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영국 왕비)] ---- ||<:><-3> ''' 영국 조지 2세의 왕비[br]{{{+1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br] Caroline von Brandenburg-Ansbach''' || ||<:><-3>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Caroline of Ansbach.jpg|width=100%]]}}} || ||<:><|2> '''이름''' || 독일어 ||빌헬미나 샤를로테 카롤리네[br](Wilhelmina Charlotte Caroline) || || 영어 ||윌헬미나 샬럿 캐롤라인[br](Wilhelmina Charlotte Caroline) || ||<:> '''출생''' ||<-2>[[1683년]] [[3월 1일]][br][[신성 로마 제국]]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국 [[안스바흐]] || ||<:> '''사망''' ||<-2>[[1737년]] [[11월 20일]] (향년 54세)[br][[런던]] [[세인트 제임스 궁전]] || ||<:> '''장례식''' ||<-2>[[1737년]] [[12월 17일]][br][[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 || ||<:> '''배우자''' ||<-2>[[조지 2세]] ,,(1705년 결혼),, || ||<:> '''자녀''' ||<-2>[[프레더릭 루이|프레더릭]], 앤[* 현 [[네덜란드]]의 국왕 [[빌럼알렉산더르]]의 조상 중 하나이자 초대 국왕인 [[빌럼 1세]]의 조모.], 아멜리아, 캐롤라인, 조지 윌리엄, [[윌리엄 오거스터스|윌리엄]], 메리, [[영국의 루이자|루이자]]|| ||<:> '''아버지''' ||<-2>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요한 프리드리히 || ||<:> '''어머니''' ||<-2>작센아이제나흐의 엘레오노레 에르트무테 || ||<:> '''형제''' ||<-2>레오폴트, 크리스티안 알베르트, 도로테아 프리데리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샤를로테 조피,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투스, 빌헬름 프리드리히 || ||<:> '''종교''' ||<-2>[[루터교]] || ||<:> '''서명''' ||<-2>[[파일:Queen Caroline of Ansbach Signature.svg|width=150]]|| [목차] [clearfix] == 개요 == [[영국 국왕]] [[조지 2세]]의 왕비. [[프로이센 왕국]]을 통치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방계 출신으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로 불리며 [[모데나의 마리아]] 이후 39년만에 나타난 [[잉글랜드 왕국]], [[스코틀랜드 왕국]]이 통합된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영국]]의 왕비이다. == 작위 == ||
[[파일:Coat_of_Arms_of_Caroline_of_Brandenburg-Ansbach.svg.png|width=250]] || || '''문장''' || *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의 카롤리네 공녀 전하 Her Serene Highness Princess Caroline of Brandenburg-Ansbach (1683년 3월 1일 ~ 1705년 8월 22일) * 하노버의 선제후비 전하 Her Serene Highness The Electoral Princess of Hanover (1705년 8월 22일 ~ 1714년 8월 1일) * 웨일스 공비 전하 Her Royal Highness The Princess of Wales (1714년 8월 1일 ~ 1727년 6월 11일) * 왕비 폐하 Her Majesty The Queen (1727년 6월 11일 ~ 1737년 11월 20일) == 생애 == === 유년기 === 1683년에 [[안스바흐]]에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랑켄]]계 방계.] 요한 프리드리히의 딸로 태어났다.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외가댁인 [[아이제나흐]]에서 살았다. 1692년부터 어머니 엘레오노레가 [[작센 선제후국|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 4세와 재혼하면서 작센 선제후의 궁정이 있는 [[드레스덴]]에서 살게 되었다. 요한 게오르크 4세는 문제가 많은 인물[* 참고로 동생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색욕마인 [[아우구스트 2세]]다. 친형제가 쌍으로 문제가 많았다.]이었으며 엘레오노레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어머니의 불행한 결혼 생활은 결혼 2년 만에 요한 게오르크 4세가 [[정부(관계)|정부]]에게 [[천연두]]가 옮아 죽으면서 끝이 났다. 과부가 되고 2년 뒤 엘레오노레 또한 병으로 사망했다. 카롤리네와 어린 두 명의 동생들에게는 보호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카롤리네보다 나이가 많은 형제들은 배다른 동생들을 외면했다. 카롤리네와 동생들은 어머니의 친구이며 당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프로이센)|프리드리히 3세]]의 부인이었던 [[하노버의 조피 샤를로테]][* 하노버의 선제후 에른스트 아우구스투스의 딸이며 [[조지 1세]]의 여동생. [[프로이센 왕국|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의 어머니다.]에게 맡겨졌다. 조피 샤를로테는 [[베를린]]에 온 카롤리네를 잘 대해줬으며 카롤리네도 그녀를 어머니처럼 따랐다.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카롤리네는 지적인 조피 샤를로테 밑에서 교양과 학식을 쌓아갔다. === 결혼 === 아름답게 성장한 카롤리네는 유럽 왕실에서 꽤 괜찮은 신붓감으로 알려졌다. 조피 샤를로테의 어머니 [[팔츠의 조피]]는 카롤리네를 자신의 손자 [[조지 2세|게오르크 아우구스트]]의 신붓감으로 눈여겨보게 되었다. 1705년 6월에 게오르크 아우구스트의 아버지 [[조지 1세|게오르크 루트비히]] 또한 카롤리네를 만나보고 그녀를 마음에 들어했다. 1705년 8월 22일, 카롤리네와 게오르크 아우구스트는 하노버에 있는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사람은 금슬좋은 부부였으며 죽을 때까지 이상적인 부부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게오르크 아우구스트는 카롤리네가 병에 걸려 격리되어도 곁을 떠나지 않을 정도로 아내를 아꼈다. 그러나 당시의 신체 건강한 귀족 남성들이 다 그랬듯이 게오르크 아우구스트 또한 정부를 뒀다. 카롤리네는 질투하지 않고 남편의 정부들에 대해 알려고 노력했다. 그중에서 [[서퍽]] 백작부인 헨리에타 하워드는 자신의 시녀로 두며 보호하기도 했다. 1714년에 시아버지가 [[영국]]의 조지 1세로 즉위하면서 부부는 영국으로 향했다. 게오르크 아우구스트는 [[웨일스 공]]이, 카롤리네는 웨일스 공비가 되었다. 이때부터 본명인 카롤리네가 아니라 영국식 이름인 캐롤라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캐롤라인의 남편과 시아버지는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정치적으로도 대립되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은 자주 어긋났는데, 캐롤라인이 둘째 아들인 조지 윌리엄을 낳은 뒤 아이의 이름과 대부모를 정하는 일로 갈등이 폭발하게 되었다. 크게 화가 난 조지 1세는 아들 부부를 손자의 곁에서 떨어뜨려놓고 아들을 가택연금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조지 윌리엄이 병이 나면서 아들 부부가 아이를 돌보는 걸 허용했다. 하지만 조지 윌리엄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고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사망했다. 웨일스 공 부부는 아들의 죽음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가 부모랑 떨어져서 생긴 일이라고 믿으면서 조지 1세를 원망했다. === 왕비 === 1727년에 조지 1세가 사망하면서 남편이 조지 2세로 즉위했다. 캐롤라인은 남편을 적극적으로 도우며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다. 그녀는 당시 수상이었던 [[로버트 월폴]]을 굉장히 신뢰했으며 로버트와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던 남편과 수상의 사이를 중재했다. 캐롤라인은 남편의 부재시에 남편의 공석을 대신했다. 그녀는 모두가 자유롭게 의견을 내는 것을 선호했기에 국왕의 반대파나 [[자코바이트]]의 의견도 경청했다. 국왕 대리로서 캐롤라인은 외교 분쟁과 같은 국외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했다. 반면 국내문제는 성공적으로 처리하지 못했기에 국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 말년 === 1724년에 막내 [[영국의 루이자|루이자]]를 낳을 때 [[탈장]]에 걸리면서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캐롤라인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린 끝에 마취없이 수술을 해야했다. 그럼에도 상태는 크게 호전되지 않았다. 말년에는 [[통풍]]으로 고생해 제대로 걷지 못했다. 죽기 직전에 캐롤라인은 사이가 나빴던 큰아들을 용서하고 남편에게 재혼할 것을 권했다. 1737년 11월 20일에 캐롤라인은 숨을 거두었고 한 달 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조지 2세는 아내를 안장하면서 그 옆에 훗날 자신이 들어갈 관을 같이 준비했다고 한다. 캐롤라인의 장송곡은 국왕 부부와 가까운 사이였던 [[헨델]]이 직접 작곡했다. [youtube(pbbfhXX-QPs)] == 자녀 ==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George_II,_Queen_Caroline,_and_children.png|width=100%]]}}} || || 조지 2세와 캐롤라인, 그리고 일곱명의 자녀들 || ||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 / 자녀''' || || '''1남''' || [[프레더릭 루이|웨일스 공 프레더릭 루이]][br]{{{-2 (Frederick Louis, Prince of Wales)}}} || [[1707년]] [[1월 31일]] || [[1751년]] [[3월 31일]] || [[작센고타알텐부르크의 아우구스타]][br]슬하 5남 4녀[* [[조지 3세]], [[캐롤라인 마틸다]] 등] || || '''1녀''' || 프린세스 로열 앤[br]{{{-2 (Anne, Princess Royal)}}} || [[1709년]] [[11월 2일]] || [[1759년]] [[1월 12일]] || 오라녀 공 빌럼 4세[* [[네덜란드]]의 초대 국왕인 [[빌럼 1세]]의 할아버지.][br]슬하 1남 2녀 || || '''2녀''' || 아멜리아 공주[br]{{{-2 (Princess Amelia)}}} || [[1711년]] [[6월 10일]] || [[1786년]] [[10월 31일]] || || || '''3녀''' || 캐롤라인 공주[br]{{{-2 (Princess Caroline)}}} || [[1713년]] [[6월 10일]] || [[1757년]] [[12월 28일]] || || || '''2남''' || 조지 윌리엄 왕자[br]{{{-2 (Prince George William)}}} || [[1717년]] [[11월 13일]] || [[1718년]] [[2월 17일]] || || || '''3남''' || [[컴벌랜드 공작 윌리엄 왕자]][br]{{{-2 (Prince William, Duke of Cumberland)}}} || [[1721년]] [[4월 26일]] || [[1765년]] [[10월 31일]] || || || '''4녀''' || 메리 공주[br]{{{-2 (Princess Mary)}}} || [[1723년]] [[3월 5일]] || [[1772년]] [[1월 14일]] || --헤센-카셀 방백 프리드리히 2세--[* 1754년 이혼][br]슬하 4남 || || '''5녀''' || [[영국의 루이자|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왕비 루이세]][br]{{{-2 (Louisa, Queen of Denmark and Norway)}}} || [[1724년]] [[12월 18일]] || [[1751년]] [[12월 19일]] || [[프레데리크 5세]][br]슬하 2남 3녀[* [[소피 마그달레네|스웨덴의 왕비 소피아 막달레나]], [[크리스티안 7세]] 등] || 조지 2세와 캐롤라인은 8명의 자녀를 두었다. 요절한 조지 윌리엄을 제외한 7명의 아이가 모두 성인으로 자랐다. 그중 하노버의 궁중에서 자란 장남 [[프레더릭 루이|프레더릭]]과 사이가 안 좋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조지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프레더릭 루이|프레더릭]]은 영국으로 와 웨일스 공의 직위를 물려받았다.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프레더릭은 부모와 잘 지내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권력이 적은 것을 불평하면서 아버지를 반대하는 세력인 [[토리당]] 인사들과 어울렸다. 조지 2세는 궁을 비울 때 방종한 큰아들이 아닌 지적인 아내를 국왕 대리로 세웠다. 이는 프레더릭의 부모에 대한 불만을 키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프레더릭은 결혼 후 어머니가 첫 손자가 태어나는 자리에 참석하고 싶어하자 일부러 출산 예정일을 속이고 출산이 임박한 아내를 다른 궁으로 옮기기까지 했다. 캐롤라인이 사망한 후 조지 2세는 프레더릭이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였다. == 여담 == * 캐롤라인은 매우 지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영국에 온 뒤로 [[세인트 제임스 궁전]]에 거대한 도서관을 설립했다. 그리고 [[아이작 뉴턴]]이나 [[라이프니츠]] 같은 당대의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다. *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시아버지 조지 1세와 사이가 나빠 정치에서 배제되었을 때 캐롤라인과 그녀의 남편은 주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지냈다. 캐롤라인은 왕비가 된 후로 보석, 초상화, 조각 등을 수집하며 예술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 [[천연두]] 예방접종을 지지한 인물이다. 영국의 작가 [[메리 워틀리 몬태규]]는 터키에서의 여행 이후 아시아 등지에서만 실행 중이었던 인두법의 도입을 주장했다. 인두법은 천연두 환자의 균을 약화시킨 후 피부에 접촉시켜 약하게 앓는 것으로 항체를 만드는 방법으로, [[에드워드 제너]]의 [[우두법]] 이전에 가장 효과적인 천연두 예방법이었다. 하지만 당시 유럽인들은 인두법에 대한 거부감이 강했기에 이 주장은 그대로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캐롤라인은 메리 워틀리 몬태규의 의견을 채택해 죄수들에게 시행하는 것으로 임상실험을 거쳤다. 이후 효과가 확인되자 자신의 자녀들에게도 인두법을 시행했다. 왕실 가족들이 인두법을 시술받는 것을 보고 사람들의 인식이 바뀌었으며 접종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었다. * [[미국]]의 [[버지니아주]]에 위치한 캐롤라인 카운티가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분류:그레이트브리튼 왕비]][[분류:하노버 선제후비]][[분류:하노버 가문]][[분류:호엔촐레른 가문]][[분류:1683년 출생]][[분류:1737년 사망]][[분류:안스바흐 출신 인물]][[분류:웨스트민스터 사원 안장자]][[분류:웨일스 공비]][[분류:콘월 공작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