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 '''이름''' ||아카키오스[br](Ακάκιος, Acacius)|| || '''출생''' ||미상|| || '''사망''' ||[[489년]]|| || '''직위'''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 '''종교''' ||[[정교회]] || [목차] [clearfix] == 개요 == 제 47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사후 [[콥트 정교회]]로부터 [[성인(기독교)|성인]]으로 시성되었다. [[아카키오스 분열]]의 주역이다. == 생애 == 출생지 및 초기 생애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교회에서 고아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맡아서 탁월한 성과를 거뒀다. 무척 유쾌한 성격에 매우 훌륭한 사교성과 매너를 갖췄다고 하며, 황제 [[레오 1세(황제)|레오 1세]]는 그를 마음에 들어 했다. 471년 총대주교 예나디오스가 사망하자, 레오 1세에 의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선임되었다. 474년 레오 1세가 사망하자, 아들 [[레오 2세(황제)|레오 2세]]가 즉위했으나 겨우 10개월만에 사망하고 [[제노(로마)|제노]]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475년 [[바실리스쿠스]]가 반란을 일으켜 제노를 축출하고 새 황제가 되었다. 그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디모데 아엘로스의 영향을 받아 [[칼케돈 공의회]]를 거부하는 선언문 에킬리오스(egkylios)를 준비했다. 아카키오스는 처음에는 에킬리오스에 서명하려 했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도원 공동체의 압력으로 칼케돈 공의회를 옹호하는 데 힘썼다. 476년 8월 제노는 [[일루스]] 장군의 도움으로 바실리스쿠스를 몰아내고 황위에 복귀했다. 그는 아카키오스와 함께 칼케돈 공의회를 옹호했다. 그런데 482년, [[단성론]]파가 페터르 몽고스를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로 선출하여 기존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 요안니스 탈라이아에 대적했다. 이로 인해 혼란이 일어나자, 제노는 아카키오스에게 문제 해결을 의뢰했다. 이후 칼케돈 공의회파와 단성론파간의 해묵은 갈등을 해결하는 방안을 놓고 장고를 거듭했다. 그러던 중 몽고스가 자신을 총대주교로 인정한다면 두 종파간의 분열을 치유할 수 있다고 권했다. 반면 탈라이아는 로마 교황 [[심플리치오]]의 지지를 얻어낸 뒤 그를 무시했다. 이에 몽고스를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밀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얼마 후 제국의 단결을 이루기 위해 헤노티콘(Henoticon)을 발표했다. 헤노티콘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을 재확인하고, 에우티케스의 교리와 [[네스토리우스파|네스토리우스의 교리]]를 비난하고,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로스]]의 아나타마를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다만 예수의 인성과 신성에 대해 명확한 언급은 전혀 하지 않고, 단지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라고만 묘사해, 반발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페터르 몽고스는 헤노티콘을 기꺼이 수용했지만, 탈라이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를 명분으로 삼아 제노에게 탈라이아를 파면하고 몽고스를 새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세우라고 권했고, 제노는 그 말에 따랐다. 이렇게 밀려난 탈라이아는 로마로 피신한 뒤 교황청에 자신을 지지해달라고 호소했고, 로마 교황 심플리치오는 페터르 몽고스가 알렉산드리아의 단성론파와 깊은 연관이 있다며 서한을 보내 항의했다. 그러나 제노와 아카키오스는 무시했다. 심플리치오가 483년 3월 10일 사망한 뒤, 새 교황 [[펠릭스 3세]]는 비탈리스와 미세누스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사절로 가서 아카키오스에게 로마로 와서 탈라이아의 고소에 응답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사절들을 회유했고, 사절들은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한 채 484년 로마로 돌아갔다. 펠릭스 3세는 공의회를 소집해 두 주교가 임무를 완수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해임 및 파문하고, 아카키오스를 파문하기로 결의했다. 투투스는 교황의 지시에 따라 아카키오스에게 파문장을 전달하려 했다. 아카키오스가 면담조차 하지 않자, 그는 파문장을 양피지에 배껴 쓴 뒤 소피아 대성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아카키오스의 외투에 몰래 넣었다. 몇 달 후 외투 주머니에서 이걸 발견하고 분노하였고, 펠릭스 3세의 이름을 딥티코스(diptyque)에서 삭제했다. 딥티코스는 정교회에서 사용하는 세계 정교회 독립교회 주교들의 명단으로, 성찬예배 중에 보제가 큰소리로 낭송하는데, 세계 각지 여러 정교회들과 영적으로 연대하고 기억하는 걸 암시한다. 반면에 딥티코스에서 이름을 언급하지 않겠다는 것은 상대를 독립교회의 합법적인 수장으로, 또는 아예 독립교회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하여 서방과 동방 교회는 분열했지만,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아카키오스의 결정에 따랐기 때문에, 탈라이아는 끝내 알렉산드리아 대주교로 복귀하지 못하고 놀라의 주교가 되었다.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동방 전역에 헤노티콘을 널리 받아들이기 위해 적극적인 조치를 했다. 자신에게 반대하는 주교들을 황제에게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혐의를 뒤집어 씌워 파문에 처하고 직책에서 추방했다. 그는 끝까지 교황과 반목하다가 489년 사망하였다. 그러나 헤노티콘은 칼케돈 공의회파와 단성론파의 화해를 이끌어내는 본연의 임무에 실패했고, 서방 교회의 반발만 야기했다. 519년, [[유스티누스 1세]] 황제와 총대주교 요안니스 2세는 교황 [[호르미스다]]와 협의해 헤노티콘을 부정하고 아카키오스를 정죄하기로 하였다. 다만 [[콥트 정교회]]는 아카키오스를 성인으로 시성하고 하투르의 달 30일을 축일로 삼았다. [각주] [[분류: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동로마 제국)]][[분류:489년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