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clude(틀:역대 영국 총리)]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28 0%, #01013A 20%, #01013A 80%, #000028);" '''{{{#ffc224 아서 밸푸어 관련 틀}}}'''}}} ||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include(틀:역대 영국 추밀원 의장)] ---- [include(틀:역대 영국 외무영연방개발부장관)] ---- [include(틀:역대 영국 보수당 당수)] ---- [include(틀:역대 에든버러 대학교의 총장)] }}}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28 0%, #01013A 20%, #01013A 80%, #000028);" '''[[영국 총리|{{{#ffc224 영국 제50대 총리}}}]][br]{{{#ffc224 {{{+1 밸푸어 백작}}}[br][[The Right Honourable|{{{#ffc224 Rt Hon. The Earl of Balfour}}}]]}}}'''}}} || ||<-2>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000028 0%, #01013A 20%, #01013A 80%, #000028);" {{{#ffc224 '''[[가터 기사단|{{{#ffc224 KG}}}]] [[훈장(상훈)/영국#s-2.4|{{{#ffc224 OM}}}]] [[영국 추밀원|{{{#ffc224 PC}}}]] [[왕립학회|{{{#ffc224 FRS}}}]] FBA DL'''}}}}}} || ||<-2>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J._Balfour_LCCN2014682753.jpg|width=100%]]}}}|| ||<:>'''본명'''||아서 제임스 밸푸어[br]Arthur James Balfour|| ||<|2><:>'''{{{#FFC224 출생}}}'''||[[1848년]] [[7월 25일]] ||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이스트로디언 || ||<|2><:>'''{{{#FFC224 사망}}}'''||[[1930년]] [[3월 19일]] (향년 81세) || ||[[영국]] [[서리(잉글랜드)|서리]] 주 워킹 || ||<|2> '''재임기간''' ||제50대 [[영국 총리|총리]] || ||[[1902년]] [[7월 12일]] ~ [[1905년]] [[12월 4일]] || || '''서명'''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background: #fff; border-radius: 4px;" [[파일:Arthur_Balfour_Signature.svg|width=150]]}}}|| ||<-2>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FFC224 작위}}}'''||'''1대 밸푸어 백작[* 1st Earl of Balfour]'''[br]가터 기사 (Order of the Garter) || ||<:>'''{{{#FFC224 학력}}}'''||[[이튼 칼리지]] {{{-1 ([[졸업]])}}} (1861-1866년) [br]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컬리지[br]{{{-1 ([[철학]] / [[학사|B.A.]])}}} (1866-1869년) || ||<:>'''{{{#FFC224 종교}}}'''||[[성공회]] || ||<:>'''{{{#FFC224 신장}}}'''||185cm || ||<:>'''{{{#FFC224 정당}}}'''||[include(틀:보수당(영국))] || ||<:>'''{{{#FFC224 주요직위}}}'''||스코틀랜드 국무장관 [br] 아일랜드 국무대신 [br] 옥새상서 [br] [[영국 보수당|보수당]] 당수[br] [[해군성|해군성 제독]] [br] 외무부 장관 [br] 추밀원 의장 ||}}}}}}}}} || [목차] [clearfix] == 개요 == [[영국]]의 제50대 [[영국 총리|총리]]. 한국에서는 총리 재임 당시의 업적보다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면서 [[팔레스타인]] 지역에 [[시오니즘|유대 민족의 민족 국가 수립]]을 [[유대인]]들에게 약속한 [[밸푸어 선언]]으로 유명하다. 참고로 영국식 발음으로는 밸퍼에 가깝다. == 생애 == === 초기 === 영국 스코틀랜드의 최고의 명문 가문 중 하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아버지는 국회의원(MP)을 역임하였으며, 외삼촌은 훗날 영국의 총리가 되는 [[솔즈베리 후작 로버트 게스코인세실|로버트 게스코인세실]]이었다. 그리고 [[워털루 전투]]에서 그 나폴레옹을 패퇴시킨 명장 [[아서 웰즐리]]가 그의 [[대부]]였다. ~~태어나보니 다이아수저~~ 집안 배경에 걸맞게 최고급 교육을 받은 밸푸어는, 이튼 칼리지와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졸업하고 1874년 26살의 젊은 나이에 하원 의원에 출마하여 어렵지 않게 당선된다. 든든한 가문 배경은 정계에서도 큰 도움이 되어, 외삼촌이자 당시 [[디즈레일리]] 내각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경은 밸푸어를 비서로 채용한다. 1870년대 중후반 당시 격동의 유럽에서 [[베를린 회의]]와 같은 역사적인 외교 현장에 참여했던 경험은 훗날 밸푸어가 1차대전 시기에 외무장관으로 활동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이후 1885년 ~~든든한 백~~ 게스코인세실 경이 [[자유당(영국)|자유당]]의 [[글래드스턴]]을 꺾고 총리직에 오르자, 밸푸어 역시 내각에 입각하여 스코틀랜드 국무장관, 재무부 장관, 외교부 장관 등의 자리를 역임한다. 재임 후반기로 갈수록 게스코인세실 경은 지병이 심해졌기 때문에 밸푸어가 정부의 정책에 미치는 영향력은 갈수록 강해졌고[* 특히나 [[보어 전쟁]] 당시 전쟁을 실질적으로 수행한 것은 밸푸어였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마침내 1902년 게스코인세실 경이 수상 자리에서 사의를 표명하자[* 다만 게스코인세실 내각이 17년 동안 쭉 지속된 것은 아니다. 로버트 게스코인세실 항목과 글래드스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19세기 후반 20년 동안 영국의 총리 자리는 딱 한 번 [[로즈베리 백작 아치볼드 프림로즈]]이 총리직에 취임한 것을 제외하면 이 둘이 계속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리고 애초에 로즈베리 백작 또한 글래드스턴의 정치적 양아들이었다.~~] 밸푸어는 다수의 보수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대영제국]]의 총리 자리에 오른다. === 총리 재임 시기 === 밸푸어가 총리에 오름과 동시에 [[보어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끝났고, [[에드워드 7세]]의 대관식도 개최되었기 때문에 밸푸어 내각을 향한 대중들의 지지는 뜨거웠다.[* 왕의 대관식과 정권 지지도가 무슨 상관이냐고 여기기 쉽지만, 일반적으로 대관식과 같은 전국가적인 행사가 애국심을 고양시키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 시기 영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수기를 읽어보면 '새빠지게 대중들에게 [[프롤레타리아]] 계급 의식을 심어주었는데, 대관식 한 방에 리셋되었다.'라는 식의 한탄이 많이 보인다(...) 한국의 경우에는 한일 월드컵 이후 김대중 정부의 지지도가 일시적으로 폭등했던 점을 생각해보면 된다.] 게다가 야당 자유당은 심지어 보어 전쟁의 정당성 문제를 놓고 둘로 분열되어있었기 때문에 밸푸어 내각의 앞날은 창창해 보였다. 하지만 밸푸어 내각의 발목을 잡은 것은 경제였다. ~~[[빌 클린턴|???]]:문제는 경제야 바보야~~ [[자유방임주의]]의 본고장이었던 영국은, 다른 여타 국가들이 모두 [[보호무역]]을 내세울 때에도 [[자유무역]]을 고수하고 있었으나, 미국과 독일의 급속한 경제 발전 앞에 자유무역 노선을 유지할 것인지를 놓고 고심하게 되고, 결국 밸푸어 총리 취임 이전이었던 19세기 후반에 영국 정부는 수입 상품에 부분적인 [[관세]]를 부입할 것을 결정한다. 바로 이 관세 문제를 놓고 내각 안에서 분규가 일어났다. 밸푸어 내각은 보수당과 자유 통일당[* Liberal Unionist. 1886년 글래드스턴 내각이 발의한 아일랜드 자치법에 반대하여 자유당을 탈당한 세력이 결성한 정당.]간의 연립 내각이었는데, 자유 통일당 내에서 이 관세 문제를 놓고 일부 세력은 부분적으로 관세를 감소하는 한에서 관세 제도를 유지할 것을 주장한 반면, 또다른 세력은 완전한 자유 무역을 주장하면서 논란이 벌어졌던 것. 밸푸어는 '영국산 제품에 관세를 매긴 국가의 제품에 한하여서 보복성 관세를 부여하자'는 타협안을 제시하지만 자유 무역을 옹호하는 세력은 이조차 거부한다. 자유 무역을 지지하는 내각 구성원들이 대거 사퇴하면서 국정 동력을 잃은 밸푸어는 결국 1905년 12월 총리직에서 사임해야만 했다. 그 직후인 1906년의 1월의 총선에서 밸푸어는 다시 총리직에 도전하였지만, 선거 결과는 전회 선거 대비 246석을 상실한 보수당의 참패였고[* 밸푸어 본인조차 지역구에서 낙선했고, 선거 직후 다른 지역구에 발생한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되어 겨우 의회로 복귀했다.] 결국 다시는 총리직에 오르지 못한다. 한편 외교적으로 밸푸어 내각은 [[대영제국]]의 독보적인 지위를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이 시기 대영제국의 지위에 도전한 국가는 [[제정 러시아|러시아]]와 [[독일 제국|독일]]이었다.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일본 제국|일본]]과 [[영일동맹]]을 체결하고 [[러일전쟁]]을 뒤에서 지원해주었으며, 독일을 견제하고자 오랜 앙숙이었던 [[프랑스 제3공화국|프랑스]]와도 기존의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영불협상]]을 체결한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로 영국이 소위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부르짖으면서 유럽 대륙 내의 일에 불개입할 것을 천명한 [[고립주의]]를 핵심적인 외교 노선으로 내세운 점을 고려할 때,[* 물론 그 와중에도 러시아의 남진을 방해하려고 일시적으로 프랑스와 동맹 맺고 [[크림 전쟁]]을 벌이긴 했다.] 밸푸어 내각의 외교 노선 전환은 전세계 외교가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 이후 === 비록 총리직에 다시 오르지는 못했지만, 이후로도 밸푸어는 보수당의 요인으로 남으면서 활발한 정계 활동을 펼쳤다.[* 본인은 서민원 의원 신분(이전 서술과 달리 밸푸어가 귀족원에 입성한 시기는 백작 작위를 받은 말년(1922년)이다.)이었으나 보수당이 다수였던 귀족원을 활용해 자유당 정권을 집요하게 견제했고, [[로이드 조지]]는 "귀족원은 헌법의 감시인이 아니라, 밸푸어의 푸들이다.(the House of Lords is not the watchdog of the Constitution, but Mr. Balfour's poodle.)"는 비아냥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거국내각이 수립되자 밸푸어는 1916년 [[로이드 조지]]에 의하여 외무부 장관으로 재발탁된다. 유대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스라엘의 건국을 약속했던 [[밸푸어 선언]]이 이 시기의 일.[* 한가지 아이러니라면, 밸푸어는 수상 재임 당시 동유럽 유대인들의 영국 이주를 제한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폈었다.] 종전 이후에도 로이드 조지 내각에 남아 [[파리 강화 회의]]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협상장에도 참가하면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1922년 5월 밸푸어 백작이 되었고, 동년 10월 로이드 조지 내각의 붕괴 이후에도 정계의 원로로 왕성히 활동했으며[* 노년에도 기력이 왕성했다. 죽기 2년전인 1928년에 80살의 나이에도 테니스를 쳤다고 한다.], 이 때 추밀원장으로서 영국 본국과 자치령의 관계를 재규정한 [[밸푸어 선언(1926)|1926년 밸푸어 선언]]을 발표하기도 했다. 1930년 사망한다. == 선거 이력 == || '''연도''' || '''선거 종류'''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득표율)''' || '''당선 여부''' || '''비고''' || || 1874 || 1874년 영국 총선 ||<|3> [[하트퍼드]] ||<|16> [include(틀:보수당(영국))] ||<-2> '''무투표 당선''' || '''초선''' || || 1880 || 1880년 영국 총선 || '''564 (58.5%)''' || '''당선(1위)''' ||<|2> '''재선''' || || 1885.6 || 1885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2> '''무투표 당선'''[* 지방정부위원회 위원장 임명으로 인한 보궐선거] || || 1885.11 || 1885년 영국 총선 ||<|8> [[맨체스터]] 이스트 || '''4,536 (55.0%)''' ||<|2> '''당선(1위)''' || '''3선''' || || 1886.7 || 1886년 영국 총선 || '''4,160 (54.2%)''' ||<|2> '''4선''' || || 1886.8 || 1886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2> '''무투표 당선'''[* 스코틀랜드 국무장관 임명으로 인한 보궐선거] || || 1892 || 1892년 영국 총선 || '''5,147 (52.0%)''' || '''당선(1위)''' ||<|2> '''5선''' || || 1895 || 1895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2> '''무투표 당선'''[* [[제1재무경]] 임명으로 인한 보궐선거] || || 1895 || 1895년 영국 총선 || '''5,386 (53.9%)''' ||<|2> '''당선(1위)''' || '''6선''' || || 1900 || 1900년 영국 총선 || '''5,803 (63.4%)''' || '''7선''' || || 1906.1 || 1906년 영국 총선 || 4,423 (40.9%) || 낙선(2위) || || || 1906.2 || 1906년 영국 하원의원 보궐선거 ||<|4> [[시티 오브 런던]] || '''15,474 (78.9%)''' ||<|2> '''당선(1위)''' || '''8선''' || || 1910.1 || 1910년 1월 영국 총선 || '''17,907 (45.0%)''' || '''9선''' || || 1910.12 || 1910년 12월 영국 총선 ||<|2><-2> '''무투표 당선''' || '''10선''' || || 1918 || 1918년 영국 총선 || '''11선''' || == 여담 == * 평생 독신이었다. 그래서 1922년 서임된 밸푸어 백작 작위는 특별칙허로 동생 제럴드 밸푸어와 그의 후손들로 이어진다. [[분류:영국의 백작]][[분류:영국 총리]][[분류:영국 외무영연방개발부장관]][[분류:1848년 출생]][[분류:1930년 사망]][[분류:가터 훈장]][[분류:왕립학회 회원]][[분류:이튼 칼리지 출신]][[분류:케임브리지 대학교 출신/트리니티 컬리지]][[분류:에든버러 대학교 재직]][[분류:국공립대학 총장]][[분류:영국 보수당 당수]][[분류:이스트로디언 출신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