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지상전]] [[분류:로마-우마이야 전쟁]] [[분류:8세기]] [include(틀:동로마 제국의 대외전쟁)] ||<-3><#C0C0FF><:> {{{+1 '''아크로이논 전투'''}}} || ||<:><#C0C0FF> '''시기''' ||<-2>740년 || ||<:><#C0C0FF> '''장소''' ||<-2>동로마 제국, 아나톨리콘 테마, 아크로이논(Ακροϊνόν)[br](현 [[터키]] [[아피온카라히사르]](Afyonkarahisar) || ||<:><#C0C0FF> '''원인''' ||<-2>[[우마이야 왕조]]의 아나톨리아 침입 || ||<:><#C0C0FF> '''교전국''' || [[파일:비잔티움 제국 국기.png|width=25]] [[동로마 제국]] ||[[파일:1280px-Umayyad_Flag.svg.png|width=25]] [[우마이야 왕조]] || ||<:><#C0C0FF> '''지휘관''' ||'''[[레온 3세]]'''[br][[콘스탄티노스 5세]] ||'''압달라 알 바탈†'''[br]압 말리크 이븐 슈에비브† || ||<#C0C0FF><:> '''병력''' ||불명 ||약 2만명 || ||<#C0C0FF><:> '''피해''' ||불명 ||약 1만명 || ||<:><#C0C0FF> '''결과''' ||<-2>[[동로마 제국]]의 결정적인 승리 || ||<:><#C0C0FF> '''영향''' ||<-2>[[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압박 약화[br]'''[[동로마 제국]]의 [[이슬람 제국]]에 대한 반격시작''' || [목차] == 개요 == 740년 아나톨리아 반도의 아크로이논에서 동로마 제국의 황제 [[레온 3세]]와 그의 아들 [[콘스탄티노스 5세]]가 압달라 알 바탈이 이끄는 아랍군을 격파한 전투로, 10여년 후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과 [[아바스 왕조]]의 등장에도 큰 영향을 준 전투이다. [[히샴]] 칼리프 때에는 왕조의 여러 왕자, 왕족들이 앞장서서 참전했는데,[* 영어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Arab%E2%80%93Byzantine_wars#Raids_under_the_last_Umayyads_and_the_rise_of_Iconoclasm|Arab–Byzantine wars]] 중, 'Under the more aggressive Caliph Hisham ibn Abd al-Malik (r. 723–743), the Arab expeditions intensified for a time, and were led by some of the Caliphate's most capable generals, '''including princes of the Umayyad dynasty like Maslama ibn Abd al-Malik and al-Abbas ibn al-Walid or Hisham's own sons Mu'awiyah, Maslama and Sulayman.''''] 이 전투의 패배로 720년대 이래의 성과가 수포로 돌아가게 되어 왕조의 권위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한 프린스턴 대학 비잔티움·그리스학 교수 [[https://en.wikipedia.org/wiki/John_Haldon|존 홀든(John Haldon)]]이 쓴 '[[https://www.amazon.com/Empire-That-Would-Not-Die/dp/0674088778|The Empire That Would Not Die: The Paradox of Eastern Roman Survival, 640-'''740''' ('''죽지 않는 제국: 동로마 생존의 역설''')]]'의 740년은 이 전투의 동로마측의 승리에 '동로마의 생존투쟁은 이로써 끝났고 생존은 한동안 보장되었다'라는 의미를 두어 잡은 연도일 정도로 이 전투는 중요한 전투로 꼽힌다. == 배경 == 지난 1세기 동안 아랍인들은 지속적으로 아나톨리아 반도를 침략하여 흑해변의 북부 일부 정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침략을 최소한 한 번 이상은 받았으며, 718년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 [[동로마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지켜내는데 성공한 후에도 불과 10년도 안 된 720년대부터 다시 공세를 재개하였고(그만큼 국력의 격차가 컸다.),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히샴]]이 즉위한 이후로 침략이 더욱 더 격화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전투 패배 이후로 동로마를 완전히 병탄할 수는 없음을 체감한 이슬람 측은 대전략 방향을 국경지대 약탈로 인한 국력 소모 강요로 틀었고, 아나톨리아 반도, 특히 동부의 카파도키아는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그러나 [[하자르]]와의 전쟁으로 우마이야 왕조의 국력이 소모되고, [[투르-푸아티에 전투]] 등에서 우마이야 왕조가 패전을 거듭하면서 점차 아나톨리아에서의 아랍인들의 성공은 줄어들었고, 이 시기의 침략은 아나톨리아의 핵심 지역인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에 도달하지 못했다. 하지만 737년 [[우마이야 왕조]]가 [[하자르]]인들을 크게 격파하면서 우마이야 왕조는 다시 [[동로마 제국]]을 향해 전력을 투사할 수 있게되었고, 칼리파 [[히샴]]은 아나톨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740년, 히샴은 자신의 아들 술레이만을 대동한 자신의 치세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원정대를 편성하였다. == 전투 == 원정이 시작되고 알 가미르가 이끄는 경무장한 1만명의 병력은 아나톨리아 서부의 해안지대를 공격하러 향했고, 압달라 알 바탈과 압 말리크 이븐 슈에비브가 이끄는 군대가 뒤를 따랐으며, 히샴의 아들 술레이만이 이끄는 군대가 카파도키아를 급습했다. [[레온 3세]]의 군대는 압달라 알 바탈의 군세와 맞서 싸웠는데, 구체적인 전투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레온 3세의 동로마군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1만여명의 아랍군이 전사했으며, 아랍군의 두 지휘관 모두 전사했다. 나머지 원정군들도 아나톨리아의 시골 지역을 약탈하는데는 성공했지만, 요새화된 아나톨리아의 도시들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극심한 굶주림을 겪은 뒤 철수했다. 이때 동로마 제국군은 2만명에 달하는 포로를 사로잡았다고 한다. == 영향 == 아크로이논에서의 승리는 2차례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제외한 아랍인들과의 주요 전투에서의 [[동로마 제국]]의 첫 승리라는 의미를 가지며, 세바스토폴리스 전투 이후부터 매우 수세적인 입장이였던 동로마 제국이 아랍인들과 동등한 입장으로 전환하게되는 분기점으로 평가된다. [[콘스탄티노스 5세]] 치세 초기의 내란으로 아랍인들의 아나톨리아 침략은 재개되었으나, 침략의 위력은 크게 감소하였고 이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슬람 제국]]의 압박이 약화되는 결과를 불러왔고, 이후 [[콘스탄티노스 5세]]는 [[우마이야 왕조]]의 몰락을 틈타 이슬람 제국에 공세를 가하기도 했다. 한편 레온 3세는 아크로이논에서의 대승을 기념하여 아크로이논의 도시명을 '승리의 도시'라는 뜻의 니코폴리스(Νικόπολις)로 개명하였다. 이후 11세기 말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아나톨리아로 쳐들어와 니코폴리스를 정복한 [[튀르크인]]들은 니코폴리스를 '검은 요새'라는 뜻의 카라히사르(Karahisar)로 명명하였다. 튀르크인들이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 카라히사르는 [[아편]] 생산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때문에 이 도시에 [[터키어]]로 아편이라는 뜻의 '아피온(Afyon)'이라는 별칭이 붙었고[* [[아편]]이라는 이름답게 아피온은 수세기 동안 세계 최대의 아편 생산지 중 하나였으나 1960년대 이후 마약 생산을 중단하라는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인해 대부분의 [[양귀비꽃]]밭을 갈아엎고 현재는 터키 당국의 엄격한 통제 하에 의료용 목적으로 재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피온은 여전히 세계 수위권의 아편 생산량을 유지하고 있다.] 2004년에 와서 도시의 정식명이 '아피온카라히사르'로 확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