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1858년/사건사고]][[분류:1859년/사건사고]][[분류:에도 시대]][[분류:사법살인]][[분류:숙청]] [include(틀:막부 말기의 주요 사건)] [목차] 安政の大獄 == 개요 == [[1858년]]부터 [[1859년]]까지 [[에도 막부]]의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반대파 100여 명을 [[숙청]]한 사건. 당시 일본의 [[연호]]가 안세이였기 때문에 '''안세이(安政)의 대옥사'''라고 부른다. == 배경 == 1853년 [[쿠로후네 사건]] 이후 에도 막부는 개화파와 양이파로 갈라져 끝없는 전쟁을 반복하고 있었다. 해가 갈수록 정쟁은 점점 심해졌는데, 하필이면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이에사다]]는 병약해서 정치 전반을 로주(老中)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에게 맡겨 놓은 상태였고, 3명의 정실부인과 1명의 첩실로부터도 후사를 얻지 못하는 등 도쿠가와 가문 내외의 혼맥상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시기의 에도 막부는 개화론과 공무합체론 등의 정치현안을 두고 두개의 파벌로 쪼개어진 상태였는데, 첫번째는 로주 아베 마사히로와 [[미토 번|미토번]]주 나리아키(徳川斉昭)를 중심으로 존황양이와 공무합체[* 로주 아베 마사히로는 웅번 다이묘들의 중앙정치 참여에 관심이 많았다. 덕분에 토자마 출신의 [[시마즈 가문]]에서도 [[텐쇼인|아츠히메]]를 입궁시키고 중앙정치에 운을 띄우는 등 발언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난벽 다이묘로 이름이 높았던 [[시마즈 나리아키라]]가 굳이 양이를 내세우는 [[히토츠바시파]]와 동맹을 맺은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그들의 우정/동맹 관계는 나리아키라가 시마즈 가문의 가독을 상속할 때부터([[오유라 소동]]) 밀접했던 것으로 보여진다.]를 내세우는 [[히토츠바시파|히토츠바시 파벌]]이었고, 이에 맞서는 두번째 당파로 마츠다이라 노리야스(松平乗全)[* 미카와 니시오번 4대 당주. 에도 막부에서 로주를 맡았다.], 마츠다이라 타다카타(松平忠固)[* 시나노 우에다번 6대 당주. 에도 막부에서 로주를 맡았다.] 등 개화론/개국론을 내세우는 세력이었다. 1853년 페리 내항 당시 우라가 항의 수비를 맡고 있던 [[시가현|히코네 번]]주 [[이이 나오스케]]는 본디 쇄국주의자였는데, 로주 마사히로가 외교자문을 구하자 개국론을 주장하면서 양이주의자였던 나리아키와 갈등하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이이 나오스케]] 문서 참조.] 1857년 로주 아베 마사히로가 급사하고 이듬해 1858년 4월 23일, [[오오쿠]]의 혼쥬인(本寿院: 쇼군 이에사다의 친모), 홋타 마사요시(堀田正睦)[* 나리아키가 노리야스와 타다카타를 로주에서 해임하자, 이에 대한 응수로 [[이이 나오스케|나오스케]] 파벌에서 로주수좌(老中首座)로 내세운 인물. [[이이 나오스케|나오스케]]의 친구이자 개화파였다고 한다.], 마츠다이라 타다카타(松平忠固) 등 개화파의 정치공작에 힘입어 [[이이 나오스케|나오스케]]가 다이로(大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다이로에 오른 그에게는 두 가지의 정치 현안이 있었는데, 첫번째는 병약했던 쇼군 [[도쿠가와 이에사다|이에사다]]의 후계자를 정하는 문제였고, 두번째로 [[미국]]과 맺은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비준하는 문제였다. == 전개 == 가장 시급했던 후계자 문제를 두고 [[히토츠바시파]]에서는 미토번주 나리아키의 아들[* 미토번주 도쿠가와 가문에서 고산쿄 히토츠바시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다.] [[도쿠가와 요시노부|히토츠바시 요시노부]]를 후계자로 밀었고[* 여기에서 [[히토츠바시파]]의 이름이 유래했다.], 오오쿠의 [[텐쇼인|아츠히메]](이에사다의 세번째 정실부인)[* 히토츠바시파에서 좌장을 맡았던 시마즈 나리아키라의 양녀였다.]가 가세했다. 반대로 [[이이 나오스케|나오스케]]의 파벌[* 키슈의 별칭에서 따와 난키파(南紀派)라고도 부른다고 한다.]에서는 고산케 [[와카야마현|키슈(紀州)]]번주 [[도쿠가와 이에모치|이에모치]]를 밀었고, 오오쿠에서는 이에사다의 친어머니 오미츠노카타(お美津の方)/혼쥬인(本寿院)이 가세했다. 1858년 6월 25일, 다이로 나오스케는 [[도쿠가와 이에모치|이에모치]]를 차기 쇼군으로 선언했고,[* 쇼군 이에사다의 뜻이, 혈연적으로 가까운 이에모치에게 기울어져 있다는 핑계를 댔다고 한다.] [[히토츠바시파|히토츠바시 파벌]]에서 이 결정에 반발해 에도성에 올라가 항의했다. 1858년 7월 5일, 쇼군 이에사다가 죽기 하루 전, 다이로 나오스케는 쇼군 이에사다의 칙령을 빌어 도쿠가와 요시카츠(徳川慶勝)[* 고산케 필두 오와리 도쿠가와 가문의 14대 당주. [[히토츠바시파]]가 에도성에 등성해 항의할 때 같이 손잡고 등성했다.], [[마츠다이라 슌가쿠|마츠다이라 요시나가]](松平慶永)[* 후쿠이 번주이자 히토츠바시 파벌의 핵심 인사. 호가 본명보다 유명해서 NHK 대하드라마 등에서는 흔히 에치젠노카미 슌가쿠(越前守 春嶽)로 불리기도 한다. 에치젠은 후쿠이현의 옛 이름.],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 히토츠바시 요시노부(一橋慶喜)의 은거와 근신을 명령하고, 추가적으로 도쿠가와 요시아츠(徳川慶篤)[* 미토 번주 도쿠가와 가문의 10대 당주. 나리아키의 아들이자 요시노부의 형이다.]의 등성 금지와 근신을 명했다. 나오스케가 멋대로 후계자를 정했다는 소식이 서쪽 끝 [[가고시마현 |사츠마 땅]]에 전달되자 히토츠바시파의 좌장이었던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무력으로 불만을 표시하기 위해 가고시마에서 거병했지만, 7월 8일 병마(콜레라)로 갑자기 쓰러져 그대로 사망하고[* 이 당시 사츠마번의 시마즈 가문의 인사들은 콜레라로 인해 많은 인물들이 사망했다. 하지만 1858년에 이르면 사츠마의 콜레라 유행이 어느정도 사그라들었다는 점, 나리아키라의 부검 결과에 대해 콜레라가 맞다 아니다로 왈가왈부가 많았다는 점 때문에 암살의혹이 있었다고 한다.] 시마즈 문중의 내부정치는 다시 혼란에 빠진다.[* [[오유라 소동]] 때 [[히토츠바시파]]의 외교질로 이복형 나리아키라에게 가독을 빼앗겼던 히사미츠(久光)가 사츠마 국주에 오른다. 안세이 대옥으로 (자신의 즉위를 훼방놓았던) 히토츠바시 계열의 다이묘들이 줄줄이 몰락하자 히사미츠는 사츠마번과 히토츠바시파의 관계에 선을 긋고, (나리아키라 파벌의 행동대장이었던) [[사이고 타카모리|타카모리]]를 [[아마미 군도]] 오오시마 섬으로 유배 보냈다.] 1858년 7월 29일, 이미 개국파들의 압력[* 여기에는 미국 영사였던 타운젠트 해리스(Townsend Harris, 1804-1878)가 언제까지 미룰거냐고 겁박한 것을 포함한다.]과 자잘한 정치적 문제들[* 천황의 허락을 받으려고 했으나 양이 성향이 강했던 고메이 덴노는 도장 찍기를 거부하고 있었다.]로 인해 골치를 썩고 있었던 다이로 나오스케는 기세를 몰아 [[미일수호통상조약]]을 [[가나가와현|카나가와]]에서 체결한다. 당연히 이번에도 히토츠바시파에서는 반발했지만 나오스케는 홋타 마사요시와 마쓰다이라 타다가타의 책임으로 돌려 그들을 해임시키는 선에서 정리하고, 그들의 후임으로 오타 스케모토(太田資始)[* 토도우미 카케가와번 5대 당주. 과거 로주 시절, 미토번의 나리아키와는 작은 트러블이 있었다.], 마나베 아키카츠(間部詮勝)[* 에치젠 사바에번 7대 당주.], 마츠다이라 노리야스[* 나리아키와 싸우다가 짤린 그 로주가 맞다.]를 임명하면서 히토츠바시파와의 화해를 거부한다. 이에 히토츠바시파 측에서도 막부 다이로의 개화일변도의 정책을 [[고메이 덴노]]에게 일러바쳤다. 1858년 (음력) 8월 8일 (양력 9월 14일), 고메이 덴노는 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제대로 격노하여 미토 번을 포함한 몇몇 양이파 다이묘들에게 '''<무오밀지>(戊午の密勅)'''라고 불리는 양이(攘夷) 칙명을 내렸다. 이것은 큰 문제가 되었는데, 내용 자체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당시 덴노가 막부를 통한 정식절차를 거치지 않고 다이묘에게 직접 칙명을 내리는 경우는 막부 체제를 흔드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 밀지가 나오스케에게 발각되었는데, 이이 나오스케는 즉각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했고, 밀지의 배후에 미토번과 히토츠바시가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대대적인 반대파벌 [[숙청]] 작업에 들어갔다. == 결과 == 이 사건으로 [[히토츠바시파]]의 다이묘들과 [[요시다 쇼인]] 같은 유신지사를 포함한 100여명이 숙청되었고, 이 숙청의 잔혹함을 비난하던 사람들에 의해 이이 나오스케는 조상인 [[이이 나오마사]]와 같은 '''이이의 붉은 귀신(井伊の赤鬼)'''[* 당연히 좋은 의미는 아니다. 조상 나오마사처럼 사람을 마구 때려잡는 [[오니]](鬼)라고 비꼬는 의미. 나오마사도 [[센고쿠 시대]] 당시에 '성은 이이(いい: 좋다)인데 전혀 좋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그에 빗댄 말이다.]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안세이 5년의 대옥사 때 피를 본 다이묘들의 리스트[* 하시모토 사나이, 요시다 쇼인 같은 유신지사나, 막부 바깥의 조정대신, 에도성 공무원 등은 모두 생략.]만 일부분 정리해도 한뭉큼이 나온다: * [[도쿠가와 요시노부|히토츠바시 요시노부]](고산쿄 히토츠바시 가문) : 은퇴 및 근신 * 도쿠가와 나리아키(고산케 [[미토 번]]) : 은퇴 및 근신[* 이미 코우카 원년(1844년) 철포제사 사건으로 사고를 쳐서 아들 요시아츠에게 가독을 물려주고 미토번주를 은퇴한 상태였지만, 사실상의 상왕질을 하고 있었는데, 안세이 대옥 때 완전히 정계를 은퇴한다.] * 도쿠가와 요시아츠(고산케 [[미토 번]]) : 은퇴 및 근신[* 前미토 번주 나리아키의 아들이자, 쇼군 후보 요시노부의 형. 요시아츠의 처분은 9월에 해제되긴 한다.] * 도쿠가와 요시카츠(고산케 [[아이치현|오와리 번]]) : 은퇴 및 근신[* 다이로 나오스케의 권력이 고산케 필두 오와리 도쿠가와 당주의 목마저 꺾어버렸음을 알 수 있다.] * [[시마즈 나리아키라]]([[가고시마현|사츠마 번]]) : 체포 전 사망[* 암살 음모론을 따를 경우] * 다테 무네나리([[우와지마시|우와지마 번]]) : 은퇴 및 근신 * 야마우치 요도([[고치현|토사 번]]) : 은퇴 및 근신 * [[마츠다이라 슌가쿠]]([[후쿠이현|후쿠이 번]]) : 은퇴 및 근신 * 마츠다이라 타다카타([[우에다시|우에다 번]]) : 은퇴 및 근신 또한 이때 짤린 다이묘들이 은거에 들어가면서 일본 전국에서 숱한 번사들이 낭인으로 전락했는데, 특히 [[히토츠바시파]]의 중심이었던 미토 번에서는 번사들의 불만이 폭발해, 결국 이이 나오스케도 [[사쿠라다 문 밖의 변|사쿠라다 문 밖에서 암살됐다]]. 나오스케 암살 이후 연호는 1860년에 안세이(安政)에서 만엔(万延)으로 바뀌었다. == 여담 == [[은혼]]의 칸세이 대옥사는 이것을 모티브로 삼은 것으로, [[양이전쟁]] 도중에 일어난 사건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