: #131A3C; font-size: 0.9em" {{{#ffffff '''FIFA 월드컵 실버슈 1934'''[* [[에드문트 코넨]]과 공동 득점 2위. 골든슈, 실버슈, 브론즈슈는 1982년부터 수여했으므로 비공식 상.]}}}}}} || ----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9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3D7CBA 0%, #0755A1 30%, #0755A1 70%, #3D7CBA)" {{{#ffffff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ffffff 1934}}}]]'''}}}}}} || }}} || ---- ||<-2> [[파일:Angelo Schiavio.jpg|width=100%]] || || 이름 ||안젤로 스키아비오[br]Angelo Schiavio || || 출생 ||[[1905년]] [[10월 15일]] || || 사망 ||[[1990년]] [[4월 17일]] (향년 84세) || || 국적 ||[include(틀:국기, 국명=이탈리아)] || || 출신지 ||[[볼로냐]] || || 포지션 ||센터 포워드 || || 신체조건 ||178cm / 69kg || || 등번호 ||-[*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 || || 소속팀 ||'''[[볼로냐 FC 1909]] (1922~1938)''' || || 국가대표 ||21경기 15골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 1925~1934)^^ || || 감독 ||[[볼로냐 FC 1909]] (1933~1934)[br][[볼로냐 FC 1909]] (1946)[br][[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 대표팀 기술 위원회]] (1953~1958) || [목차] [clearfix] == 개요 == [[이탈리아]]의 [[축구선수]] 출신 [[코치(스포츠)|감독]]. [[1946년]]에 [[볼로냐 FC 1909]] 감독을 맡았다. 선수시절 [[볼로냐 FC 1909]] 클럽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였다. == 특징 == * [[루이스 몬티]] 문서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처음에는 몬티와의 사이가 엄청 좋지 않았었다. 볼로냐의 에이스 공격수였던 스키아비오와 상대팀의 센터 하프였던 몬티는 사사건건 충돌이 있었는데 첫 번째 충돌은 192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몬티가 [[세리에 A|이탈리아]]에 가기 전, 스키아비오의 소속팀 볼로냐가 아르헨티나로 투어를 온 적이 있었다. 8월 15일, 볼로냐와의 경기에서 몬티는 평소답게 그를 막았고 이에 짜증이 난 스키아비오와 몇 번 말싸움을 벌였다. 그리고 1932년, [[유벤투스 FC|유벤투스]]로 건너온 몬티는 5월 1일, 다시 스키아비오와 맞붙었다. 전반 44분, 몬티는 스키아비오를 때렸고, 스키아비오는 기절했다 30분 후에 깨어났다. 이 둘은 나중에 대표팀 감독 [[비토리오 포초|포초]]의 노력으로 화해한다. * 스키아비오는 우루과이의 [[엑토르 카스트로]], 아르헨티나의 [[리오넬 메시]]와 더불어 월드컵 우승팀의 첫 득점과 마지막 득점을 기록한 선수이다. == 선수 경력[* 출처: 위키백과] == === 클럽 === [[볼로냐]]에서 태어난 스키아비오는 1921-22 시즌까지 볼로냐 유스에서 활약하였다. [[볼로냐 FC 1909|볼로냐]] 데뷔는 1923년 1월 18일에 했고, 상대는 [[유벤투스 FC|유벤투스]]였다. 스키아비오는 데뷔 초 11경기에서 6골을 넣는 활약을 펼치며 체사레 알베르티의 빈자리를 꿰찼고, 주전으로서 북부 지역 리그 결승까지 팀을 이끄는 활약을 펼쳤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해 볼로냐는 [[제노아 CFC|제노아]]에 패배하고 말았다. 하지만 스키아비오는 1924-25 시즌, 볼로냐를 이끌고 첫 [[스쿠데토]]를 차지하였다. 이 활약으로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이탈리아의 푸른 유니폼]]도 입게 되었다. 볼로냐에서 그의 활약은 계속되어 1925-26 시즌에는 23게임에 출전해서 26골을, 1928-29 시즌에는 29게임에 출전, 29골을 넣었다. 1931-32 시즌에는 25골로 득점왕, 그 다음 해에는 28골로 [[펠리체 보렐]]에 이어 득점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1932년과 1934년에는 [[세리에 A|이탈리아]] 대표로 미트로파 컵에 나가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6-37 시즌에는 단 2경기 출전에 그쳤고, 1937-38 시즌을 끝으로 은퇴하게 되었다. === [[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국가대표]] === [[유벤투스 FC]]의 [[루이지 알레만디]]와 함께 1925년 11월 4일, 대표팀에 데뷔하였다. 상대는 [[세르비아 축구 국가대표팀|유고슬라비아 왕국]]. 그리고 스키아비오는 2골을 넣으며 2대1 승리를 이끌었다. 하지만 이런 그도 초기에는 국가대표팀의 고정 멤버가 되지 못했는데 바로 오리운디 중 한 명인 [[훌리오 리보나티]]의 존재 때문이었다. 똑같은 센터 포워드라 같은 경기에 출전할 수 없었고, 리보나티는 중유럽 인터내셔널 컵에, 스키아비오는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올림픽]]에 나가는 식으로 대회를 나눠서 출전하였다.[* 스키아비오도 1927-30 중유럽 인터내셔날 컵에 참가했지만 2경기를 제외하면 리보나티가 출전했다. 스키아비오가 큰 부상을 입은 정황도 보이지 않으므로 당시에는 리보나티가 1옵션이었다.] 올림픽에서는 우루과이의 [[호세 레안드로 안드라데]]와의 대결이 꽤 유명하다.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조국에서 열린 월드컵]]에서는 감독 [[비토리오 포초|포초]]에 의해 스트라이커로 낙점 받았다. 그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미국]]과의 경기에서 기록한 [[해트 트릭]]을 포함[* 이탈리아의 월드컵 역사상 첫 해트 트릭이다.], 총 4골을 기록하여 득점 2위에 올랐고,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8강 이후#s-4.1|결승전]]에서는 결승골을 기록하여 이탈리아를 세계 챔피언에 올려놓았다. 스키아비오는 월드컵이 끝나고 국가대표팀 생활을 마무리 지었다. == 감독 경력 == 1933-34 시즌에는 볼로냐의 [[선수 겸 감독]]이 되어 팀을 이끌기도 했다. 1945-46 시즌에 다시 감독이 되기도 했지만 시즌을 마치지 못하고 감독직에서 잘렸다. 그 이후에는 이탈리아 대표팀 기술 위원회 소속으로 대표팀을 이끌기도 했는데 7년 중 5년 간 기술 위원 자리에 앉아서 팀을 이끌었다. === 은퇴 이후 === 스키아비오는 축구계를 떠난 후 의류 회사를 세우고 회사를 키우는데 전념했다. 그는 1990년에 사망하였다.[* 1934년 이탈리아가 월드컵 우승을 했을 당시 있었던 선수들중에서 마지막 생존자였다.] == 플레이 스타일 & 평가 == 활약할 당시 센터 포워드로서 이탈리아의 웬만한 다른 선수들보다 한 수 위의 기량을 뽐냈으며 힘과 좋은 드리블을 갖추었다. [[볼로냐 FC 1909|볼로냐]]에서 넣은 골은 통산 242골로 단연 1위. 2위 카를로 레구초니와도 75골 차이가 난다. 그의 커리어 중 반에 가까운 7시즌이 [[세리에 A]] 창설 이전이라 세리에 A 기록은 많이 손해를 보았지만, 세리에 A 창설 이전 기록까지 합산하면 그의 기록 위에는 [[실비오 피올라]](290골), [[주세페 메아차]](267골), [[프란체스코 토티]](250골) 단 3명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경기당 득점에서도 1경기당 0.69골을 기록하여 0.77골의 [[군나르 노르달]]에 이어 전체 세리에 A 100골 이상 득점 기록자 중 2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볼로냐에서의 출장 횟수도 364회로 역대 9위에 위치해있으며 스키아비오가 있을 때 스쿠데토를 4번이나 차지하며 클럽 역사상 전체 우승의 반 이상을 이루었으니 당연히 [[볼로냐 FC 1909|볼로냐]]에서 그를 능가할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 > 수비 방어를 뚫음으로서 그의 움직임을 쉽게 가져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스키아비오의 안전한 드리블이다. 그는 걷고 달리는 완급조절을 통해 가볍게 수비진을 흔들었고, 그러면 수비는 그가 어느 방향으로 나갈지 더 이상 알 수 없었다. 슈팅은 준비되어 있으며 강력했고, 단단하면서도 건조한 그리고 도도한 드리블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슈팅은 슈팅이었다.[br](Fu il palleggio sicuro di Schiavio ad agevolare la sua azione di centravanti di sfondamento. Camminava e correva ondeggiando lievemente, sì che l'avversario non sapeva più da che parte prenderlo. Lo scatto pronto, autoritario. L'azione potente e veloce. Aveva un dribbling stretto, secco, imperioso. Il suo tiro era una fucilata.) >---- >Centravanti, di Bruno Roghi, Emilio Violanti e [[주세페 메아차|Giuseppe Meazza]], Milano, Sperling&Kupfer, 1955, p. 87 == 수상 == === 클럽[* 스키아비오는 볼로냐 [[원 클럽 플레이어]]라 클럽 이름 기입은 생략했다.] === * [[세리에 A]] 우승 4회: 1924-25, 1928-29, 1935-36, 1936-37 * [[세리에 A]] 준우승 2회: 1926-27, 1931-32 * 미트로파 컵 우승 2회: 1932, 1934 === 국가대표 === * [[FIFA 월드컵]] 우승 1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 * 올림픽 3위 1회: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1928]] * 중유럽 컵 우승 2회: 1927–30, 1933–35 === 개인 === * [[세리에 A]] 득점왕 1회: 1931-32[* 25골로 [[페드로 페트로네]]와 함께 공동 득점왕.] * [[FIFA 월드컵]] 실버슈 1회: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1934]]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2012 [각주] [[분류:1905년 출생]][[분류:1922년 데뷔]][[분류:1938년 은퇴]][[분류:1990년 사망]][[분류:이탈리아의 축구선수]][[분류:이탈리아의 축구감독/은퇴·사망]][[분류:볼로냐 FC/은퇴, 이적]][[분류:선수 겸 감독/축구]][[분류:볼로냐 FC/역대 감독]][[분류:이탈리아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분류:이탈리아의 FIFA 월드컵 참가 선수]][[분류: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참가 선수]][[분류:이탈리아의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참가 선수]][[분류:이탈리아의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 참가 선수]][[분류:이탈리아의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메달리스트]][[분류:이탈리아의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분류: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 메달리스트]][[분류:FIFA 월드컵 우승 선수]][[분류:FIFA 월드컵 결승전 득점자]][[분류:볼로냐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