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我邦疆域考''' == 개요 == ||<:>[[파일:아방강역고.jpg|width=100%]]|| ||<:> {{{#FFFFFF '''아방강역고 권4'''}}}|| 말 그대로 우리나라(我邦)의 강역(疆域)에 대하여 살핀(考) [[지리서]]. 조선후기의 네임드 문신인 다산 [[정약용]]이 한민족 역대 왕조들의 강역을 서술한 저서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 중. == 상세 == 1811년([[순조]] 11년)에 편찬되었다. 당시 정약용은 [[신유박해]]에 휘말려 두 형과 함께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다시 [[강진]]으로 옮겨졌는데, 아방강역고 역시 이 시기의 다른 수많은 저서들처럼 유배지에서의 긴 연구 활동이 낳은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1833년 북로연혁(北路沿革) 속편과 서북로연혁(西北路沿革) 속편을 증보하고 1830년대 전후로 발해속고(渤海續考)를 증보하면서 애당초 12권의 원고로 전해졌는데, 이를 1903년([[광무]] 7년) [[장지연]]이 내용을 추가 증보[* 원본에 장지연이 '연안(淵按)'이라고 하는 의견을 첨언하였고, 당시 일본 고사의 영향을 받아 임나부(任那考)를, 또 새로이 발굴된 황초령비문(黃草嶺碑文)과 당시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백두산정계비고(白頭山定界碑考)를 추가하여서 간행했다.]해 '대한강역고(大韓疆域考)'로 고친 것이 [[황성신문|황성신문사]]를 통해 활자본 9권으로 간행되어 널리 알려졌다.[* 이것을 장지연이 1928년에 다시금 우리말로 번역한 뒤 상하권으로 나누어 '조선강역지(朝鮮疆域誌)'란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아마도 실학 정신이 지니는 의식 계도를 역사지리서로써 성취하려는 민족 자주 운동의 일환이었던 듯.] 이후 1936년 [[정인보]], [[안재홍]]이 교열하여 간행된 [[여유당전서]] 제6집 지리집에는 4권짜리로 간추린 '강역고'란 이름의 교정본이 수록되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신조선사에서 발간한 이 여유당전서 판본을 1970년 이우성(李佑成)의 해제와 함께 6책으로 압축하여 영인(影印)하였다.] [[고조선]]부터 [[발해]]에 이르는 우리나라 강역의 역사를 국내 또는 국외(대개 중국)의 문헌을 통하여 고증하였는데, 여기에 '용안(鏞案[* 추측건대 '약용(鏞)이 생각하는 바(案)'란 의미인 듯.])'으로 운을 떼는 논평을 덧붙여 내력을 상술하고 있다. 현대에까지 논쟁이 지속되고 있는 [[고조선]]의 중심지와 발해 외에도 [[한사군]]의 위치에 대한 연구도 수록되어 있는데, 고조선의 중심지를 평양 일대로 보고 한사군을 압록강 등 한반도 북부 지역으로 비정하였다.[* 이를 '반도중심론'이라고 한다.] 이는 [[기자(중국)|기자]]가 [[정전제]]를 평양부의 일부인 남외성(南外城) 내에서만 한정적으로 시행하였다고 기술한 [[동국여지승람]]의 기존 주장을 불신한 데에 따른 주장이다.[* 정약용은 해당 유적이 [[당나라]] [[이세적]]이 주둔하면서 만든 [[둔전]]의 흔적일 뿐인데, 기존의 지리서들이 이것을 고조선 시기의 것으로 오인하였다고 일축했다.] 이 같은 정약용의 학설은 현대 한국사학계의 중추적인 것으로써 계승되어 온다. 이를 두고 [[한사군 한반도설 식민사관설|한사군의 위치를 한반도로 비정 하는 것이 식민사관이란 주장]]이 있으나 잘못된 것이며,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을 참조. 권1의 '마한고'를 통해 정약용은 [[목지국]]이 오늘날의 [[익산시]]라는 주장을 펼쳤는데, 이것이 오늘날까지도 탁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유배 생활이 끝난 뒤로 2권을 보충한 지 오래였지만, 정약용은 계속해서 이 책의 발문을 쓰지 않았다. 때문에 귀양살이 중에 쓴 책이므로 참고 서적이 부족하였다는 토로와 함께 책 전반에 대한 해설을 덧붙인 '제강역고권단(題疆域考卷耑)'이라는 자서(自序)가 전해져 온다. [[http://contents.history.go.kr/front/hm/view.do?treeId=010604&tabId=03&levelId=hm_111_0050|링크 참조]] == 의의 == 한백겸의 [[동국지리지]]나 [[이중환]]의 [[택리지]]가 그렇듯, 이 책 역시도 [[실학]]의 거두인 정약용의 저작인 만큼 사료 비판에 토대를 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아볼 수 있다. 또, 상술하였듯이 우리나라 강역의 고증에만 국한하지 않고 선대 지리서의 오록을 정정하는 데에도 힘썼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삼한보다는 대부분 한사군이나 발해 등 북방에 대한 경계를 밝히는 데에 주력하고 있다는 한계를 보인다. 물론 이는 정약용이 아방강역고를 통하여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거란]]에 의해 멸망하면서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에 국한된 것을 통탄한 까닭으로 그리 서술하였으리라 사려된다. 실제로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바로 우리 강역은 왜 한반도 내부로만 고착되어 외부 세계로 더 나아가지 못했느냐에 대한 역사지리학적 고찰이다. 여기서 '반도 중심론'을 펼침으로써 한민족 세계관을 한반도 내로 국한한 정약용의 영토 의식에 의문을 품을 수도 있지만, 이는 당시 [[북벌론]] 등의 허구적인 명분론에 대해 비판하려는 내치적 개혁론과 더불어 삼한의 영역을 한강 남쪽으로 설정하였던 [[남인|기호 남인]]의 정치적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의 주류 흐름이었던 한반도 남북 이원적 체계의 관점을 계승함으로써 구태의연한 명분론적 역사의식을 탈피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것이다. == 구성 == === 권1 === 한국 역사에 존재했던 국가 내지는 종족[* 중국이 설치한 [[한사군|군현]]이나 [[말갈]] 등 자신들만의 국가를 세우지 못한 종족을 포함한다.]들의 전체 강역. 주로 고조선, 발해, 한사군, 삼한 등을 총론과 각론으로 구별하여 서술하였다. * 조선고(朝鮮考) * 사군총고(四郡總考) * 낙랑고(樂浪考) * 현도고(玄菟考) * 임둔고(臨屯考) * 진번고(眞番考) * 낙랑별고(樂浪別考) * 대방고(帶方考) * 삼한총고(三韓總考) * 마한고(馬韓考) * 진한고(辰韓考) * 변진고(弁辰考) === 권2 === 권1 내용의 연장. * 변진별고(弁辰別考) * 옥저고(沃沮考) * 예맥고(濊貊考) * 예맥별고(濊貊別考) * 말갈고(靺鞨考) * 발해고(渤海考) === 권3 === 옛 국가들의 수도에 대한 고증, 지역 구분에 따른 강역 변천(팔도연혁총서)[* 물론 저술한 당시의 구분을 따르므로 지금과는 사뭇 다르다.], 위치상 변천이 심하거나 정확한 위치 비정이 어려운 지명(특히 [[패수]]와 [[백산]])에 대한 내용. * 졸본고(卒本考) * 국내고(國內考) * 환도고(丸都考) * 한성고(漢城考) * 위례고(慰禮考) * 팔도연혁총서상(八道沿革總敍上) * 팔도연혁총서하(八道沿革總敍下) * 패수변(浿水辯) * 백산보(白山譜) === 권4 === 발해와 [[함경도|북로]], [[평안도|서북로]] 등 북쪽 변경에 관한 자료들의 보완설명. * 발해속고(渤海續考) * 서북로연혁속(西北路沿革續) * 북로연혁속(北路沿革續) [[분류:조선의 도서]][[분류:연세대학교 도서관 소장품]][[분류:규장각 소장품]][[분류:정약용]]